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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 대 박해 | 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6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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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박해 이야기 – 솔뫼성지

병인박해로 인해 김제항, 김진식, 김근식, 김제교가 순교함으로 인해, 김대건 신부님 집안은 4대에 걸쳐 11분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신앙의 명문이 되었다. 이 게시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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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lmoe.or.kr

Date Published: 10/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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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대박해 – 네이버 블로그

1. 신유박해(1801년) · 2. 기해박해(1839년) · 3. 병오박해(1846년) · 4. 병인박해(18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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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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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 GOODNEWS 자료실

가톨릭문화. sub_menu ·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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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ds.catholic.or.kr

Date Published: 5/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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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주교 박해 – 나무위키

조선시대에 천주교 박해는 꾸준히 있었는데, 대규모 박해는 총 4번 … 조씨의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고,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제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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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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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4대 박해/해미순교성지4장 – 다음블로그

한국 천주교 4대 박해/해미순교성지4장 · 막달레나, 이광헌( · 아우구스티노, 한( · 아기 바르바라, 박희순( · 루시아, 남명혁( · 다미아노, 권득인( · 베드로, 장( · 성진 요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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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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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 한국 천주교의 시작 1779년 권철신과 권일신, 이벽 등 몇몇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에서 여러 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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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rasarang.tistory.com

Date Published: 4/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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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12482 명이 이 답변을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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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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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인기 답변 업데이트

[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 GOODNEWS 자료실. 가톨릭문화. sub_menu ·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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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9/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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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그 원인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 부릅니다. 박해 방법. 가. 오가작통법(5집씩 묶어 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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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uwons.net

Date Published: 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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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박해 – 천주교 산호세 한국 순교자 성당

조선시대 4대 박해 · 1.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 2. 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 3. 기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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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kmcc.org

Date Published: 5/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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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천주교 4 대 박해

  • Author: 김정한
  • Views: 조회수 5,9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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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3. 1.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SS1y4emr84

천주교 4대박해

1. 신유박해(1801년)

사실상 정조 사후에 정조 개혁 추진 세력을 조정에서 모두 몰아내고, 대왕대비이던 정순왕후 세력으로 재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터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이 유학자들이 실학으로서 서양학문을 연구하던 중 , “천주학”을 연구하게 되고, 이 “천주학”이 참 진리라고 생각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2. 기해박해(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3. 병오박해(1846년)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하였으나 기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박해의 근거는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의 지시로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쉬운 새로운 해로를 개척에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서해안 등을 항해하다가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조정에 전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실의 조선 원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그로부터 3일 후에는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매를 맞고 죽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해온 신자들의 대응이 재빨랐고 조정에서도 새로운 척사령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을 순방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어 1846년 11월자의 서한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4. 병인박해(1866년)

[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순교자성월 특집]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 박해시대에 수난받는 신자들을 표현한 서소문 순교자기념탑 부조.

다가오는 2009년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는다.

그보다 한 해 앞선 2008년 순교자성월을 맞아 한국 천주교 4대 박해를 종합하고 당시 박해의 특징과 주요 순교자 등을 소개한다.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 12월 22일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돼 10월 참수됐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박해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오혜민 기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莘酉迫害 (1801년, 순조1년)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 周文謨 ) 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 老論僻派 ) 정순대비( 貞純大妃 )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 詩派 )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 邪敎 ) ·서교( 西敎 )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 )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박해는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己亥迫害(1839년 헌종 5년)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 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 時 )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 僻 )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 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 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순교자는 이호영 베드로, 정국보 프로타시오, 김아기 아가다, 박아기 안나, 이 아가다, 김업이( 金業伊 ) 막달레나, 이광헌( 李光獻 ) 아우구스티노, 한( 韓 )아기 바르바라, 박희순( 朴喜順 ) 루시아, 남명혁( 南明赫 ) 다미아노, 권득인( 權得仁 ) 베드로, 장( 張 )성진 요셉,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김 로사, 김성임( 金成任 ) 마르타, 이매임( 李梅任 ) 데레사, 김장금( 金長金 ) 안나, 이광렬( 李光烈 ) 요한, 이영희( 李英喜 ) 막달레나, 김 루시아, 원귀임( 元貴任 ) 마리아, 박 큰아기 마리아, 권희( 權喜 ) 바르바라, 박후재( 朴厚載 ) 요한, 이정희( 李貞喜 ) 바르바라, 이연희( 李連熙 ) 마리아, 김효주( 金孝珠 ) 아녜스, 최경환( 崔京煥 ) 프란치스코, ( 丁夏祥 ) 바오로, 유진길( 劉進吉 ) 아우구스티노, 허계임( 許季任 ) 막달레나, 남이관( 南履灌 ) 세바스티아노, 김 율리에타, 전경협( 全敬俠 ) 아가다, 조신철( 趙信喆 ) 가롤로, 김제준( 金濟焌 ) 이냐시오, 박봉손( 朴鳳孫 ) 막달레나, 홍금주( 洪今珠 ) 페르페투아, 김효임( 金孝任 ) 골룸바, 김 루시아, 가타리나, 조( 趙 ) 막달레나, 유( 劉 )대철 베드로, 조증이( 趙曾伊 ) 바르바라, 한영이( 韓榮伊 ) 막달레나, 현경련(_! 菩俚 _) 베네딕타, ( 丁情惠 ) 엘리사벳, 고순이( 高順伊 ) 바르바라, 이영덕( 李榮德 ) 막달레나, 김 데레사, 이 아가다, 민( 閔 )극가 스테파노, 정( 鄭 )화경 안드레아, 허( 許 )임 바오로, 박종원( 朴宗源 )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洪秉周 ) 베드로, 손소벽( 孫小碧 ) 막달레나, 이경이( 李瓊伊 ) 아가다, 이인덕( 李仁德 ) 마리아,권진이( 權珍伊 ) 아가다, 홍영주( 洪永周 ) 바오로, 이문우( 李文祐 ) 요한, 최영이( 崔榮伊 ) 바르바라, 김성우( 金星禹 ) 안토니오 등이다. 이들 중에는 1839년을 전후하여 이미 1838년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1840년과 1841년에 순교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순교자라고 할 때 이들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병오박해 丙午迫害(1846년 헌종 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 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 杖死 )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 金大建 )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 玄錫文 ) 가롤로, 남경문( 南景文 ) 베드로, 한이형( 韓履亨 ) 라우렌시오, 우술임( 禹述任 ) 수산나, 임치백( 林致百 ) 요셉, 김임이( 金任伊 ) 데레사, 이간난( 李干蘭 ) 아가다, 정철염( 鄭鐵艶 )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1873년 고종 3년) 조선조 말기인 1866 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 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 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유정률( 劉正律 ) 베드로, 남종삼( 南鍾三 ) 요한, 전장운( 全長雲 )요한, 최형( 崔炯 ) 베드로, 정의배( 丁義培 ) 마르코, 우세영( 禹世英 ) 알렉시오, 장주기( 張周基 ) 요셉, 황석두( 黃錫斗 ) 루가, 손( 孫 )자선 토마스, 정( 鄭 )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르로, 손( 孫 )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익( 韓元益 ) 요셉, 정( 鄭 )원지 베드로, 조윤호 요셉, 이윤일 요한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 됐다. 한국 교회 103위 성인 순교자(martyr) 103위 성인 중 79명은 1925년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 諡福 )된 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모두 시성( 諡聖 )됨으로써 성인품( 聖人品 ) 에 올랐다. 한국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 이고, 축일의 명칭은 ‘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이다. 103 명의 성인 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3명의 주교와 7명의 신부) 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국적이 비록 프랑스일지라도 그들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으므로 그들 역시 당연히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들 이다. 이상 10명의 선교사를 제외한 93명을 순교시기로 구별할 때 1839년 즉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67명, 1846년 즉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9명, 1866년 즉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가 17명이다. 한국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양반, 중인, 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승지( 承旨 )나 선공감( 繕工監 )과 광흥창( 廣興倉 )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 농업, 약국, 인쇄, 서사업( 書寫業 ),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한 사람들이 많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었으나 최경환, 김효주, 유진길, 김제준, 정화경, 김성우, 임치백 등과 같이 부유한 편의 집안도 있었다. 한국성인 93명 중 성직자는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뿐이고 나머지 92명은 모두 평신도 이다. 그러므로 한국성인의 교회활동과 순교는 그 자체가 한국 교회 평신도상이요 평신도적 영성( 靈性 )을 나타낸 것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103위 시성 감동·의미 되새겨 — 발행일 : 2009-09-27 2012.11.05 16:34 |

천주교(天主敎)의 전래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천주교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서, 왜군을 따라 조선에 와 종군한 스페인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cespedes,g.) 신부가 그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조선인에게 선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의 선교 활동이 아닌, 우리 학자들의 자발적인 수용에서 출발하고 있다.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 중에 이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 학자들이 곧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순수한 종교적 접근이 아닌,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즉 학문적인 접근이었던 셈이다. 인조 9년(1631)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은 로드리게스(rodriguez,j) 신부로부터 과학 기구와 서적을 얻어 오고 있고, 숙종 46년(1729) 주청사(奏請使) 이이명(李 命)이 퀘글러(k gler,f) 신부와 역상(曆象)·서교(西敎)에 대한 환담을 하고 있다. 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의 반입은 17세기 이후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책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계통의 학자들이 주로 연구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성립되었고, 실학에도 자극을 주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이수광(李 光)의 ≪지봉유설≫에 언급된 것이 그 예라 하겠다. 같은 시기의 사람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하여, 천주교를 유교의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고, 성호 이익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보유론 적인 접근도 성호의 제자들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학을 이단시하여 사학(邪學)으로 간주하는 측과, 학문의 단계를 넘어서서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극단적인 측으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뒤 정조 8년(1784) 이승훈(李承勳)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여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분서주 바쁘게 활동한 사람은 이벽으로서, 이승훈의 영세도 그의 권고에 의함이었고, 정약용·약전 형제나 권철신·일신 형제도 그의 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을 받아 근 1백년 여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 사건을 가져오게 된다. 천주교 박해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사상적인 배경;국초 정도전의 척불론(斥佛論)의 저간을 이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입각하여, 정(正)의 학문인 유학 이외의 불교·양명학(陽明學)·서학(西學)·동학(東學) 등을 사(邪)의 가치 체계로 인식하였던 점 ② 사회적 배경;천주교 봉행에 따른 신자들의 예속 생활이 기존의 예속 생활과 판이했던 점으로서, 제사 봉행 문제나 평등 사상이 기존 유교적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점 ③ 정치적 배경;붕당간의 대립과 서구의 침략 세력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작용하였던 점 등이다. 2004.11.17 09:56 |

최초의 박해는 1785년 김범우 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자였던 이승훈 을 비롯한 교회의 지지자들이 종교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순라꾼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인 김범우 가 잡혀 고문받고 귀양가서 죽으니,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양반이라 하여 훈방해 돌려보내고 천주교 전교를 금했다.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1791년(신해박해) 전라도 진산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위패도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정약전의 외종동생이다. 윤지충과 그를 옹호한 사촌 권상연 두 사람은 패륜아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민간에서도 서양서적을 갖는 일이 금지되었다. 2006.05.10 21:47 |

조선에서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원인 1. 천주교 전래 과정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라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왜장 고니시가 대부 분 신자인 자신의 군사들을 위해 세스페데스라는 종군신부를 대동하고 조선 원정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 만 세스페데스는 철두철미 침략자의 편에 서서 조선 민중을 바라보았다.

정묘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북경에 와 있던 신부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천주교와 서양 의 과학기술을 배운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새로운 서양문물을 가져온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노론들에게 미움을 샀고, 그러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남짓해서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말았다.

2. 초기 천주교 박해와 그 원인 천주교는 계속 보급되어 영조 때는 해서· 관동지 방에 널리 퍼졌다. 제사는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없애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상에 대한 효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에서 정부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은 천주교를 엄금시켰다. 1758년의 일이다 그때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자였던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순라꾼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인 김범우가 잡혀 고문받고 귀양가서 죽으니,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양반이라 하여 훈방해 돌려보내고 천주교 전교를 금했다.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1791년(신해박해) 전라도 진산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위패도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정약전의 외종동생이다. 윤지충과 그를 옹호한 사촌 권상연 두 사람은 패륜아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민간에서도 서양서적을 갖는 일이 금지되었다.

천주교, 즉 서학은 지배층에게는 체제와 정통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 교윤리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이요,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교이념으로 유지해온 조선에 대한 부정이요 도전으로 보였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 하며 세상을 뒤바꾸고자 하는 무리들’로 규탄 받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초기에 천주교를 믿은 사람은 주로 양반, 그 중에서도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들이었다. 실학자의 대부분이 이 남인에서 나왔으며, 실학자 중 서학과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천주교가 주로 권좌에 서 밀려난 양반들 사이에서 믿어진 탓에 양반들의 권력다툼이 천주교 탄압으로 표면화된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초기의 천주교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해의 원인은 =================================

첫째,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충, 신분중시)과 그리스도교 평등 사상의 충돌

둘째, 사회적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의 제사(효)를 거부했다는 것

셋째, 정치적으로 당파 싸움의 방편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3. 이후의 박해 요약(4대 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 순조 –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 순교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 =>병인양요의 원인 띨빵한 곰튕 | 2007.09.03 11:11 |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고종 3) 대원군이 일으킨 천주교도 및 외국 선교사에 대한 박해 사건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서구 열강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입한 최초의 사건이다. 병인양요의 결과로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구미 열강은 조선 왕국을 청국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인식하게 되어, 종래의 한 · 청관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년에 발생한 천주교 최대 박해 사건. 흥선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를 이용하여 견제하려고 하였다. 프랑스가 이를 거절하자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는데, 이를 병인박해라고 한다.

천주교의 전래 및 박해 과정 1. 천주교 수용 배경

근세 초기 지리상의 발견은 서세동점을 초래하였고, 동시에 서학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서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진출하여 있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이에 세스페데스는 1593년(선조 31년)말부터 약 1년 반 동안 부산 부근의 일본 진영에 머물면서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더불어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민 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서의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서학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꿈은 좌절된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하여 점점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가지 게 된다. 특히 리치라는 선교사는 학덕이 높아서 중국 황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는데, 북경을 찾는 조선사신 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기회만 있으면 선교사를 만나서 학문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 누었다. 이렇듯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에 와서 전도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사신들을 통한 간접적 인 시도는 가능하였다. 중국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 등의 서적들이 계속 조선에 도입되어서 남인학자들 사이에 연구되어 실학 운동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된다. 여기서 서학은 서양 종교(천주교)와 서양 학문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서학이 학문적인 관심에 서 연구되기 시작되었다.

2. 조선의 천주교 수용 과정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는 1784년(정조8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승훈은 이벽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입교를 원하는 사람 에게는 세례를 주고,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졌다. 1786년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백성사, 성체 성사도 집전하기 위하여 이승훈, 유항검, 권일신등 10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유항검은 그들의 성사 행위가 불법임을 알고, 북경에 윤우일을 파견하여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조선 국 경까지 온 선교사는 조선교우들과 어긋나서 북경으로 되돌아간다. 한편 북경교회의 주교 구베아는 조선에 천 주교가 탄생한 것을 로마 포교성상에 알렸고, 이에 로마포교성상은 조선 교회를 구베아의 보호와 지도아래 맡 긴다.

1794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인도로 국경을 넘어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사를 집전한다. 그러나 곧 배신자 의 고발로 수색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과 교리 연구,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조선교회 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3. 조선교구의 설정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선교사와 지도자들은 대부분 순교하고 성서도 압수된다. 하지만 1811년 에는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선교사의 파견과 파견된 선교사의 체류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게되자, 1824년에 교황에게 직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포교성상은 더 이상 북경교구에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파리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를 초대교구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눈 앞 에 두고 중국에서 병사한다. 그 후 브뤼기에르가 개척한 길을 따라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앵베르가 2대 교구자가 되면서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4. 박해와 발전

천주교는 수용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약 1백년동안 10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라버린 윤지충, 권상연이 처형당한 다. 1795년의 을묘박해는 주문모의 체포령에서 발단하는데 최인길, 윤우일, 지황등 3인이 포천에서 사형 당하며,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은 유배됨으로써 서울에서의 탄압은 일단락 된다. 이와 같이 정조대에는 천주교가 자기 자멸할 것으로 믿어서 박해가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01년 순조가 즉위하고, 득세한 노론벽파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인 보복을 가하는 신유 박해가 일어난다. 이 신유박해로 천주교의 지도자이자 남인의 지도급 인사인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당했고, 황사영의 처형으로 박해는 수그러든다. 그 후 정부는 청나라에 박해가 불가피 했음을 해명하 며, 이어서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척사윤음을 전국에 선포하여 박해행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두 번의 박해가 더 일어나는데, 1815년(순조 15년)의 을묘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자행되었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지역과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 났다.

헌종조에 이르러 두 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고, 다시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여 천주교가 활기를 찾았는데, 1839년(헌종 5년)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 씨와 안동 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 때에는 김대건 신부 외에 9인이 순교하였다. 1860년(철종 11년)의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있는데, 이는 박해의 주동자가 조정이 아니고 포도대장이 개인적인 원한과 탐욕에서 박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년)의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것으로 그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보아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5. 박해의 원인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의 원인은 먼저 정부가 천주교를 사교로 낙인찍고, 천주교인들을 유교적 입장에서 강상죄로 다스린 것이다. 둘째로는 유교의 배타주의가 유교를 따르지 않는 자를 이단시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조선왕조가 정교합일주의에 입각하였는데 천주교의 수용은 정치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를 혼동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 종교를 구실로 많이 행해졌고, 더구나 천주교도들의 성직자 영입운동과 종교자유를 얻고자 하는 운동 등은 쇄국양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역적으로 처단된 것이었 다.

이렇게 여러 번의 박해를 받음으로 처음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계급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 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처음 사회를 개혁해 보려던 강한 의욕은 사라지고 현세 도피적이고 내세 구원적인 신앙으로 변천되어 갔다. 또한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 벽지에 들어가서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철종조로 들어오면서 세도정치의 주인공인 안동 김씨는 시파로,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어서 천주교는 비교적 평온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6. 개화기·일제강점기의 천주교

1886년의 조불조약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프랑스인의 자격으로 개항지에 정착하여 토지를 구입하고 진출할 수 있는 권리와 호조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조 심스러운 가운데서도 공개적으로 포교를 진행할 수 있었고, 이로써 유교적 가치관만이 지배했던 시대는 끝나게 된다.

Lappy | 2007.09.03 11:10 |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신해진산의 변이라고도 한다. 또 신해사옥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가톨릭교가 해서(海西) ·관동(關東) 지방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현 충남 금산군)의 선비 윤지충(尹持忠;1759~1791)과 권상연(權尙然:윤치중의 外弟)이 윤지충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자, 권상연(1751~1791) 등이 호남 출신이라는 데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1783년(정조 7) 서울 명례방(明禮坊:현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교에 입교(入敎), 세례를 받았다. 178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하였다. 또 공 ·맹(孔孟)의 유교 ·유학을 숭봉하여야 할 사림(士林)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치와 제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것이 큰 문제로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신도들의 대부분이 당시 집권파였던 남인(南人) 계통에 속하였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번져갔다. 이 문제로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그들이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하게 되자,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이 정도에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가톨릭교의 교주(敎主)로 지목받은 권일신(權日身)을 유배(流配)시키는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계속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신(相臣)인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洪義浩) ·홍낙안(洪樂安) 등의 공서파가 대립하여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신서파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년간의 암투가 계속되었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을 말한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나라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그해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즉, 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民)·이승훈(李承薰)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은 옥사했으며, 이존창(李存昌)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李中培)·최필제(崔必悌) 등의 경기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 입국해서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는 박해기간동안 주로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당시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신부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신부는 정조의 서형(庶兄)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 마리아의 집(廢宮)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2주일 후 주신부는 자신만 자수하면 박해가 누그러 질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취조중에도 언제나 순교할 각오를 당당하게 말하고 ‘호교론’ 의 글을 써서 판관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3월 15일 조정에서는 주신부를 청국인으로서 본국으로 송환하기 보다는 즉시 군문에 붙여 사형하기로 결정하고 4월 19일에 순교하게 되니 그의 나이 50세였다. 주문모신부의 순교는 본인이 의도한 바와는 반대로 박해가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5월 22일에는 주문모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강완숙(골롬바)이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되어 순교했다. 또한 신유박해는 황사영(알렉시오)의 체포를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이미 2월 11일에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전주에서 유항검이 황심을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고 자백하자 9월 25일에 황심이 체포되고 황심은 그 다음 날 황사영의 거주지를 실토하게 됨으로써 9월 29일 황사영도 제천에서 피신 중이던 김한빈과 함께 체포됐다. 황사영은 제천에 은신해 있는 동안 백서를 작성했다. 이 비밀 편지는 황심이 옥천희와 같이 옷속에 감추어서 그해 10월 동지사 일행에 끼어 가서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황심의 체포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백서는 황사영 혼자서 구상하고 쓴 글임에도 조정에서는 정약용, 이치훈과 함께 공모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문초했으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없음이 밝혀지자 두사람은 귀향선고가 내려지고 황사영은 11월 5일 옥천희와 현계흠과 함께 대역 부도죄가 선고되어 처형당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수도와 박해지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반면에 새로운 입교자도 늘어갔다.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 안동김씨로서 익종의 생모, 헌종의 조모)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儷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순조로부터 헌종을 보도하도록 위촉받은 조인영(趙寅永)과 절친한 인물인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안동 김씨인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이조판서 조만영(趙萬永)과 함께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프랑스의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의 주교 앵베르(Imbert)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Maubant)과 샤스탕(Chastan)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병오박해 [丙午迫害]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하였으나 기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박해의 근거는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ol) 주교의 지시로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쉬운 새로운 해로를 개척에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서해안 등을 항해하다가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cille)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조정에 전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실의 조선 원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그로부터 3일 후에는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매를 맞고 죽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해온 신자들의 대응이 재빨랐고 조정에서도 새로운 척사령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을 순방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어 1846년 11월자의 서한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고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에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어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베드로 성전)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시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병인박해 [丙寅迫害]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좇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5월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강류(江流) ·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시켜, 로즈 제독도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구어,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2006.07.19 14:47 |

해미순교성지 1…안내문

해미순교성지 2…안내도

해미순교성지 3

해미순교성지 4

[천주교의 박해 정리] 1. 천주교 전래 과정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라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왜장 고니시가 대부 분 신자인 자신의 군사들을 위해 세스페데스라는 종군신부를 대동하고 조선 원정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 만 세스페데스는 철두철미 침략자의 편에 서서 조선 민중을 바라보았다.

정묘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북경에 와 있던 신부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천주교와 서양 의 과학기술을 배운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새로운 서양문물을 가져온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노론들에게 미움을 샀고, 그러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남짓해서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말았다.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천주교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서, 왜군을 따라 조선에 와 종군한 스페인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cespedes,g.) 신부가 그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조선인에게 선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의 선교 활동이 아닌, 우리 학자들의 자발적인 수용에서 출발하고 있다.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 중에 이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 학자들이 곧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순수한 종교적 접근이 아닌,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즉 학문적인 접근이었던 셈이다. 인조 9년(1631)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은 로드리게스(rodriguez,j) 신부로부터 과학 기구와 서적을 얻어 오고 있고, 숙종 46년(1729) 주청사(奏請使) 이이명(李 命)이 퀘글러(k gler,f) 신부와 역상(曆象)·서교(西敎)에 대한 환담을 하고 있다. 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의 반입은 17세기 이후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책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계통의 학자들이 주로 연구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성립되었고, 실학에도 자극을 주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이수광(李 光)의 ≪지봉유설≫에 언급된 것이 그 예라 하겠다. 같은 시기의 사람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하여, 천주교를 유교의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고, 성호 이익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보유론 적인 접근도 성호의 제자들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학을 이단시하여 사학(邪學)으로 간주하는 측과, 학문의 단계를 넘어서서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극단적인 측으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뒤 정조 8년(1784) 이승훈(李承勳)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여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분서주 바쁘게 활동한 사람은 이벽으로서, 이승훈의 영세도 그의 권고에 의함이었고, 정약용·약전 형제나 권철신·일신 형제도 그의 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을 받아 근 1백년 여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 사건을 가져오게 된다. 천주교 박해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사상적인 배경;국초 정도전의 척불론(斥佛論)의 저간을 이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입각하여, 정(正)의 학문인 유학 이외의 불교·양명학(陽明學)·서학(西學)·동학(東學) 등을 사(邪)의 가치 체계로 인식하였던 점 ② 사회적 배경;천주교 봉행에 따른 신자들의 예속 생활이 기존의 예속 생활과 판이했던 점으로서, 제사 봉행 문제나 평등 사상이 기존 유교적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점 ③ 정치적 배경;붕당간의 대립과 서구의 침략 세력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작용하였던 점 등이다. 2. 조선의 천주교 수용 과정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는 1784년(정조8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승훈은 이벽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입교를 원하는 사람 에게는 세례를 주고,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졌다. 1786년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백성사, 성체 성사도 집전하기 위하여 이승훈, 유항검, 권일신등 10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유항검은 그들의 성사 행위가 불법임을 알고, 북경에 윤우일을 파견하여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조선 국 경까지 온 선교사는 조선교우들과 어긋나서 북경으로 되돌아간다. 한편 북경교회의 주교 구베아는 조선에 천 주교가 탄생한 것을 로마 포교성상에 알렸고, 이에 로마포교성상은 조선 교회를 구베아의 보호와 지도아래 맡 긴다.

1794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인도로 국경을 넘어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사를 집전한다. 그러나 곧 배신자 의 고발로 수색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과 교리 연구,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조선교회 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3. 조선교구의 설정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선교사와 지도자들은 대부분 순교하고 성서도 압수된다. 하지만 1811년 에는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선교사의 파견과 파견된 선교사의 체류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게되자, 1824년에 교황에게 직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포교성상은 더 이상 북경교구에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파리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를 초대교구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눈 앞 에 두고 중국에서 병사한다. 그 후 브뤼기에르가 개척한 길을 따라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앵베르가 2대 교구자가 되면서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4. 초기 천주교 박해와 그 원인 최초의 박해는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자였던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순라꾼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인 김범우가 잡혀 고문받고 귀양가서 죽으니,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양반이라 하여 훈방해 돌려보내고 천주교 전교를 금했다.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1791년(신해박해) 전라도 진산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위패도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정약전의 외종동생이다. 윤지충과 그를 옹호한 사촌 권상연 두 사람은 패륜아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민간에서도 서양서적을 갖는 일이 금지되었다.

5. 박해와 발전

천주교는 수용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약 1백년동안 10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라버린 윤지충, 권상연이 처형당한 다. 1795년의 을묘박해는 주문모의 체포령에서 발단하는데 최인길, 윤우일, 지황등 3인이 포천에서 사형 당하며,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은 유배됨으로써 서울에서의 탄압은 일단락 된다. 이와 같이 정조대에는 천주교가 자기 자멸할 것으로 믿어서 박해가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는 순조가 즉위하고, 득세한 노론벽파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인 보복을 가하는 신유 박해가 일어난다. 이 신유박해로 천주교의 지도자이자 남인의 지도급 인사인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당했고, 황사영의 처형으로 박해는 수그러든다. 그 후 정부는 청나라에 박해가 불가피 했음을 해명하 며, 이어서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척사윤음을 전국에 선포하여 박해행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두 번의 박해가 더 일어나는데, 1815년(순조 15년)의 을묘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자행되었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지역과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 났다.

헌종조에 이르러 두 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고, 다시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여 천주교가 활기를 찾았는데,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는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 씨와 안동 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 때에는 김대건 신부 외에 9인이 순교하였다. 1860년(철종 11년)의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있는데, 이는 박해의 주동자가 조정이 아니고 포도대장이 개인적인 원한과 탐욕에서 박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년)의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것으로 그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보아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6. (4대 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 순조 –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 노론벽파( 老論僻派 ) 정순대비( 貞純大妃 )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 詩派 )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 邪敎 ) ·서교( 西敎 )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시(時 )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 僻 )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 순교…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 를 받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 =>병인양요의 원인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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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 한국 천주교의 시작

1779년 권철신과 권일신, 이벽 등 몇몇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 에서 여러 가지 학문과 신앙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이때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에 대해 공부하던 이들은 하느님이 누구이시고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깨닫게 되었고, 천주학을 진리로 받아들여 신앙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이승훈 이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 베이징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이승훈과 이벽은 스스로 성직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교우는 거의 1,000명까지 늘게 되었다. 하지만 교리를 깊이 연구하던 이들은 스스로 성직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중국 천주교회에 사제들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1795년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님 이 한국에 오시게 되었다.

▶ 한국 천주교의 4대 박해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람들의 신앙을 억누르려 했다. 1784년(1984년이 한국 천주교 200주년)부터 1886년까지 9번의 박해가 있었고, 박해로 인해 1만 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 9번의 박해 중 가장 크게 일어났던 4대 박해에 대해 알아보자.

1. 신유박해(1801년)

순조 임금의 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정치적인 이유로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했다. 이때 오가작통법 이라는 법이 생겨났는데 다섯 집을 한 조로 묶어 서로서로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 감시하는 법이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님 과 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황사영 이라는 신자는 중국에 박해로 힘들어하는 조선 천주교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가 발각되어 순교했다. 이후 조선에 33년 동안 신부님이 오실 수 없었다.

2. 기해박해(1838년)

당시 조선에는 큰 권력을 누리는 두 가문이 있었고, 그중 한 가문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그런데 두 가문이 정치적으로 싸우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됐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앵베르 주교님 , 샤스탕 신부님 , 모방 신부님 , 정하상 바오로 ,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 유진길의 둘째 아들인 13살 유대철 베드로 가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님의 부모님 도 이때 돌아가셨다. 현재 기해박해 순교자 중 79명의 순교자가 시성 되었다.

3. 병오박해(1846년)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님이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현석문 가를로 , 남경문 베드로 등 20여 명이 순교했다. 당시 조선에 와 계셨던 페레올 주교님 (김대건 신부님께 사제품을 주셨으며, 조선교구 3대 교구장임)은 다행히 들키지 않고 숨어 다니며 전교하였다. 그래서 병오박해가 끝난 뒤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2만 3천 명까지 늘었다.

4. 병인박해(1866년)

병인박해는 조선의 어려운 상황과 관련 이 컸다. 힘 있는 외국 군대가 몰려와서 조선을 넘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선교사로 조선에 와 있었던 베르뇌 주교님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조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돌보던 베르뇌 주교님이 뒤늦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러시아가 물러간 뒤였다. 흥선대원군은 외국의 세력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병인박해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는데 역사상 최대 규모 의 박해였다. 10년 넘는 동안 1만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목숨을 잃는 순교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신앙을 증거 하는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실천합시다. 일상에서의 아주 작은 일, 즉 남 험담 안 하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 , 내가 좋아하는 것들 끊어내기 등 작지만 실천 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그리고 그 실천했던 순교의 삶을 미사 시간에 온전히 봉헌합시다. 동의하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O O O을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때에 ( )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 )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 )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 )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 ) 여기면

( )도 자기의 ( )과 아버지와 거룩한 ( )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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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산호세 한국 순교자 성당

글쓴이: daniel.choi, 최초작성일: September 28th, 2008, 최종수정일: September 28th, 2008

카테고리:

조선시대 4대 박해 – 가톨릭대사전에서

성모자와 한국 성인들 –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요셉)

1.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 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 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3. 기해박해. 1839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이 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4.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187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의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천주교 4 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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