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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기 | 세차장에 놀러가서 풀세차(Feat.오토그루밍빈티지)ㅣ세차용품ㅣ디테일링ㅣ셀프세차ㅣ고체왁스ㅣ수자기ㅣ 47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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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수자기(帥字旗) – 서울경제

수자기는 조선 후기 장수를 뜻하는 ‘수(帥)’라는 글자가 한가운데 적혀 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 조선 후기 병서 ‘병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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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edaily.com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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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기(帥字旗) 뜻과 유래 : 네이버 블로그

수자기(帥字旗)’는 장수, 대장을 뜻하는 ‘수(帥)’ 자가 그려진 깃발로서 진중(陣中)이나 영문(營門)의 뜰에 세우던 대장의 군기(軍旗)로 총지휘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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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22/2021

View: 3183

미국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또 타향살이 하나 – 인천일보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미국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후 약 136년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 이를 2007년 10년 장기대여 형식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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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cheonilbo.com

Date Published: 3/17/2021

View: 3246

‘수자기’ 뭐길래 일출봉함에 펄럭이자 기겁한 일본 … – 아주경제

14일 더불어민주당은 일본 외무성이 국제 관함식에서 한국이 조선수군 대장기인 ‘수자기'(帥子旗)를 내건 것에 항의한 것과 관련해 “민족의 영웅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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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junews.com

Date Published: 9/9/2022

View: 3228

「수자기帥字旗 – 136년 만의 귀환」 특별전시회 개최 | 뉴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2008년 4월 1일(화)부터 5월 5일(월)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수자기(帥字旗) – 136년 만의 귀환」 특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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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ea.kr

Date Published: 3/25/2022

View: 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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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수자기

  • Author: 수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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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7.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811GOjaBrs

신미양요 150년, 강화에서 열리는 ‘수자기 특별전’

6월 1일부터 강화역사박물관서 광성보 전투 유뮬 전시회

수자기

신미양요 150 주년을 맞아 6월 1일부터 ‘수자기 특별전’이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강화전쟁박물관에서는 신미양요와 관련한 유물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1871년 6월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서 실제 사용한 수자기를 비롯해 각종 무기류와 미국 측 신문기사, 어재연(1823~1871) 장군 교지 등 유물이 전시된다.

수자기는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있는 가로, 세로 4미터가 넘는 대형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서 사용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에서 수자기를 세우고 미군에 대항해 항전했다. 미군의 근대적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함락되고,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부딪친 미군은 퇴각하게 된다.

미군은 퇴각하면서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강탈해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해왔다. 문화재청이 지난 2007년 미국과 수자기 대여협정서를 체결하고 국내로 들여왔고, 2010년부터는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대여협정기간 만료 이후에는 강화역사박물관이 직접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과 재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신미양요 때 탈취당한 수자기

저작권자 © 인천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만파식적] 수자기(帥字旗)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7년 4월 한국 문화재청이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강화도에서 강탈해 간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 ‘수자기(帥字旗)’를 반환받는 데 조언을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박물관장이 보낸 답변은 ‘불가’였다. 대통령 명령과 의회 입법 때문에 수자기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빼앗아 온 250여점의 깃발을 돌려줄 수 없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반환이 힘들다는 것을 확인한 문화재청은 두 달 뒤 장기대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냈고 다행히 박물관 측은 내부 검토를 거쳐 10년간의 장기 대여를 결정했다. 1871년 빼앗긴 수자기가 136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수자기는 조선 후기 장수를 뜻하는 ‘수(帥)’라는 글자가 한가운데 적혀 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 조선 후기 병서 ‘병학지남연의’에 따르면 수자기는 황색 바탕의 넓이 12폭, 길이 16척 무명에 12척 길이의 ‘수’자를 써넣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다룬 ‘수군조련도’ 삼도수군통제사 부분을 보면 검은색 바탕에 붉은 글씨의 수자기도 보인다. 넓은 바다에서도 눈에 잘 띄기 때문이었을 터다. 충무공 이순신 역시 이 수자기를 내걸고 진법 훈련을 했다.수자기는 그냥 장군기가 아니다. 조선군은 모든 명령을 깃발과 신호로 전달했다. 전투에서 수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미군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를 수비하던 조선군이 전원 전사하고 나서야 수자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 진란 도독이 순천 왜교성 공략에 실패하자 육군인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 장군의 수자기를 찢어버린 것은 유정이 일본과 내통해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를 더럽혔다는 질책의 뜻을 담고 있다.수자기가 다시 우리 바다에 등장했다. 제주 남쪽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 좌승함인 일출봉함이 수자기를 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11개국 39척의 함정을 해상 사열했다. 우리의 바다를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 표출됐다. 국제관함식을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이 민군복합항 입구를 막고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조상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지키려 했던 수자기는 후손들이 벌이는 이 갈등의 현장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송영규 논설위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미양요 때 빼앗긴 ‘수자기’…“반환 불가능한 미군의 전리품”

1871년(고종 8) 6월 11일 광성보를 탈취한 미군이 어재연 장군의 지휘관기인 ‘수자기’를 노획한 뒤 콜로라도 함상에 걸고 있다. 찰스 브라운 상병, 휴 퍼비스 일병, 매클레인 틸톤 대위 등이 기립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임진왜란 등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그림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깃발이 보인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을 보라. 성루에 큼지막한 깃발이 걸려있다. 그 깃발에는 ‘지휘관’을 뜻하는 ‘수(帥)’자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있다. 그래서 이 깃발을 ‘수자기’라 한다. 그렇지만 ‘수자기’의 실물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딱 한 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깃발의 소유권은 미국이 갖고 있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에 보이는 ‘수자기’. 수자기는 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가리킨다.|육군박물관·고려대박물관 소장

■미군의 전리품이 된 장군 깃발

1871년(고종 8년) 벌어진 신미양요 때 어재연(1823~1871)의 장군기였지만 미군이 빼앗아 갔다.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2007년 10년 장기임대로 빌려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끝났지만 2년 단위로 재계약을 거듭하고 있다. 장기임대를 성사시킬 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자기 반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미해사박물관장은 “반환은 미국내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측이 ‘수자기’를 문화유물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 기념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The United Stated Navy Trophy Flag Collection)’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했다. 또한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재임 1845~1849)이 미 해군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따라 미 해사 박물관은 미국이 200년간 전리품으로 획득한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해사박물관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수자기를 반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상호접촉을 통해 장기대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가로·세로가 각 4m(가로 413㎝×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이다. 이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의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여겨 개인적으로 수자기의 천을 잘라 기념으로 가져갔다.|미 해사박물관 소장·강화역사박물관 임대전시

콜로라도주 출신 웨인 엘러드 상원의원이 이 ‘수자기’와 1968년 납북된 푸에블로호를 맞교환한다는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무엇인가.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를 정찰하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게 납치된 사건을 지칭한다. 미국은 지루한 협상 끝에 북한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북한은 이 납치한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두었다가 1990년대부터는 대동강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고종 3년) 평양 시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곳이다. 북한은 ‘반미승전의 교재’로 제네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를 연결지어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엘러드 의원이 바로 이 점을 고려해서 ‘수자기’와 푸에블로호의 맞교환을 추진한 것이다. 미국 상원의원이 수자기를 가져간 강화도가 남한 땅인지 북한 땅인지 몰랐다는 말인가. 자다가 봉창두드릴 일이지만 어쩌랴. 미 국무부가 “불법 남북된 푸에블로호 문제를 두고 북한과 협상할 의사가 없다”고 최종 결정하면서 맥락없이 추진된 ‘수자기의 북한행’은 없었던 일로 끝났다.

1950년 ‘렉싱턴 헤럴드’지에 실린 미군의 ‘신미양요 노획물’. 신미양요 때 전사한 휴 맥키 중위의 유족이 트랜실베니아 컬리지에 기증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렉싱턴 공공도서관 전시 때 공개됐다. 노획물 중에는 화승총과 불랑기포, 깃발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 뒤에 금고(金鼓·쇠북)이라고 한자로 쓴 깃발이 보인다. |토마스 듀버네이 영남대 교수의 논문에서

■어재연 장군의 모자 깃털까지 노획

우여곡절 국내 전시 중이지만 수자기의 신분이 여전히 미군의 전리품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가로 413㎝, 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인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개인적 전리품으로 앞다퉈 깃발 일부분을 잘라간 것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노획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 장교인 매클레인 틸톤 대위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틸톤의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수륙양면작전’ 보고서).

“나는 당신(부인)에게 줄 깃털 장식과 적·황색 말털을 입수했소. 내가 조선장수(어재연)의 전립(戰笠·군복의 갓)에서 떼어낸 장식품이오.”

북한은 1968년 1월 나포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에 전시하고 반미승전의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불에 타 선원 24명 전원이 몰살한 곳이다.

틸톤은 “노획한 장식품을 쳐다보며 즐기고 있다”면서 “이것은 당신(부인)과 나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해두자”고 했다. 미군은 이렇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뿐이 아니다. 미군은 47기의 조선군 깃발과 182문의 포, 481문의 화승총을 노획했다고 자랑스레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또 어떤가. 미군은 3명 사망과 10여명 부상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350여명이 전사(조선 추산 57명)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시간 동안 조선군 200명을 죽인 것 같소…시체 더미를 보았는데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 같았소. 동료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소. 나는 ‘그건 살인 행위이니 그냥 두라’고 말했소.”(틸톤의 보고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1812~1882)은 1871년 5월 중순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미군은 5월30일 작약도에 정박한 뒤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아시아 함대의 출병

150년 전 벌어진 신미양요가 어떻게 전개됐기에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나왔을까.

신미양요 발발 5년 전인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배가 전소하고 승무원 24명이 익사 또는 살해된다. 하지만 조선이 쇄국정책 탓에 외국배를 그렇게 무참하게 처단한 것은 아니었다.

1855년(철종 6년) 6월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즈호의 강원도 통천, 1866년 5월 역시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의 평안도 철산 표착이 잇따랐다. 조선 조정은 두차례 모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선원들을 구조한 뒤 무사히 송환시켰다. 전통적인 ‘유원지의(柔遠之意·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1871년 6월10일 미군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진 초지진의 현재모습(왼쪽 사진).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의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고,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조선군의 시신과 불랑기 포가 보인다.

그러나 제너럴셔면호는 ‘조선은 국법으로 통상·교역을 금하고 있고, 외국배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는 지역관리의 경고에도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장수를 억류하고 주민 12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조선은 화공작전을 펼쳐 제너럴셔면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켰다.

5년 뒤인 1871년(고종 8)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밝혀 강력제재한다’는 구실로 조선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의 숨은 뜻은 군사적 원정을 빌미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었다.

미국은 마침 남북전쟁(1861~1865년)을 끝내고 국내가 안정됨에 따라 아시아함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세계제국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5월 중순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1853년 이른바 ‘포함외교’로 일본을 겁박해서 이듬해(1854년) 수교를 이끌어낸 것을 상상했을 게 틀림없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덕진진을 손쉽게 점령했다. 미군이 덕진진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수심 측량은 엄연한 도발

5월30일 인천 작약도에 닻을 내린 미군은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6월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하늘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대에 남의 나라 영해의 수로를 측량한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바닷길로 침략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으니까…. 항해를 강행한 미군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 연안의 조선군 포대가 불을 뿜는다. 미군 함대도 발포했다. 조·미간 최초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미군측은 포격행위에 대한 사과와 손해배상, 협상을 요구하면서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 보복상륙장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적반하장’이었다. 먼저 남의 영해에 함부로 들어와 도발한 자들이 ‘사과를 촉구하다니….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1820~1898)은 “외국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조선의 500년 전통”이라면서 “동·서방을 막론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면 될 일이지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고 점잖게 일축했다(<고종실록> 1871년 6월3일). 그러면서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한다’는 차원에서 송아지 3마리와 닭 50마리, 달걀 1000개 등을 뗏목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선물을 돌려보냈다.

초지진-덕진진을 잇달아 차지한 뒤 어재연 장군의 본영이 있는 광성보까지 쉽게 차지했다. 사진은 포연이 아직 걷히지 않은 광성보 손돌목 돈대 장면.

■수자기가 탈취되다

조선 조정은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삼아 급파했다. 6월10일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강화해협의 첫 번째 관문인 초지진이 속절없이 함락된다.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이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다.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초지진에서 하룻밤을 야영한 미군은 그곳에서 2.2㎞ 떨어진 덕진진을 공격했다. 역시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미군은 덕진진에서 다시 2.2㎞ 떨어진 광성보로 진격했다. 어재연 장군이 1000명의 경군을 이끌고 있던 강화도 방위의 총사령부였다.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광성보 역시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됐다.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가 하강되어 탈취되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군 본영이 주둔하고 있던 광성보의 현재 모습(왼쪽).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맨손으로 싸운 조선군

일방적인 패배였지만 조선군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특히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이른바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그러나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조선 병사들이 그 불을 끄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고 아군(미군)의 눈에 모래를 뿌렸다. 수십명은 총탄을 맞아 강물에 나뒹굴었고,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 없이 노후화한 무기로 미국 총포에 대항했던 조선군….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W S 슐레이 소령의 <기함에서의 45년>, 1904년)

조선군은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미군은 조선 조정을 향해 “빨리 협상단을 보내라”고 겁박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무시하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다. 미국무부는 결국 아시아 함대에게 전문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거든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미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하고 만다(7월3일).

당시 미국내 여론은 신미양요를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조선-미국간 소규모 전쟁은 미국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이 사건은 열강인 미국의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켰다. 조선의 개항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었다.”(‘뉴욕데일리 트리뷴’)

1878년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 해군문제위원장인 애런 사전트 상원의원은 미 의회에서 “조선군이 미국 침략군에게 발포한 것은 정당방어였다”고 규정했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나라라도 미국해역에 들어와 제임스 강을 측량하고 탐사한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비수교국인 조선해역에 들어가 탐측한 미군 함대의 짓은 명백한 침략행위라 규정할 수 있다.”

신미양요를 다룬 미국의 주간지 ‘하퍼 위클리’ 1871년 9월9일자. 뉴욕에서 발행됐다. 미국은 신미양요를 ‘Corean War’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수교후 얼굴 바꾼 미국

미국은 그렇게 당초의 목적(조선 개항)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지만 9년 뒤(1882년) 가장 먼저 조선과 통상 조약을 맺은 서양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지극정성 공을 들인 끝에 마침내 조선개항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곧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짐은 있었다.

즉 통상 조약을 위한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1822~1895)가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다. 현재로 보나 미래로 보나 상업적인 이해관계는 미미하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조선과 수교하려 했을까. 슈펠트는 “조선이 여러 나라로 가는 대양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은 극동에서 기항지(寄港地)를 얻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곧 바뀌었다. 선박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일본을 경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게 됐다. 일본의 간교한 외교도 한몫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조선을 개항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아무런 소득없이 철수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전국 각지에 ‘서양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을 의미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洋夷侵犯 非戰즉和 主和賣國)’이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미국을 짝사랑한 결과는?

반면 조선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결사항전 의지로 전쟁까지 벌이며 문을 닫아 걸었던 10여년전과 달리 조선은 미국을 ‘메시아’로 여겼다. 1882년(고종 19년) 맺은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가 다름아닌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거중조정 조항’이었다. 조선이 남의 나라로부터 간섭이나 침략을 받을 때는 미국이 적극 나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적국에서 ‘아름다울 미(美)자’ 미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대인배의 나라’라던 미국은 조선을 위해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대한제국)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결국 1905년 7월29일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가쓰라-테프트 조약까지 맺는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고종의 특사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미국을 방문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분통을 터뜨린다.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저버렸다.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

꼭 150년 전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00여 명이 피를 흘렸던 강화도에서 내려지고, 결국 미군의 전리품이 된 ‘수자기’에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담겨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오른쪽)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왼쪽)와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밀약은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아 한·미관계를 돌이켜본다. 전쟁까지 치렀다가(1871년) 어느 날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은 우방이 되었지만(1882년) 또 갑자기 언제 보았냐는듯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갔다가(1905년), 다시 구세주처럼 나타나 혈맹이 됐다(1950년).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자국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외교가 아닌가. 어떤 나라를 상대하든 지나친 일변도 외교나 짝사랑 외교는 금물이라는 교훈을 다시 얻게 된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때 빼앗긴 ‘수자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이 반환 대상 한국문화재가 아니라 미군의 ‘전리품’ 목록에 올라있다는 것이다. ‘수자기’ 등이 미군의 전리품으로 규정되는 한 150년 전 미국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흑역사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이 빼앗아간 수자기가 과연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이 맞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1871년 6월 벌어진 조선과 미국간의 충돌을 ‘신미양요’라 하지 않던가. ‘양요(洋擾)’는 문자 그대로 서양인의 침입으로 일어난 소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입장에서 수자기 등은 소요를 일으킨 미국인들이 가져간 약탈품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사 작성에 김병연 문화재청 국제교류과 행정사무관과, 2007년 장기대여 때 실무를 담당한 최종덕 당시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의 도움이 컸습니다.)

<참고자료>

국립고궁박물관, ‘수자기-136년만의 귀환’(특별전 도록), 2008

신복룡, ‘신미양요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 <어재연 장군과 신미양요의 재조명>(어재연 장군 순국 및 신미양요 150주년기념 학술회의), 전쟁기념관.어재연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 기념사업회, 2021

토머스 듀버네이, ‘신미양요-1871년 조선에서의 미국 군사행동’,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강신엽,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형제와 참전군 연구’,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박제광,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강화도 방어체제와 무기’,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김병연, ‘전쟁으로부터 문화재 보호의 게으르지 않은 역사’,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2020

김원모편, ‘틸톤의 강화도참전수기’, <동방학지> 31권, 연세대국학연구원, 1982

수자기(帥字旗) 뜻과 유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집필한 ‘수자기(帥字旗)-136년만에 귀환’이라는 설명서에 보면, 수자기(帥字旗)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때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然藜室記述)에 처음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수자기를 찢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명나라에서 수자기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1749년)에서 수자기에 대한 설명이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수자기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위 내용만 놓고 봤을때 궁금한 점은

첫번째로 수군(水軍)의 수자기(帥字旗)는 검은색 바탕의 흰색 또는 빨강색으로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게 생각이 들며

두번째로는 이순신장군 활약하던 시기에 수자기(帥字旗)를 사용하였느냐 여부인데요.

이순신장군께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아 해전(海戰)을 치르시던 때는 1590년대였기 때문에 앞에 문헌에서 언급한 수자기(帥字旗)가 처음 언급되었던 시기보다 100년에서 200년 앞서는 시기였습니다.

시기상으로 볼 때 이순신장군께서 활약하신 때에는 수자기가 아닌 다른 형태의 깃발을 달았거나 문헌에 적을만한 내용이 아니었거나 서술한 책이 있었는데 소실되었거나 하는 등 많은 추측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수자기의 색깔입니다.

미국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또 타향살이 하나

신미양요 150주년 맞아 내달부터 ‘수자기’ 공개

전리품으로 취한 후 136년간 보유…2007년 장기대여 형태로 귀환

2009년부터 강화역사박물관서 보관했지만 내년 10월 기간 종료

시·정부 대책마련 요구되는 가운데 국내 영구반환 가능성은 희박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이 전리품으로 뺏어간 어재연 장군기(수자기)가 2007년 10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137년만에 귀환했다. 현재는 장기임대 기간이 끝나 2년 단기임대 돼 강화역사박물관에는 진품이 보관 중이고, 강화전쟁박물관은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어재연 장군 수자기는 내년 10월 임대 기간이 끝난 후 미국에 반환될 위기에 놓였다. /사진제공=강화전쟁박물관·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국에 뺏긴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기(수자기) 운명이 위태롭다. 앞으로 1년, 수자기가 미국에 반환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인천시와 정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인천시와 강화군, 문화재청 등은 수자기의 10년 장기대여 기간이 끝나 2년 단기 대여 중이라고 9일 밝혔다.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미국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후 약 136년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 이를 2007년 10년 장기대여 형식으로 미국으로부터 빌려왔고, 국립고궁박물관과 인천시립박물관 전시를 거쳐 2009년부터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현재 강화전쟁박물관이 수자기 복제품을 전시 중으로, 다음 달부터 한 달간 진품이 전시된다.

수자기는 2007년부터 2년간 단기 계약으로 대여하다 2015년 5년으로 대여 기간이 바뀌었다. 이 기간마저 끝난 지난해 강화역사박물관은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과 직접 협상을 벌여 2년 더 대여 기간을 연장했다.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측은 “수자기의 장기대여 기간은 끝났다. 반환은 안된다”는 입장을 보였고, 강화역사박물관에서 “그럼 2020년부터 2년간 더 대여를 연장해달라”며 대여기간 조율에 나섰다. 현재 미국법에 따라 수자기 반환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2007년 당시 미 해군사관학교박물관장은 “한국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나 돌려주는 것은 미국법으로 불가능하고 연구 목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고 답했다. 이에 문화재청이 “반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장기대여 해달라”고 협상을 벌여 10년 장기대여에 성공했고, 강화역사박물관이 다시 2년 대여에 나섰다.

특히 신미양요 150주년인 올해 수자기 한국 영구 귀환과 함께 광성보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 기념사업 등도 관심이다.

▶관련기사 : 어재연 장군 전몰 150년 만에 사당 건립

강화전쟁박물관 관계자는 “수자기 대여 협상이 현재는 박물관과 미국이 직접 협의하는 구조로 바뀌었다”며 “현재 수자기는 2022년 10월까지 대여를 한 상태다”고 했다. 또 “이후 수자기가 영구 반환될지는 미지수”라며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리품으로 획득한 외국 깃발이 100여점 있는 만큼 수자기를 한국에 반환할 경우 그에 따른 나머지 깃발의 반환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해 미국이 선뜻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수자기를 한국에 반환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수자기는 ‘국기가 없었던 조선에 장수기가 곧 조선의 국기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어재연 장군 수자기는 현존 유일의 조선시대 장군의 깃발로 가로 4.13m, 세로 4.30m의 삼베 재질로 돼 있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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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기(帥字旗) – 136년 만의 귀환」 특별전시회 개최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2008년 4월 1일(화)부터 5월 5일(월)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수자기(帥字旗) – 136년 만의 귀환」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수자기(帥字旗) – 136년 만의 귀환」 특별전시회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해 오던 ‘수자기帥字旗’가 136년 만인 2007년 10월 장기 대여(10년) 형식으로 귀환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개최하는 것이다.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 있는 ‘수자기帥字旗’는 조선 후기 중앙의 독립 군영 혹은 지방 군사조직의 총 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유일의 이 수자기는 강화도를 지키는 부대 진무영鎭撫營에 있던 것으로,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왕명으로 진무영鎭撫營 부지휘관인 중군中軍에 임명된 어재연魚在淵(1823~1871) 장군이 진무사鎭撫使의 명으로 광성보廣城堡를 본진本陣으로 하여 이 수자기를 걸고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근대적인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광성보가 함락되었지만,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부딪친 미군은 퇴각하게 된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려 한 미국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수자기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주는 역사의 한 단면이자 강압에 의한 개항을 거부한 조선왕조의 의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병사들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수자기를 중심으로 금고기金鼓旗·문기門旗 등 조선시대 군사 깃발과 대완구大碗口(보물 제857호)·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보물 제860호)를 비롯한 각종 군사 무기, 그리고 당시의 역사 기록물과 사진들을 함께 전시하여 수자기의 장기대여를 기념하면서 엄혹한 세계정세 속에 놓여 있던 조선말의 급박했던 시대상을 생생하게 느끼고 역사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 교통안내

ㅇ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경내 광화문 서편에 위치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

ㅇ 관람안내 등 자세한 사항은 전화(02-3701-7500) 또는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www.gogung.go.kr) 참고

붙임 : 전시유물 설명자료(사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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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노명구, 양웅렬, 임소연

전화번호 : 02-3701-7631, 7644

“이 자료는 문화재청의 보도자료를 전재하여 제공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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