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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 목사 | 무디의 생애 ㅣ백만명을 전도한 사람ㅣ세계최고의 전도자 ㅣ신앙의 위인전 226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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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는 미국의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이자, 전세계 1억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세계최고의 전도자입니다. 어릴 때는 구두판매원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꿈에 부풀어 살았지만, 주일학교 선생님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위한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터넷과 자동차가 없던 시대에 쉴 새 없이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전도 집회를 열어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무디 성서학원󰡑을 비롯해 3개의 성경학교와 3개의 복음 전도회, 출판사를 설립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무디는 문법이나 기교가 맞지 않을때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타고난 달변가도 아니었고 말 또한 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디를 계속해서 쓰실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을 꾸미는 자가 아니었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겼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욱 놀랍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은 성도 중 한 분인 D.L.무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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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라이먼 무디 – 나무위키

에버렛 목사는 전기 작가 다니엘스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화에 의한 말씀이요,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특이한 유니테리언이였다.’ 그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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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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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흥사 디 엘 무디 | 그날이 오기까지

디 엘 무디(D. L. Moody)는, 18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의 노스필드에서 …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목사 안수받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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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mm119.com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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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무디 목사

  • Author: 성결출판사
  • Views: 조회수 82,143회
  • Likes: 좋아요 1,560개
  • Date Published: 2019. 6.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jNvEAB3OHI

D. L. 무디

1890년경의 무디의 모습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 1837년 2월 5일 ~ 1899년12월 22일)은 미국의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이다. 아더 태팬 피어선, 존 와너메이커, 그리고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이 모두 친구로서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을 하였다.

생애 [ 편집 ]

유년시절 [ 편집 ]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소작농이자 석수인 에드윈 무디(Edwin Moody)와 베시 홀턴(Betsy Holton) 사이에서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사고로 별세하면서 빚쟁이들이 와서 가구를 가져갈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무디도 어린나이에 농장에서 아동노동을 해야 했다. 유니테리언(단일신론)교회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지만[1],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의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어린이 사역 [ 편집 ]

17세 때인 1854년 시카고에 간 무디는 외삼촌 새뮤얼 홀턴(Samuel Holton)의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5년 만에 7,000달러를 모았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1855년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빌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어린이 사역을 하였다. 당시 그는 어린이들에게 구두팔듯이 화려한 언변으로 전도하여, 술집을 빌려 주일학교 공과수업을 할 정도로 어린이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정작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이들은 없었다. 비로소 무디는 자신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영업’한 것이지, 전도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1]

전도 [ 편집 ]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했다. 무디성서학교(1886년)와 마운트 헤르몬 학교를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설교집 [ 편집 ]

《견고한 성을 붙들다》( Holding the Fort )

) 《기쁜 소식》( Glad Tidings )

) 《복음을 깨달으라》( The Gospel Awakening )

) 《위대한 구원》( The Great Redemption )

) 《본향을 향하여》( The Way Home )

) 《무디의 명상록》(Notes From My Bible and Thought from My Library)

어록 [ 편집 ]

“ 성경은 당신을 죄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성경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2] ” — 무디가 자신의 성경에 써 놓았다고 하는 글

“ 언젠가는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 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837년에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1855년 영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겠지만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 — 1899년 뉴욕시 집회 때 한 설교

“ 광부는 엘리베이터로 편리하게 갱에 가서 일하지만, 그 엘리베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광산주는 많은 돈을 들여야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 — 광산에서 전도할 때 했다는 설교

비판 [ 편집 ]

감정에 호소 [ 편집 ]

무디는 전도집회때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실제로 무디의 전도집회는 대형교회(Mega Church)들의 문제점들중 하나인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종교 이벤트의 원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3] 따라서 청중들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할 수 있는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성찰없이,단지 분위기에 이끌린 일시적 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이 있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령강림절 설교에서 전도집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역사상 위대한 부흥의 때에는 이른바 ‘일시적 신자들’,말하자면 부흥의 기세에 눌려 교회에 발만 거치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들도 괜찮은 신자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향력도 사라지고 자극도 없어지면 금방 모든 열성을 잃고 맙니다. 그런 것은 피상적 역사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정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동안만 신자 행세를 할 뿐입니다.[4] ”

반지성주의 [ 편집 ]

무디는 종교적인 열정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문은 필요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반(反)지성주의 기독교인이었다. 그 실례로 무디는 현대신학[6]과 현대과학에 대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기독교 근본주의를 고집하였다. 이로 인해 무디의 전도집회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이성적인 믿음과 풍부한 학식을 이용하여 비판하지 못하고 기독교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생각할 줄 모르는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3]

같이 보기 [ 편집 ]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

▲ 드와이트 무디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전도자,

근대 대중전도와 선교운동의 주역

1888년 11월 12일 제임스 게일은 뱅쿠버에서 디 엘 무디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무디는 게일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격려했다.

“젊은이, 한국으로 떠나는 거지? 당당하게.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하나님이 자네를 축복할 거요.”

무디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게일의 중요한 한국선교 동력이었다. 무디를 통해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은 게일뿐이 아니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무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자가 무디의 고향 매사추세츠 노스필드, 그가 회심한 보스턴, 전도집회가 열린 미 동부 대도시, 그리고 그가 사역했던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무디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과 유니테리안 교회 출석

무디(1837-1899)가 살았던 시대는 한 마디로 급변하는 시대였다. 영국으로부터 진화론이 물밀 듯이 밀려왔고 독일로부터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신학이 놀랍게 침투했으며,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단의 도전도 대단했다. 매사추세츠의 수많은 교회들과 함께 유서 깊은 무디의 고향 노스필드 회중교회도 유니테리안으로 넘어갔다. 1837년 그 교회에 부임한 올리버 에버렛도 철저한 유니테리안 목사였다. 그는 무디 어머니 벳시(Betsy Moody)가 남편을 잃고 9명의 자녀들을 힘겹게 키울 때 그녀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다.

무디는 다섯 살 때 세례를 받고 17살 때까지 유니테리안 교회를 다녔다. 무디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 교회는 지금도 노스필드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로 남아 있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주일 오전 10시 예배, 1673년 설립, 1826년 유니테리안 교회 가입이라는 교회 게시판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통 신앙으로의 극적 변화

무디는 1854년 17살 때 삼촌이 운영하는 보스톤의 양화점에서 일하면서 마운트 버논 회중교회를 출석했다. 담임 목사 커크(Edward Norris Kirk)는 구 프린스턴을 졸업한 상당히 복음적인 목사요 부흥운동가였다. 강단의 메시지와 주일학교를 통해 무디는 처음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7년 동안 유니테리안 신앙관습에 젖어 있던 무디에게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를 가속화 시켜준 인물이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었다. 킴볼은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일하는 양화점을 찾아와 예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시는지를 들려줬다. 이것이 킴볼이 말한 전부였지만 무디의 심령을 완전히 바꿔줬다. 무디가 고백한대로 그날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날”이었다. 무디가 회심한 옛 양화점 자리에는 지금 컴먼웰스은행이 들어섰고 건물 외벽에 그의 회심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1855년 4월 21일 사람들의 친구, 노스필드 학교 설립자, 기독교 전도자 D. L. 무디가 이 자리에 있던 한 양화점에서 하나님께로 회심했다.”

주님을 만난 후 무디는 완전히 바뀌었다. 태양이 전에 없이 빛났고, 모든 피조물과 깊은 사랑에 빠졌으며,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버논회중교회는 그를 곧 바로 교인으로 받아주지 않고, 이듬해 엄격한 문답을 통과한 후에야 받아줬다. 무디가 YMCA 회원이 된 것도 그 때였다. 보스턴에서의 신앙경험은 무디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었다. 그가 평생 주일학교, 교회의 신앙교육, 그리고 YMCA 사역을 중시한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며칠 전 필자는 무디가 회심한 양화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회중교회 고문서실에서 당시 컬크 목사가 버논교회에서 사용하던 교회 문답, 무디의 입교 기록, 무디 서명이 담긴 당시 YMCA 기록을 찾아냈다.

평생 목사 안수 받지 않은 목회자

1856년 9월 시카고로 이주한 무디는 4개월 후 1857년 1월 6일 시카고 YMCA에서 열린 연합기도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썼다.

“이 도시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고향 노스필드에서도 부흥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무디의 전기 작가 존 폴락이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무디에게 깊은 영감을 제공했다. 그가 시카고 북부 슬럼가 노스 마켓 홀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이듬해였다. 처음부터 거리에 방황하는 도시 젊은이들이 주된 관심사였다. 곧 주일학생이 800명으로 불어났고 주변의 여러 교회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와서 교사로 섬겨주었으며,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거듭났다.

1860년 11월 25일 막 대통령에 당선된 아브라함 링컨도 무디가 하는 주일학교를 방문해 격려했다. 무디는 아예 양화점 세일즈맨을 그만두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시카고 일리노이 스트리트 독립교회를 설립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디는 찰스 스펄전처럼 평생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며 겸손히 안수를 사양했다.

근대 대중전도운동의 선구자

스탠리 건드리가 지적한 대로 무디는 죄로 인한 타락,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중생을 외쳤고,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충실했다. 1871년 생키와 만난 후 무디의 영향력은 놀랍게 증가했다. 1873-1875년, 1881-1884년, 그리고 1891-1892년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1875년 생키와 함께 영국에서 가진 집회 동안 잠자는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왔고, 교파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성경공부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다.

“웨슬리와 휘필드 이래 런던이 그렇게도 깊은 감화를 받은 때가 없었다.”

▲ 드와이트 무디가 1855년 4월 21일 회심했던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시내 양화점 자리로, 지금은 커먼웰스은행(오른쪽 건물)이 들어서 있다. 노스필드에 있는 무디 생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마운트 버논 회중교회 YMCA 규정 및 명부집(사진 위부터).

리버풀의 한 술집 주인은 만일 무디와 생키가 한 달이 아닌 다섯 달을 그곳에 머문다면 그 도시의 술집 절반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무디가 영국에서 돌아와 시카고, 뉴욕, 필라델피아, 부르클린, 그리고 보스턴에서 개최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왔고, 침체했던 교회들이 살아났으며, 대중전도운동 시대가 도래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한 교육가, 선교동원가

무디는 처음부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주일학교와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879년 마운트 헐몬 여학교를, 1881년 남학교를, 그리고 1886년 시카고 무디성경학교를 설립했다. 1886년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모토로 학생자원운동을 시작한 것도 무디였다. 케임브리지 7명을 비롯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를 꿈꾸며 전 세계로 흩어졌다. 50년간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무려 2만 5백 명의 젊은이가 선교사로 헌신했다. 가장 큰 수혜국은 한국이었다. 무디 영향으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베어드, 마펫, 리, 기포드, 클락 등 수많은 개척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1906년부터 1909년 사이 한국에 파송된 135명의 선교사 가운데 81명이 학생자원운동 출신이었다.

확실히 무디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19세기 복음 전도자였고 선교동원가였다. 노스필드에는 무디 생전에 건립된 무디기념교회, 수많은 학교 건물, 컨퍼런스가 열린 오디토리엄, 무디 생가, 그리고 무디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후 110년이 지난 지금도 무디성경학교, 노스필드 마운트 헐몬 학교, 그리고 무디출판사를 통해 무디 신화가 명맥을 유지되고 있지만 그 옛날의 영광은 아니었다. 우리가 무디의 영광을 다시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작가소개

18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네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무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무디의 꿈은 빨리 돈을 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기에, 신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그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킴볼이 그를 찾아왔다. 무디의 영혼을 걱정하던 그는 “나는 자네의 영혼을 두고 기도를 많이 했네.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라는 한마디 말로 무디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다. 무디는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 전도에 전념했는데 얼마후 교회(일리노이 스트리트)가 지어졌고, 무디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움을 입었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학교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과정 5년 뿐인 그였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매일 새벽 4시면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학자가 되었다. 무디는 그의 생애를 통해 2억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외에도 교회와 성경학교, 성경연구원, 서적협회 등 많은 기관들을 발족시켰다. 무디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세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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