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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업적 | 영상한국사 I 012 조선 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후대의 평가 28864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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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해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다. 개국 초에는 한때 불우하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정종의 뒤를 이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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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양위로 조선 3대 왕에 오른 태종 이방원. 태종은 즉위 후에 호패법, 양전사업, 사병혁파, 신문고 설치, 사간원 설치 등 왕권강화 정책들을 실시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태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태종 이방원의 연관 검색어로는 왕자의 난·권력·정도전·정몽주 등이 나타났다. 감성 분석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강한 왕이자 탁월한 정치가, 비극, 갈등 등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호패법: 신분증명을 위해 나무 또는 상아로 된 명패를 패용하는 것을 의무화한 법이다. 신분, 이름, 거주지역 등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사병혁파: 조선 초기 무신이나 권세가들은 사병세력을 개인적으로 운용했다.
신문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을 위해 설치한 북으로, 왕에게 직접 상소할 수 있는 길이었으나, 엄격한 절차로 인하여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다.
사간원: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기관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하나이다. 국왕에 대한 간쟁, 부정한 신료의 탄핵, 정치와 인사 문제 등을 담당했다. 기관의 장은 대사간으로써 정3품위의 벼슬이었다.
#태종#이방원#호패법#양전사업#사병혁파#신문고#사간원#왕권강화#왕자의난#정도전#정몽주#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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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업적 – 네이버 블로그

태종 이방원의 업적 …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입니다. … 조선 건국 후 정안군으로 책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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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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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조선의 3대왕 이방원의 업적과 삶(feat.왕자의난..)

그는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강화와 유교정치,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온힘을 다했다. 대표적인 왕권강화 활동으로는 왕실 외척과 종친의 정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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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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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안대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고려의 문신에 대해서는 허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태종 이방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KBS 대하드라마에 대해서는 태종 이방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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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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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주요사건 (조선의 기초를 다지다.)

이방원은 왕세제가 된 후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력에서의 우위를 만들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은 6조 중심의 정치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왕권강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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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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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조선) – 나무위키

해당 드라마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이방원(태종 이방원) 문서 …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길히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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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우고 왕권 강화 …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싹수 보이는 놈은 다 죽였다. · 고려 왕조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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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이 즉위하고 한 업적 – 말랑헤롱

21년동안 고구려 접경 국가들을 대부분 정복하였고,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입니다. 한반도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국왕이였습니다. 영락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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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많은 업적, 정책 들을 정리해 볼께요.

태종 이방원의 여러분야 업적, 정책 정리! · 1. 왕권 강화책 · 2. 중앙제도 정비 · 3. 지방제도의 정비 · 4. 군사제도의 강화 · 5. 산업 정책의 발전 · 6. 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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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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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한국사 I 012 조선 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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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태종 이방원 업적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 Views: 조회수 32,105회
  • Likes: 좋아요 201개
  • Date Published: 2019. 5. 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CjFU-pB3yA

재위 1400∼141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원(芳遠)이다.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元天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 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는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주 01)에게 압력을 넣어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 때 이방원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였다. 왕대비(王大妃) 에게 압력을 넣어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주 02)·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강비(康妃)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하자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모만(侮慢)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업적

재위 기간: 1400~1418​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다섯째 아들이며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는데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입니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조선 건국 후 정안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나라를 세운 후

정비 신의 왕후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이 아닌

계비 신덕 왕후 강 씨 소생의 아들

막내 방석을 세자로 내세우고

정도전과 개국공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정도전(1342~1398) / 삼봉 기념관

​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과 정도전은 계속 대립합니다.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재상 중심의 정치가

왕권을 약화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정도전의 사병 혁파로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게 되면서

이방원은 동복형제들과 이숙번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과 세자 방석을 죽이고 국정을 장악합니다.

이를 ‘1차 왕자의 난’ 이라고 합니다.

방과, 정종 즉위 / 2차 왕자의 난 / 방원, 조선 3대 왕이 됨

태조는 둘째 방과를 왕세자로 책봉한 후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방과는 조선 2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이방원에게 있었으며

1400년엔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도

별로 평가를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동복 형인 회안군 방간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겨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합니다.

이를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며 박포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박포를 처형하고

형인 방간은 귀양보냅니다.

1400년 2월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뒤

정종 2년 1400년 11월 에 조선 3대 왕 태종이 되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

태종은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 6조 직계제 (왕이 6조에게 명령하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 를

실시하였고,

​ 경제 기반을 안정 시켰으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 을 추진하였고

사원이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 하였습니다.

호패법을 실시 하여 인구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의 자료로 활용하였습니다.

태종(열여덟 해)과 아들인 세종(32년)의

재위 기간을 합하면 50년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조선왕조의 기틀을 굳건히 하였습니다.

사병 혁파, 왕권 강화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왕족이나 개인이 거느리던 사병을 없애고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귀양 보내거나

처형하였는데

개국공신인 이숙번을 유배시켰습니다.

태종은 또 친족을 배척하였는데요.

​ 처가 식구인 장인 민제와

처남들(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비 원경왕후인 민 씨의 불만도 깊어지게 됩니다.

원경왕후는 1차 왕자의 난 때 친정에 사병과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무기와 사병을 이방원에게 내어주는 등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문고 설치

태조 2년 1402년에는 대궐 앞에 북을 달아

​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치게 하는 신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주자소 설치

태조 3년 1403년(계미년)에는

나라에 서적이 드물어 볼 수 없으므로

활자를 인쇄하였습니다.

특히 태종 3년(계미년)에

​ 조선시대 최초의 구리 활자인 계미자 를 만들었습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김

정종 1년에 개경으로 옮겼던 수도를

태종 5년 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이후 현재까지 수도로서 6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호패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호패법 시행

조선은 신분에 따라 양반에서 노비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1413년에 호패를 발급하였습니다.

호패는 나무나 상아 등으로 만들었으며

이름과 직업, 계급 등을 적었고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입니다.

노비는 주인, 주거지, 나이, 얼굴빛, 수염 유무까지

기록하였습니다.

호패는 1416년 폐지 이후

존폐를 거듭하다가

숙종 1년 1675년 이후부터 정착되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죽음

태종은 재위 열여덟 해에

세자 제(양녕대군)를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뒤

2개월 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보내다가

1422년 세종 4년, 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의 능 / 위치 – 서울 서초구

출처 – 문화재청 / 조선왕릉(왕과 왕비의 능) – 2009년 세계유산 등재

헌인릉:

헌릉 /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태종 이방원] 조선의 3대왕 이방원의 업적과 삶(feat.왕자의난..)

조선의 3번째 왕 이방원(1,2차 왕자의난)

태종은 이성계의 5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방원 자는 유덕이다. 이방원은 아버지나, 형들과 다르게 무예도 좋아했지만 학문을 더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여 밀직사대언이란 직책으로 관직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을때 이성계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가 무척이나 기뻐했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당시 이성계를 도와 개성으로 같이 진군하여 (구)고려의 세력들을 소탕하였으며 고려말기 고려내의 개혁파와 온건파의 대립 중 아버지인 이성계가 말에서 낙마하여 치료를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온건파의 수장이였던 정몽주의 주도하에 개혁파를 숙청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아버지를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해당 사건을 막을 수 있었고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려 하였으나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처단하고 온건파를 숙청하여 개혁파인 신진세력들의 입지를 다지게 하는 등 조선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렇게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게 되고 세자를 책봉함에 있어 이방원이나 신의왕후의 자식들 중 하나가 아닌 11살의 배다른 동생인 이방석을 세자책봉하게 된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강력한 신권을 꿈꾸던 정도전과 강력한 왕권을 원하던 이방원의 전쟁을 의미하였고 이는 결국 1차 왕자의난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어 정도전과 방석,방번을 제거하게 된다. 1차 왕자의난 이후 형인 정종이 2대 조선의 왕이 되었고 이후 발생된 2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은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임금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을 죽이고,대립했던 조정대신들을 죽이는 등 피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것과 다르게 이방원은 자기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백성들을 사랑했으며 올바른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는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강화와 유교정치,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온힘을 다했다. 대표적인 왕권강화 활동으로는 왕실 외척과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 시켰으며, 6조를 관장하던 의정부를 독자적 기구로 개편하고 6조 직계제를 실시 하였다.

그리고 신권의 견제를 위해서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 하여 대신들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였으며 공신들의 사병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켜 임금이 병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였다.

경제적 안정화를 위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양안과 호구조사를 실시 하였다. 호패법을 실시 하여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호패 착용을 의무화 하였는데 이는 토지대장과 인구조사를 통해 정확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였다.

또한 태종은 백성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신문고를 설치 하여 억울한일을 당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였으며 정종때 부터 실시하던 <노비변정도감>을 지속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된 자들도 해방 시켜주었다.

이런 이방원은 1418년 자신의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며 후에도 정치와 병권을 놓치 않고 지내다.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방원 비하인드 스토리

1. 태종 이방원은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대신들 몰래 사냥을 가서 대신들과 자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럴때 마다 그는 “나는 무인 출신이다. 무인이 활을 쏘고 사냥을 함이 마땅한데 그대들은 어찌 이리 잔소리만 하는가”라고 하여 대신들과 이 일로 자주 싸웠다 한다.

2. 관리로 지낸 7여년은 세월은 이방원이 나라를 다스리고 대신들을 관리하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3. 태종 이방원은 자식들을 무척이나 아꼇다고 전해진다. 첫째인 양녕대군은 공부를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많은 조정대신들이 왕세자를 폐위하자고 하였으나, 자신의 자식들은 형제들끼리 피로써 싸우지 않게 하려고 첫째에게서 왕세자위를 폐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고기를 좋아하는 세종이 자신이 죽을 시 3년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면 건강이 상할까 자신의 3년상 동안 세종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하였다 한다.

4. 이방원에게는 원경왕후 민씨로부터 낳음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양녕대군은 너무 방탕하여 왕세자를 폐위당하였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의의하여 스님이 되어 셋째인 충녕대군이 4대 임금이 됨.

5. 거북선은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기 보다 태종 시절에 처음으로 언급이 되었으며 이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5.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의 확립은 후에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태종이 없었다면 ‘훈민정음’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안대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고려의 문신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고려의 문신에 대해서는 허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태종 이방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KBS 대하드라마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KBS 대하드라마에 대해서는 태종 이방원 (드라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태종(太宗,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은 조선의 제3대 임금(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개요 [ 편집 ]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왕자 시절 받은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다. 이후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생애 [ 편집 ]

생애 초반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부 귀주(歸州)에서 이성계와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1] 운곡 원천석이 태종의 잠저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였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2]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3]

1388년(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왕 2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어머니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경처 강씨(신덕왕후)는 여묘살이를 중단시키고 해주로 건너가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내었다.

역성 혁명 활동 [ 편집 ]

정몽주와 온건개혁파 제거 [ 편집 ]

포은 정몽주 (1337-1392) 역성혁명과 개혁방법의 차이로 인해 이방원에게 암살되었다. (1337-1392)역성혁명과 개혁방법의 차이로 인해 이방원에게 암살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청구영언』과 『가곡원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 此亦何如彼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 이방원, 〈하여가〉

《하여가》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하여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 정몽주, 〈단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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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4]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훗날 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5]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

조선 개국 [ 편집 ]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8]

왕자의 난 [ 편집 ]

제1차 왕자의 난 [ 편집 ]

완산부원군 이천우 (1354-1417) 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1354-1417) 태조 이성계 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6]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 [ 편집 ]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9] 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10]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1]

치세 [ 편집 ]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 편집 ]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새로히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척불숭유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원전을 몰수하였다. 또한 호패법·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다스리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12] 사병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 조직은 사라졌으며, 이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다.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 편집 ]

태종 대에는 모두 4차례에 걸쳐 관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태조 대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 방향성을 권근과 하륜 등이 수정하여 국왕-의정부-육조-언관 체제가 이 시기 자리잡았다. 태종 14년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13]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또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공신 숙청 [ 편집 ]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당대와 다음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7] 태종은 먼저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이거이 부자를 유배보내고, 공신이자 오른팔이었던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을 유배보낸 뒤 ‘사후 백여년간 도성출입을 금지’하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원경왕후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 민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그의 네명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과 민무회 등은 모두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었다.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들 주변에 인물들이 결집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장인 민제는 곧 병사했고, 장인의 죽음과 동시에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유배했다가 사사케 하고,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 그의 처가는 몰락하게 되었다. 1405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14] 본인이 제거한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14]

서적 간행 [ 편집 ]

1403년 태종은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여 계미자(癸未字) 활판을 제작하게 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다. 1404년 2월에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것을 명령한 사실까지 실록에 기록되었다.[15]

1413년에는 즉위 이후에 추진한 일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 (續集詳節) 2권을 간행하였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하려다가 중단한 《고려사》의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 하게 하였으며, 권근과 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이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집권 후반 [ 편집 ]

효령대군 (1396-1486) 태종의 둘째 아들 (1396-1486)태종의 둘째 아들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16]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태종은 명하여 충녕이 책을 못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보냈다.

태종 우(雨) [ 편집 ]

《연려실기술》에는 태종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17]

퇴위와 죽음 [ 편집 ]

심온 제거 [ 편집 ]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 외척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 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박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인 세종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최후 [ 편집 ]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주 1]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묘호와 시호 [ 편집 ]

묘호는 태종이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숙종과 고종 때 존호가 더해졌다. 최종 존시는 태종(太宗)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가족 관계 [ 편집 ]

능묘 [ 편집 ]

태종은 1422년 9월 6일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에 원경왕후와 합장되었다가 후에 천장(遷葬)하였다. 능호는 헌릉(獻陵)이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仁陵)이 위치해 있다. 헌릉은 인릉과 함께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10]

태종이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서적 [ 편집 ]

평가 [ 편집 ]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고 냉철하였다.[34] 이는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惡業)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여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와 비교해 볼 때, 쿠데타로 즉위한 인물로서의 공통점은 있지만, 사후 처리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즉, 세조는 왕위 등극 후에 공신을 우대해 줘서 이들에게 공을 치하했지만, 태종은 반대로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된다.[35]

기타 [ 편집 ]

숭유억불 정책 [ 편집 ]

태종은 집권 직후 종교문제에도 개입하였다. 그 자신이 성리학을 수학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한층 강화한다. 1406년 사원혁파를 단행하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압수하였으며, 승려들 역시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전토를 국고에 강제 환속시켰다.

도교에도 부정적이었던 그는 1417년부터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참서와 예언서들, 무속 관련 서적들을 소각하도록 한다.

정종과 유사한 시호 [ 편집 ]

태종의 시호는 공정(恭定)으로 형인 정종의 시호 공정(恭靖)과 유사하여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한 형 정종은 그에게 양위를 했음에도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도 못하다가 숙종 때인 1681년(숙종 7년)에 가서 정종의 묘호를 받는다.

정릉 수난 [ 편집 ]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 초 자신이나 동복 형제를 제치고 이복 동생인 의안대군 등을 세자로 세운 것에 불만을 품은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분풀이를 한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자신의 신후지지도 미리 옆에 마련하고 한성부의 중심에 안장하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이장하면서 흥천사(興天寺)를 폐쇄했고, 신덕왕후의 능에 있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고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한다.[36]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에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을 다리 교각으로 만들었다. 능침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36]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37]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37]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37] 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38]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38] 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 ” — 《연려실기술》

당시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정해 묘를 돌보게 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비 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달라는 조심스러운 복위 제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38][39]

신덕왕후 강등 [ 편집 ]

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를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동시에 태종은 적서 차별법을 발표하여 서자들의 관직 기회를 차단한다. 신덕왕후는 사후 25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송시열의 주도로 지위가 왕비로 복위된다.

“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39] ”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39]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39] 88년간 이어져온 논쟁이었다.[39]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귀되는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는데,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서얼 차별 규정 [ 편집 ]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배제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40]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40][41]

방원은 둘째 형 영안군 방과를 왕으로 앉히면서, 그 교지에 ‘간신 정도전 등이 서얼을 세워 후사를 삼아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뒤엎고 적서의 구분을 어지럽히려 하였다.’(태조실록 15년 9월 정해 조)라고 쓰게 하였다.[40] 이것이 적, 서를 구분지은 최초의 기록이다.[40] 그 뒤 태종은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서자 차별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적서, 구분의 문제는 여러 신하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다.[40]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하였다.[40]

그 후 서선(徐選)은 1415년(태종 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고 공의를 내세워 이의 채택을 보았다. 서얼 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 등의 공의를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된다.

코끼리 일화 [ 편집 ]

재위 11년인 1411년 2월 22일, 일본왕 원의지(源義持,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코끼리를 바쳤다. 이는 기록 상으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였다. 태종은 이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다.[42] 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가 코끼리를 보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이우를 밟아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43]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을 올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에 두길 청하니,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44] 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날로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불러오게 했다.[45]

이 코끼리는 세종 때까지 살았는데, 상왕이었던 태종은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를 기르는 것이 어렵다는 계를 올리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를 돌아가며 키우도록 했다.[46] 이듬해인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 발생했는데, 이후에는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47]

같이 보기 [ 편집 ]

주해 [ 편집 ]

↑ [18] 신궁( 창경궁 )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 후 성종 14년( 1483년 )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 양녕대군(1394년생)의 형들이므로 경안공주(1393년생) 보다 이전에 출생함

각주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주요사건 (조선의 기초를 다지다.)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이방원과 그와 관련된 주요사건들을 자세히 알아본다.

이방원과 그의 행적

태종은 조선의 세 번째 왕이다. 본명은 이방원이고 1367년에 태어나 142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다. 또 향후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의 기초를 다진 왕이다.

이방원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에 많은 일조를 했으며 이 후 나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제도를 개편함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행적은 태종 다음 왕이 되는 세종대왕이 많은 업적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이방원은 새 왕조의 초창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정도전과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강씨 (신덕왕후)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다. 세자는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이방석이 책봉된다. 이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 난을 승리로 이끌며 실권이 강해진 이방원은 이 후 벌어진 이방간의 난 (2차 왕자의 난)에서 한 번 더 승리하며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그 후 왕세제에 책봉된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지난번 작성한 아래 글에서 참고 바란다.

이방원은 왕세제가 된 후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력에서의 우위를 만들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은 6조 중심의 정치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왕권강화에 힘을 쏟았다. 또 전국을 8도 체제로 정비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나라를 관리하였다. 또 서얼차대법을 제정하여 신분에 차별을 둠으로써 유교적 관념의 확립과 양반중심의 특권을 강화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조선의 기초가 된다.

이방원은 앞에 이야기 했듯이 왕조의 창건과 세력 강화를 위해 많은 숙청을 행했다.

고려왕조의 정몽주 제거, 1차와 2차 왕자의 난, 외척들의 숙청 등이다.

왕조를 세우는 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제거한다. 정몽주(1337~1392)는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매우 유명하다. 하여가는 정몽주에게 자신과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왕조를 위해 함께 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이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이야기한다.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선죽교)에서 정몽주를 무참히 살해하고 혁명에 박차를 가한다.

태종은 자신의 왕권에 반하는 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그 일례중 하나는 당시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던 이거이(1348~1412)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으나 사병 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또 태종을 도왔던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집안도 숙청되었다. 외척으로 태종을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하다는 명목으로 제거되었다.

이와 같이 반대 세력을 처단하며 피바람을 불게 한 태종이지만 이 같은 행적은 왕실의 권한과 힘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큰 힘이 되었다.

태종의 업적과 주요사건

1401년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대궐 밖 에 달았던 북이다.

조선 초기에도 상소와 고발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신문고를 달아 최후 항고, 직접고발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임금이 북을 친 자의 억울한 사연을 직접 접수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즉, 기관에서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는 신문고를 직접 울리게 하였다.

신문고에도 제한은 있었다.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한다거나, 아랫사람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또는 타인을 매수, 사주하여 고발하게 하는 자에게는 되려 벌을 주었다.

신문고는 오직 종사(종묘사직)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하고 해결하여 주었다. (여기서 종묘사직이란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이며 사직은 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한조건에도 불구하고, 신문고에 의한 사건해결의 신속성을 얻기 위하여 사소한 사건에도 신문고를 이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 후 신문고는 사용 제한을 한층 엄격해 졌다.

또 신문고는 실제로 서울의 관리들에게만 주로 사용되었으며, 신문고 제도의 본래 취지와는 달리, 상인이나 노비, 지방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다.

이 후 연산군에 이르러 이 제도가 폐지되었다가 1771년 영조에 의해 다시 재개된다.

1413년 호패법 실시

호패란 사람의 이름, 직업, 계급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지금의 주민증과 비슷하다. 호패법은 나라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를 징수하고 군역을 부과하는 일에 활용되었다.

1414년 6조 직계제

6조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판서가 나랏일을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의정부(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의정부가 나라 업무를 처리하고, 6조는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제도(의정부서사제)를 가졌다. 따라서 6조의 판서는 담당 업무를 의정부에 먼저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이 제도는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왕권을 견제하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태종은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 대신 왕이 직접 보고를 받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세조’도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같은 해 1414년 전국을 8도 체제로 개편한다.

1415년 서얼차대법 (서얼금고법)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양반중심의 신분차별사회이다. 양반의 특권을 독점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했다. 이것이 서얼차대 제도이다. 여기서 서얼은 양첩의 소생은 ‘서'(庶), 천첩의 소생은 ‘얼'(孼)을 말한다.

이로 인해 출신 신분에 따라 사회진출의 기회가 차등을 두어 주어진다. 서얼차대를 통해 지배 집단의 지위와 권한을 강하게 하고 지배자 중심의 신분질서가 유지된다.

요약

태종 이방원과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에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출생과 사망 : 1367년 ~ 1422년

▶재위기간 : 1400년 ~ 1418년

▶주요사건 : 정몽주 제거, 왕자의 난 (1차, 2차), 사병 폐지, 외척의 숙청, 신문고 설치, 6조 직계제, 전국 8도체제, 서얼차대법, 호패법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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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싹수 보이는 놈은 다 죽였다.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싹수 보이는 놈은 다 죽였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이방원과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자리하였다.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먼저 시 한 수를 읊었다. 우리네 세상살이 중간중간에 부딪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시를 잠깐 짬을 내어 감상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라고 하는 것이다.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권유하면서,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방원다운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러자 정몽주가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고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丹心歌)’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시구를 통해 정몽주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부터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며,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 그는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ㆍ정도전ㆍ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비 안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연 것이다. 새 왕조를 여는 데 있어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뒤, 아마도 이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좌절은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이방원은 이후에도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예를 들어 모든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왕자 및 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정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갔다. 이방원으로서도 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제일 맏형은 진안대군 방우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임)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이었다. 정종 즉위 후 방원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세제 시절 사병을 혁파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고 할 때 반발하던 그가 왕위에 올라서는 이를 혁파하였으니 말이다.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인물은 이거이(李居易, 1348~1412)였다. 태조 대(代)의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 관계로 맺어져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 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그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 민씨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서, 그리고 태종을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원경왕후 집안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그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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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이 즉위하고 한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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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태종 이방원이 방영 중입니다. 그렇기에 태종에 관련된 업적을 소개하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을 세운 1등 공신이지만, 정몽주를 죽였다는 이유로 태조 이성계에게 약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한 뒤로 어찌보면 조선건국의 최고 공신은 당연 이방원인데, 한씨부인의 소생들이 아닌, 강씨의 아들 이방번이 세자가 되고, 정도전 일파는 한씨 소생의 왕족들을 계속 견제를 했습니다.

왕권강화

사병 혁파는 정도전이 주장한 개혁이였습니다.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해서 요동정벌을 하자고 하지만, 당시 이방원은 사병을 빼앗기면 본인이 목숨을 다 빼앗긴것이라 생각하여, 1차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2차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이방원의 세상이 되자 정도전에 주장한 사병을 혁파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군대를 삼군부에 재편하였습니다.

관제를 다시 개편을 하였습니다. 육조직계제를 채택하여, 의정부(정승)의 힘을 빼버리고, 바로 왕에게 보고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공신들과 외척을 숙청하였습니다.

이방원은 여홍 민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외척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할것을 우려하여, 여홍민씨의 4명의 처남을 죽이고, 세종이 처가인 청송 심씨도 왕권강화를 이유로 죽여버립니다.

역사적들으로 외척이 강해지면, 왕권이 약해지기 때문에 죽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전국적으로 행정을 정비하고, 명나라와는 우호관계를 가지며, 사대주의를 계속 하였습니다.

처음에 왕이 되기 위해서, 왕자의난을 일어키고,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정책을 보고, 옥새를 가지고 다시 한양으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 한 방원

앞으로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곧 왕이 되고, 아마도 이 정책을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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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많은 업적, 정책 들을 정리해 볼께요.

태종 이방원의 여러분야 업적, 정책 정리!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초기의 어수선함을 정비하면서 수많은 업적, 정책 들을 남겼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재위 1400~1418년으로 왕위를 18년 정도 하였으나 세자시기와 상왕 시기를 합치면 실질적으로 18년 이상 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개국되자 정안군으로 1392년에 책봉되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합니다. 왕자의 난 후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정종1년 1399년 방간과 박포의 반란인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며 세자로 책봉됩니다.

세자로 책봉된 뒤 군사제도를 정비하면서 병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실권을 확보한 뒤 1400년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를 받아들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 , 정책

1. 왕권 강화책

태종의 가장 큰 업적은 왕권강화 정책입니다. 왜냐하면 건국 초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음과 동시에 후대 세종으로 이어지는 왕권 안정과 조선의 발전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통틀어 전 세계의 모든 왕들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이자 핵심목표는 왕권강화입니다.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힘든 목표이지요. 왕권강화를 꾀하다 죽는 왕들도 많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가혹할 정도로 왕권 강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방원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공신과 외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같이 왕자의 난과 여러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이고 공신들은 모두 죽거나 귀향보내고 외척 세력들은 죽거나 귀향을 보내게 됩니다. 남은 공신들도 모두 은퇴시켜서 왕권을 견제할 세력이 거의 전무하게 됩니다.

2. 중앙제도 정비

태종 이방원의 업적 중 중앙제도 정비도 탁월합니다. 의정부와 6조 체제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등을 설치하면서 왕의 업무와 신하의 업무를 구분하고 배분함으로서 왕권과 중앙집권체제는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3. 지방제도의 정비

1403년과 1406년에 고려에서 이어진 어지러운 지방제도를 고치려고 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1413년에 정비되었습니다. 완산주를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로 고쳤습니다. 또한 각 도의 단부관과 감무를 각각 도호부와 현감으로 고치고 경기도를 개편하였습니다.

지방을 8도로 정비하고 향,소, 부곡 등을 혁파하고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켰으며 속현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 군사제도의 강화

태종 이방원이 가장 관심가졌던 분야가 바로 군사력인데 1404년에 응양위 설치, 1407년 내상직을 내금위로 조직하여 태종 이바원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만 여기에 소속되었습니다. 1409년 내시위를 설치하고 10사를 시위사로 개편하였습니다.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하여 왕명 출납과 군기를 담당하였습니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 후 병조가 군사 지휘권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방군은 1409년 11도에 도 절제사를 파견하고 해안을 중심으로 영진군과 수성군을 정비 1410년 부터 군역에 제외된 향리, 노비, 교생 등으로 이루어진 잡색군을 조직해 유사시 내륙방비를 맡게 하였습니다.

5. 산업 정책의 발전

1410년 시전의 물리적, 지리적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 곡물, 우마 교역소를 설치하고 경시감, 청제감을 설치해 시장과 시전 등를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여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1415년에 공산품과 상공세 등 수익에 따라 3등급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장랑에 자리잡은 상인에게는 장랑세를 부과하였습니다.

6. 노비제도의 정비

태종 이방원은 노비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고려말 이래 향, 소 , 부곡을 주현에 편입시키고 노비 쟁송을 정비하여 국역 인구를 확보하였습니다. 1413년 노부중분결절법, 1416년 결송지한, 1417년 공사노비소량지한 을 정해 노비결송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결과 속공 노비와 사원 노비 8만여명 등 총 12만 명이 평민 신분을 회복하고 국역 인구를 확보하였습니다.

7. 사회 정책

1401년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상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410년에 호포세, 1415년에는 포백세를 폐지하였습니다.

1415년 보충군제를 실시해 양천혼인의 소생의 경우 아버지가 양인이면 보충군에 편입시켜 일정기간의 군역을 담당하면 전역후 양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노비는 동일 관청에서 같이 일하게 하여 가족이 분리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1415년 서얼차대법을 정해 서얼을 차별하는 악법을 만들어 500년 조선역사에 서얼 차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정조 대에 서얼출신 검서관으로 등용합니다.

8. 교육 제도, 정책 정비

고려 가 망하고 조선 개국 당시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정치가이자 유학자로서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조선의 건국을 못 마땅하게 여겨 은퇴하거나 은거하게 됩니다.

1406년 권근을 책임자로 유학,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서 성균관과 오부에 입학시켜 학생들을 교육시킵니다.

1406년 향교 진흥책을 마련하고 1407~1411년에는 권학사목을 정하고 4부학당을 짓습니다. 또한 기술관 양성을 위해 10학을 설치합니다.

9. 서적 편찬

태종 이방원은 역사를 중시 여겨 하륜과 권근에게 역사서 편찬을 명합니다. 이에 권근과 하륜은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이후 [태조실록]을 편찬합니다. 1403년 주자소를 설치해서 계미자 수십만자를 주조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문무를 겸비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무참히 제거하여 그의 후대에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왕들이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이상으로 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정책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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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에 대한 정보 태종 이방원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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