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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 [Nss-역사-0001] 조선왕조 가계도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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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대군(이방우,1354-1393): 아버지 이성계 조선건국에 협조적이지 않음. 익안대군(이방의,1360-1404): 왕자의 난때 중립적인 자세, 권력에 욕심이 없다. 회안대군(이방간,1364-1421):2차 왕자의 난 실패로 목숨은 부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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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휘,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별호, 자 : 중결(仲潔) · 군진(君晋) 호 :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존호,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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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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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 부인, 아들들, 직계 조상, 형제들 – 히스토리

이성계 가계도 · 아버지 : 이자춘 , 쌍성총관부 만호, 조선이 건국되고 환조 대왕으로 추존됨 · 어머니 : 영흥부원군 최한기 딸, 의혜 왕후로 추존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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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uyde01.tistory.com

Date Published: 4/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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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이성계 (초명: 이성계李成桂, 즉위 후 이단李旦 1335년~14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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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oonggyuk.tistory.com

Date Published: 8/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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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가계도로 보는 태종 이방원 – 워렌 존버핏

이 6명의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는 둘째 아들 영안대군을 제2대 왕인 정종을 선위 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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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wolf0310.tistory.com

Date Published: 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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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s-역사-0001] 조선왕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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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태조 이성계 가계도

  • Author: 법선나승성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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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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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및 왕실족보

태조 이성계 가계도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전주 이씨로 그의 6대조 이린은 고려 무신집권자 중 한사람인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의방이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죽을때 이린의 아들 이양무와

손자 이안사는 삼척으로 피신하였고, 그 이후 이안사 대에 일족이 고려의 동북 국경을 넘어

지금의 함경도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안사부터 이자춘까지 4대에 걸쳐 원나라의 지방관리를 지내는 한편,

강력한 지역세력과 결혼하면서 이자춘.성계 부자 대에는 함흥지방을 중심으로

세력기반을 굳혀갔다. 이성계는 선대가 이루어놓은 세력기반 위에서

자신의 뛰어난 무예와 전공으로 당시 고려조정에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었고,

동북지방의 강력한 군사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쳐 민심을 모은 이성계는

1392년에 정도전.조준.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세웠다.

1393년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서울을 한양으로 정한 후

1396년 9월까지 종묘.사직.궁궐.성곽 등을 지어 도성을 완성시켜갔다.

1394년 조선 최초의 법전 ‘조선경국전’ 도 완성하였다.

새 나라가 세워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지고

사회는 안정화 되어 고려왕조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 시대를 열어갔다.

참조 : 한국족보박물관

왕실의 호칭

살아있을 때 왕의 이름이 휘(諱)라면 죽은 후의 이름은

종묘에 올리는 묘호(廟號)라 할 수 있다.

묘호는 두 글자인데 앞의 글자는 생전에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것으로 왕에 따라 달라지고,

뒤의 글자는 ‘조’나 ‘종’ 중 하나를 붙였다.

‘조’는 나라를 세우거나 중흥시키는 등 공적이 두드러지는 경우에

‘종’은 앞선 왕의 업적을 물려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문물을 융성하게 한 경우에 붙혔다.

또한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 , 딸은 ‘공주’라 불렀고,

후궁의 아들은 ‘군’ , 딸은 ‘옹주’ 였다.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 이 되었다.

한편 적통이 끊어져 방계가 왕이 될 경우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 이라 불렀다.

왕실족보

왕실족보는 1412년(태종 12년)에 선원록,종친록,유부록등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왕실에서 적서를 명확히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왕실의 국조보첩,당대선원록,열성팔고조도 등은 종부시에서 편찬하였고,

돈녕부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을 간행하였다.

왕실족보는 일반가문과 다르게 왕을 중심으로 그 자손을 일정한 대수의 자손만 수록한다.

왕의 내손은 9대손, 외손은 6대손까지만 수록하는 경우가 있었다.

참조:한국족보박물관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 가계도

태조 “이성계”는 1335년 10월 17일(음 10. 11)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이자춘(환조)과 최씨(의혜왕후)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고려 장수로 많은 공을 세웠던 이성계는 특히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고려 말기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이후 1388년에 고려 제32대 왕 “우왕”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게 되는데 이성계는 4불가론(큰 나라를 상대로 싸우는 것, 여름철 군사동원, 왜구 침범 우려, 장마와 전염병)을 내세우며 출정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왕”은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임명해 명나라 요동 정벌을 강행했고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까지 북진하다가 회군하여 고려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고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이후 선위 형식으로 1392년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의 “태조”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는 부인 6명이 있었으며 8남 5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어린 시절 사망한 자녀는 제외)

1대 태조”太祖” 이성계

생몰년도: 1335~1408

재위기간: 1392~1398

⊙:자녀, “생몰년도”

왕비(정비): 신의왕후 한씨 “1337~1391”

⊙진안대군(이방우) “1354~1393”

⊙영안대군(이방과) “1357~1419” *2대 정종

⊙익안대군(이방의) “1360~1404”

⊙희안대군(이방간) “1364~1421”

⊙정안대군(이방원) “1367~1422” *3대 태종

⊙덕안대군(이방연) “?”

⊙경신공주 “?~1426”

⊙경선공주 “?”

왕비(계비): 신덕왕후 강씨 “1356~1396”

⊙무안대군(이방번) “1381~1398”

⊙의안대군(이방석) “1382~1398”

⊙경순공주 “?~1407”

후궁: 성비 원씨 “?~1449”

후궁: 정경궁주 유씨 “?”

후궁: 화의옹주 김씨 “?~1428”

⊙숙신옹주 “?~1453”

후궁: 찬덕 주씨 “?~1436”

⊙의령옹주 “?~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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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대 임금 태조 이성계 가계도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명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은 1910년 순종을 마지막으로 27명의 왕이 있었으며 그 기간은 519년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조선 제 1대 왕 태조 이성계 가계도 등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1335년~1408년)는 고려의 우군도통사로서 요동정벌을 하러 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 “우왕”을 폐하고 조선의 제 1대 왕이 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에서 8남 5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를 드라마 “육룡의 나르샤”와 “정도전”에 대비하여 극 중 인물로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

<정도전> 유동근

<육룡이 나르샤> 천호진

1. 신의왕후 한씨 (자녀 8명) 조선을 건국하기 10개월 전인 55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 진안대군 이방우(1354~1393)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로 고려 후기 문과에 급제하여 공직에 있었으며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을 건국하자 강원도 복개산으로 들어가 왕세자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육룡> 이승효

– 영안대군(조선 2대 임금 정종) 이방과

(1357년~1419년), 재위 1398년~1400년

조선을 건국하는데 아버지를 도와 많은 공이 있었고 또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많은 업적이 있었지만 왕위에는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올랐고 바로 2년 뒤에 동생 정안대군(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육룡> 서동원

– 익안대군 이방의 (1360~1404)

– 회안대군 이방간 (1364~1421)

정안대군(태종)과 더불어 가장 왕에 욕심이 많았던 인물로 형 영안대군(정종)이 왕에 미련이 없고 적장자도 없어 “2차 왕자의 난”으로 왕권에 도전했지만 동생 이방원에 패해 유배되었습니다.

– 정안대군(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1400년~1418년

<육룡> 유아인

<정도전> 안재모

– 덕안대군 이방연

– 경신공주

– 경선공주

2. 신덕왕후 강씨 (자녀 3명)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기까지 많은 공로가 있다고 알려진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의 최초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후 자신의 자녀를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의 자녀들과 많은 갈등이 일어났고 또한 40세의 나이에 일찍 사망하면서 세자로 책봉된 의안대군을 왕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육룡> 김희정

<정도전> 이일화

– 무안대군

– 의안대군

– 경순공주

3. 성비 원씨

4. 정경궁주 유씨

5. 화의옹주 김씨

– 숙신옹주

6. 신원미상

– 의령옹주

이성계 가계도, 피로 물들다.

이성계 가계도를 보면 참 그렇습니다. 원을 버리고 고려 왕실에 충성하기로 한 조부의 결단으로 이성계는 고려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원명 교체기에 신흥세력으로 떠올라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그러던 중, 요동정벌이란 것에 떠밀려 출전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다가 회군을 통해 우왕을 몰아내고 4년 동안 권력 장악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공양왕을 쫓아내고 역성혁명에 성공합니다. 이때까지는 이성계 가계도가 그렇게 피로 물들지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성계 가계도를 보면서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이성계 가계도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조선 왕조 500년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피로 시작한 왕조가 불안했던 것인지.. 이방원을 철저히 배제시켰습니다. 아들 이방원은 개국에 있어서 많은 일을 처리했었죠.

이성계의 가계도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 씨, 계비인 신덕왕후 강 씨, 그리고 여러 명의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정비 신의왕후 한 씨 – 이방우(진안대군), 이방과(영안군), 이방의(익안대군), 이방간(회안공), 이방원(정안대군), 이방연(덕안대군), 경신공주, 경선공주

계비 신덕왕후 강 씨 – 이방번(무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 경순공주

이성계는 74세라는 나이로 장수하는 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이방우, 이방연, 이방석, 이방번, 이방의, 경순공주 등 여섯 명의 자녀가 먼저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아내인 신의왕후, 신덕왕후 모두 사별.

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절친이었던 무학대사, 이지란, 이색, 정몽주, 정도전, 조준, 남은, 심효생 마저 모두 떠나보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변방의 군벌에서 시작해, 고려의 영웅으로 등극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권력에 최고 자리에 올랐으나..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밀려나가기까지 했죠..

다음은 조선 정종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할게요~ 조선 정종도 잠깐 권력 욕심을 부렸었어요. 만약 끝까지 갔다면 또 칼부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조선 정종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정종은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었죠.

그런데, 권력에 잠깐 욕심을 부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종이 사가에 있을 때, 첩이던 류 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아들을 자처하는 ‘불노’라는 인물을 갑자기 원자로 삼았습니다.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지는 않았으나, 임금의 맏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이방원의 측근들은 긴장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움직였죠.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은 “공신들이 목숨을 걸고 공(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데, 지금 ‘원자’라는 사람이 궁중이 있으니 화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고 합니다. 이숙번의 말은 참 거침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나중에 날아감..

남재는 대궐 뜰에 나타나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은 “하늘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정종을 겁박했다고 합니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정종은 불노를 두고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해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하의 아들 15명에게 전원 가출 명령을 내립니다. 순간 이방원의 옛날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겠죠?

정종은 이방원의 이름만 나와도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정종의 정비 정안왕후는 “전하께서는 왜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느냐, 빨리 양위해서 편히 사시라”라고 간곡하게 청했다고 하네요..

만약 버텼다면 조선 정종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조선 정종이란 기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현명한 판단 덕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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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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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1335년 10월 27일 ( 음력 10월 11일 ) ~ 1408년 6월 18일 ( 음력 5월 24일 ) )는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5일 ( 음력 7월 17일 ) ~ 1398년 10월 14일 ( 음력 9월 5일 ) )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호는 송헌(松軒), 또는 송헌거사(松軒居士)다. 아버지는 이자춘이였는데, 몽골식 이름이 울루스부카(Улус Буха, 吾魯思不花)였다.[1]

개요 [ 편집 ]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2]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3]이다. 이후 존호를 더해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4]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가계 [ 편집 ]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5]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10월 27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이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전쟁 영웅 [ 편집 ]

이성계는 특히 활을 잘 쏘았다.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이성계는 15~16세 가량의 아기발도(阿其拔都 : 아기 장수)라는 왜구 소년장수의 활약으로 고전했다. 이성계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추자 투구가 기울어졌다. 당황한 아기발도가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자, 이성계는 또 다시 투구 꼭지로 화살을 날렸고 투구가 완전히 벗겨졌다. 아기발도의 이마가 드러나자 이지란이 화살로 맞추어 죽여버렸다.[6]

또한 황상(黃裳)과의 대결도 유명하다. 황상은 공민왕을 도와 기철을 숙청하고 홍건적에게서 개경을 탈환하여 1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예전에 원나라 순제 앞에서 활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 궁수를 모두 이겨 버린 적이 있었다. 원나라 순제가 놀라 “팔이 어떻게 생겼길래 활을 잘 쏘냐?”며 황상의 팔을 직접 만져볼 정도였다.

대결의 결과는 50발까지는 둘이 막상막하였으나, 50발이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7]

유년기 [ 편집 ]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8]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궁술과 전장에서의 그의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군왕과 군인역에서 은퇴후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 편집 ]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여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이성계는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등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고, 이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태조 [ 편집 ]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 우왕 시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각지에서 빈번하였다. 특히 우왕 시기의 왜구는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왜구는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되니,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대규모 군단이 내륙으로 들어와 옥천, 금산, 상주, 선산, 성주, 함양 등을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며 노략질하다가 마침내 지리산 운봉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변안열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드디어 이성계와 변안열이 출전하게 되었다.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이지란과 논의해 먼저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2차례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이후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이마를 향해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신진사대부와 연대 [ 편집 ]

눈부신 전공에 비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이 부족했던 이성계는[9]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정치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인정해 모든 전쟁터마다 반드시 그를 데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정몽주는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량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정몽주를 통해 뒷날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했으며, 개국 과정에서 모든 일을 함께 하였고 개혁과 개국의 이념을 제시했다.[10]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11]또한 친명 세력이자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의 부패권문세족 세력들을 숙청할 때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학연의 [ 편집 ]

안변책 [ 편집 ]

1383년 8월, 이성계는 동북면에 침입한 호발도에게 승리한 이후 우왕에게 변경을 편안하게 할 책(安邊之策)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 개국 이전에 가졌던 정치적 견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유명한 무장으로서 내용이 충실한 정책 건의를 한 사람은 이성계 이외에는 없다. 물론 단편적으로 건의한 바는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풍부한 사실과 주요한 사회 문제를 문장화해서 제시했던 경우는 드물다.[12] 또한 내용 전반이 군사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도탄에 빠진 민생으로 지목하여 이후 그가 신진사대부와 함께 체제 개혁을 추진한 것을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맹자>의 표현이 인용되어 있어 정몽주나 정도전의 영향도 확인할 수 있다.[13]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해 상시 군사 훈련을 시행할 것 사적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군벌과 호족을 엄단해 군량을 확보할 것 토지 제도 붕괴로 무너진 군제와 유랑하는 백성을 보호할 것 유능하고 공정한 인물을 수령으로 선발해 지방을 통치할 것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 편집 ]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14] 본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14]

1388년 4월,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곧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15]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성계의 반대를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16] 이러한 견해는 이성계 개인의 뜻이라기보다, 그와 정치적으로 결합한 신진 사대부들을 비롯한 여러 요동 출정 반대 세력의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륜은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최영이 양주로 유배하였고[17], 권근은 격문 작성을 거부하였고[18] 이숭인은 최영의 측근들에게 공격받아 축출되는 등[19] 조선 건국에 반대한 사대부들도 모두 우왕과 최영의 요동 공격에 반발하였다.[20] 우왕과 최영이 반대하자 이성계는 전열 정비 이후 가을 재출정을 제안했으나[21] 그것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다. 공요군은 병력 5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22]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했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여기서 그는 평양부터 위화도까지 19일의 진군 기간을 거쳤고,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한 반면, 정작 회군 때는 개성까지 9일 밖에 걸리지 않은 점을 들어 장마와 군량 문제는 구실에 불과하고, 이성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철저한 계획적인 일이라는 말이 있다.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두 차례의 혈전 끝에 개경을 점령했고, 이후 회군 장수들의 요구였던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 폐위를 끝까지 거부한 우왕을 폐위하고, 이후 이색과 조민수 등 사전 옹호 세력에 의해 옹립된 9세의 창왕을 잠시 받들면서 개혁을 강행하였다. 1년 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심덕부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를 이용해 창왕을 폐위했고 공양왕을 옹립한 이후 비로소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결합하여 이인임과 조민수를 필두로 하는 고려 권문 세족과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 왕조가 개창의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급진 신진 사대부의 적극적인 도움과 회군에 찬동한 이색, 최영 심문에 참여한 정몽주, 최영과 우왕의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투옥되기까지 했던 하륜 등의 협조로 내부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조준과 정몽주가 고려 구 세력의 대표 최영을 심문하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와 사대부는 최영을 축출했고 이 해 12월 개경으로 압송해 처형했다.

토지 개혁과 과전법 시행 [ 편집 ]

포은 정몽주 (1337-1392) 역성 혁명과 온건 개혁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1337-1392)역성 혁명과 온건 개혁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전면적인 사전(私田) 개혁에 나섰으며[23] 대농장 소유와 불법 겸병으로 국고를 고갈시키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른 고려 귀족 기득권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사전을 혁파해 고려 말 사회 혼란을 해소한 뒤,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중앙 집권과 관료제, 근세적 토지 소유 관계의 기초를 닦았다.

원 간섭기 권문 세족과 불교 사원은 대토지를 점유하고 불법 겸병을 이용해 사전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국가 경제를 파괴했다. 고려의 조세 수입을 지탱했던 공전 수조지는 감소하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제 개혁은 불가피했다.[24]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몽주 등은 회군 이후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진 인물 중 하나였다.[25]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분열과 대립이 발생했다. 최초의 분열은 위화도 회군 직후 전제 개혁논의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색, 권근 등과 이인임의 인척 이숭인과 하륜 등은 사전 혁파에 반대하며 일전일주론을 주장했고, 조준, 윤소종, 정도전 등은 전면적인 사전 혁파를 비롯한 정치, 사회, 법과 제도 전반 개혁을 주장했으며 정몽주는 중립을 지켰다.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에 대한 정몽주의 정치적 입장은 이성계, 정도전과 가까웠으나, 이색이나 이숭인 등과의 개인적 관계가 그에게 중립을 지키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26] 공양왕 옹립에 이르기까지 급진파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던 정몽주가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자, 이성계는 조준으로 하여금 과전법을 제정하도록 했고 토지 개혁을 관철시켰다. 창왕을 폐위한 이후 겨우 양전을 시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고려 농장주들의 극심한 저항을 그대로 보여 준다.

비록 농민에게 토지를 직접 분배한다는 정도전의 계구수전론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개경 거리 한복판에서 고려의 모든 공사 전적(토지대장)을 소각하고 시행한 조준의 사전 혁파와 과전법 시행은 고려 말 재정 고갈을 해소하였다. 그러나 과전법은 근본적으로 구 고려 권문세족으로부터 급진 신진 사대부로부터의 부의 이동이였고, 이것이 가장 큰 목표였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은 중도포기하고 도외시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우왕과 창왕 및 그들을 둘러싼 이인임 계열 외척 귀족들과 사전주, 농장주들의 반대와 저항이 극심했으며 이성계의 힘으로도 고려 기득권의 반발을 모두 무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양왕 옹립까지 모든 정치적 갈등의 근본에는 이 토지 개혁이 있었다.[27] 전제 개혁 논의를 기점으로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보존하여 고려 귀족 연합체를 유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고, 반면 정도전과 조준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관료제 사회 수립과 전면적인 사회 개혁, 왕조 교체를 주장했다.

역성혁명파의 유배와 정몽주의 최후 [ 편집 ]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와 공양왕은 이성계가 없는 틈에 대간을 움직여 역성혁명파의 핵심 인물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향했다. 공양왕 즉위 이후로 고려의 군권은 이성계를 비롯하여 조준과 정도전 등에게 집중되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군권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8] 이후 형률을 다스리는 사람은 엄벌주의적 주장으로, ‘김진양 등의 인물들을 참수형으로 벌해야 한다’라며 주장했지만, 태조는 “김진양은 정몽주가 부추겨서 행동 한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형벌을 내리지 못한다” 라며 온정주의적 주장을 하였는데, 그럼에도 형벌을 내리는 사람이 여전히 태형을 내리는 것을 제안하자 “이미 이들을 용서하였으니 곤장을 칠 필요 역시 없다”라고 하여 진양 등의 인물은 형벌을 면하게 된다.[29]

이성계는 군권으로 정몽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고, 건국 과정에서 도평의사사의 인준과 공양왕의 선위를 받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만나 정자에 둘러 앉아 시조를 한 수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엵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겨 같이 새 나라, 왕조를 세우는 데에 같이 이루어 보자는 이방원의 뜻이었고,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내어 정몽주 자신은 자신의 몸이 백번 천번 죽어도 고려의 왕만을 섬긴다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있는 한 역성혁명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자신의 수하 조영규와 고여 등을 시켜 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정몽주를 쫓아가 선죽교에서 제거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였다. 정몽주의 측근들인 온건 개혁파들을 대거 축출하여 유배를 보냈고, 정몽주에 의해 탄핵되었던 이성계 일파의 급진개혁파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여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후 나머지 온건개혁파들에 대한 척결이 이루어졌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사실상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어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민개는 혼자 기뻐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여 말하지 않아 남은이 목을 쳐 죽이려 하였지만 태조는 의리 상 죽일 수 없다며, 민개를 살렸다.[2]

선양 형식으로 조선 개국 [ 편집 ]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왕건이 개국한 지 475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30]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포용 정책과 고려 구신들의 출사 [ 편집 ]

태조는 개국 이후에 개국공신 52명에 이어 재위 2년부터 재위 6년까지 모두 22차례에 걸쳐 도합 1,400여명의 개국원종공신을 포상하였고[31], 이는 새 왕조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다고 인정받고 있다[32][33].

또한 태조 즉위 교서에서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고 지목된 56명 중 사망한 8명을 제외한 48명 중 32명이 태조, 정종, 태종 대에 다시 출사하였다. 개국 이후 태조는 고려 구신들을 원종공신으로 포상하거나 적절한 관직에 임명해 회유했으며, 특히 권근, 하륜 등 이색 문하 온건개혁파는 새로운 왕조에 적응해 다양한 직임에서 각종 문물 정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4]

아래 표는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명시된 개국 반대 세력 56명 중 태조, 정종, 태종 대 다시 출사한 사례를 일부분만 제시한 것이다.

성명 시기 활동 내용 설장수 태조 3년 사역원 제조[35] 강회백 태조 2년 참판승추부사[36] 조호 태조 2년 노비변정도감에 소송[37] 이내 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좌명 공신[38] 김묘 태종 6년 지사간[39] 김첨 태조 6년 친종호군[40] 유향 태종 1년 경기우도 안렴사[41] 이작 태종 14년 대간[42] 안노생 정종 1년 좌 간의[43] 권홍 태종 2년 딸이 태종 후궁으로 간택[44] 유정현 태종 3년 승녕부 윤 안원 태종 1년 우군 동지총제[45] 성석용 태조 6년 개성 유후[46] 정희 미출사 아들 정초가 세종 대 출사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 편집 ]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47]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48]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48]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49][48]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48][49]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태조는 직접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48] 정궁(正宮) 터로 하륜이 오늘날 신촌에 해당하는 무악을, 정도전이 오늘날 경복궁 터를 지정하였으며 정도전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태조는 종묘와 사직, 법궁을 비롯한 한성 도시 계획 전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한양으로 천도 [ 편집 ]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50]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48]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51]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51]

제도 정비와 법전 편찬 등 국가 기틀 수립 [ 편집 ]

태조는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 전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과 좌시중 조준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 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였다.[52] 태조 대 정치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국왕의 권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재상들과 논의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체제로, 이는 고려 말 7~80여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운영하던 도평의사사를 공신들 및 관료들의 합좌 기구로 정리하여, 의정부와 육조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정치 방식이었으며 태조의 왕권은 도평의사사에 직접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등 강력한 것이었다.[53] 또한 기존 도평의사사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채로 국왕과의 정치적 의사 소통 및 권력을 독점한 내재추를 혁파했다.[54][55]

사병 혁파와 왕자의 난 [ 편집 ]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56]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57]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다. 태조는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분할했는데,[58]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59]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다.

퇴위 [ 편집 ]

태조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이미 실권도 모두 잃어,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아우 방원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는 왕위계승을 두고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대립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사실상 폐위한 이방원을 매우 증오해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야사가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부추겨 아들 이방원을 쳤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뒤에 태종 이방원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의 천거로 무학대사가 차사로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오면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이방원을 살해할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념해 이방원을 인정하고 용서했다는 야사가 있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묘호 및 시호 [ 편집 ]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묘호를 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시에 명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능원 [ 편집 ]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가계 [ 편집 ]

태조가 등장한 작품 [ 편집 ]

태조 어진 [ 편집 ]

태조 이성계의 외모와 관련하여 국보 제317호 태조 이성계의 외모와 관련하여 국보 제317호 조선 태조 어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즉위 초기의 태조 퇴위 후 노년의 태조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로서 조선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내내 존숭과 추앙의 대상이었다. 태조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은 다른 국왕들의 어진이 한곳에 봉안되었던 것과 달리,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에 분산되어 소장되었다.

1832년(순조 32년) 도둑이 들어 어진이 훼손되어 여러 개의 모사본이 그려졌는데, 1872년(고종 10년) 제작된 전주 경기전에 남은 것만이 전해져왔다. 그후 2006년 5월, 모사본 초상화가 발견되었는데 1832년작으로 영흥 준원전에 봉안한 모사본 초상화이다.[69] 남아 있는 어진을 보면 태조는 검은 수염에 귀가 크고 광대뼈가 도드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기타 [ 편집 ]

태조 이성계에 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한 설화는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왕씨 몰살 [ 편집 ]

왕건이 세운 고려는 1392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 대대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당초 고려조의 왕씨의 후예에 대해 구세력의 유화(宥和)하는 뜻에서도 비교적 온건책을 썼으나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왕조의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개국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태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효온의 한문 수필집인 《추강냉화(秋江冷話)》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1394년)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빠뜨려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 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70]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왕씨들은 ‘임금 왕(王)’자에서 모양을 변형하여 전씨(田, 全), 옥씨(玉), 차씨(車), 신씨(申) 등으로 바꾸어 살았다.[71] 태종 시대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되었다.[72]

회룡사 전설 [ 편집 ]

1401년(태종 1년)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은 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년)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는 1394년, 정도전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최영과의 비교 [ 편집 ]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였고 고려 말, 급진사대부의 수장이였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원나라가 그 지역을 공격했을 때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이에 항복했고, 그 후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원의 쇠퇴기에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는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조상들이 친원 부역을 했다는 심각한 가문적 결함이 있었고, 이것에서 벗어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색, 정몽주,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의 고려말 신진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학계의 유력한 설이 있다.[73]

이에 비해 최영은 고려의 정통 귀족 가문의 후예였고, 권문 세족과 깊이 연관된 친원파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무진피화 이후 우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 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태조는 개국 이후 최영을 추시하여 복권하였고[74], 그의 손녀 사위 맹사성을 등용했다.[75] 또한 요동정벌 실패 후 최영의 당당한 최후에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의 의연한 죽음은 국왕이 된 이성계와 대조를 이루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장수군도 [ 편집 ]

이성계, 심덕부, 이지란이 위화도 회군 직전 서로 의형제를 맺고 회군을 결의한 기록화인 장수군도가 새로 발견되었다.[76]

두문불출 [ 편집 ]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건국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될만한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였고 새로운 왕조 개창에 협조하지 않는 고려의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는 야사가 있다.[77]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은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경기도 개풍군)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18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야사로, 조선 후기에 창작된 내용이며, 두문동 설화는 18세기 이후 유포되었다.[78] 또한 이른바 두문동 구성원이라고 알려진 인물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분석한 결과 개경 인근 황해도에 농장을 가진 지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개혁 반대 세력의 일원이었다.[79]

태조는 즉위 초,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를 고려의 예에 따르게 했다.[77] 권근, 하륜, 심덕부, 설장수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신진사대부의 스승격인 이색 역시 조선 조정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다.

함흥차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함흥차사 입니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야사로, 태조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은 조사의의 난이다.

평가 [ 편집 ]

긍정적 평가 [ 편집 ]

개국 이전 [ 편집 ]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을 비롯한 북로남왜 외침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동북면도의 군벌이었던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당대 동북아에서 고려로 침입한 모든 적들과 싸워 승리해 백성과 고려를 구하며 조정과 민간에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당대 고려는 정치,경제,사회,군사 등에서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였고, 명문 권문 세가인 조준이 고려 체제에서 이탈해 새 왕조 건설에 협력한 것은 상징적이었다.[80]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었던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 조준, 윤소종, 남은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이 견인한 조선 왕조 개창은 단순한 왕조 교체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대사건이었고,[81] 고려 말 일대 사회 개혁의 최종 단계였으며 태조와 조선 개국 공신들은 권력과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사회 개혁을 시행한 끝에 새 왕조를 개창했다.[82]

개국 이후 [ 편집 ]

내치

태조는 새 왕조 개창 이후 강력한 왕권을 가졌으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기보다 국왕으로서 국가 기틀 정비에 더 충실했고[83] 재위 기간에 비교해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정도전, 조준, 윤소종, 남은, 하륜, 권근, 성석린, 성석용, 유관, 맹사성, 허조, 허주 등 관학파 주요 인재들을 모두 등용했으며, 창업 군주로서 법률 정립에 강력한 의지를 보여 성종 대까지 통치규범체제 확립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떼었다.[84][85] 또한 4품 이상 고위 관료 임용을 서경이 아닌 국왕의 주관으로 개혁하여 도평의사사에서 권신과 국왕의 측근들이 인사권을 장악한 폐단을 혁파했고 고려의 과거제도를 정체시킨 지공거 제도를 즉위 직후 폐지하는 등, 고려 말부터 즉위 이후까지 지속적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정비하고 태종과 세종 대 조선이 나아갈 방향성을 지정하였다.

외치

부정적 평가 [ 편집 ]

사초열람 [ 편집 ]

재위 2년 태조는 공양왕때 사관 이행(李行)이 우왕, 창왕, 변안열이 죄없이 이성계에게 죽었다고 고려의 사초에 기록하자 국문을 지시한다.[86]

재위 7년차인 1398년 6월 12일(음력)에 자신이 고려 왕조 당시 활동했던 기록들을 담은 고려왕조실록과 1392년 즉위한 이후에 기록된 모든 사초(史草)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 이 분부에 사관(史官) 신개(申槪) 등이 강력히 반발하였지만 사관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87]

또한 <태조실록>은 태종의 밀명을 받은 하륜이 편찬하며 사관의 출입을 막아 당대에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학계에서도 태조와 정도전, 신덕왕후와 개국 공신들에 대한 곡필이 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 이후 왕의 사초와 실록 열람은 성리학적 이념이 강화되고 통치규범이 자리잡게 되면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춘추관 관원들 (1413). 《태조실록》.

외부 링크 [ 편집 ]

부인, 아들들, 직계 조상, 형제들

태조 이성계 가계도 // 부인, 아들들, 직계 조상, 형제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왕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잔디가 없고 억새로 덮여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잔디 대신 억새가 자라는 태조 이성계의 묘는 동구릉에 있다.

태조가 죽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유언을 받들어 고향인 함흥에서 흙을 가져와서 봉분을 만들고 억새를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묘는 1년에 한 번만 벌초를 한다고 한다.

이성계 가계도

태조 이성계 조상들은 전주에서 간도지방으로 이주해서 몽고에 협력하여 다루가치 벼슬을 살았다. 아버지 이원춘은 원나라가 만든 쌍성 총 관부 만호였다가 공민왕 때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는데 공로가 있어 고려에서 벼슬을 하사 받았다.

아버지 : 이자춘 , 쌍성총관부 만호, 조선이 건국되고 환조 대왕으로 추존됨 어머니 : 영흥부원군 최한기 딸, 의혜 왕후로 추존됨 이복형 : 완풍대군, 영성대군 이복동생 : 의안대군(이화) 누나 : 정화공주 정비 : 신의왕후(정종과 태종 어머니 ),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죽어서 왕비가 되지 못함 계비 : 신덕왕후(방번, 방석 어머니), 조선 최초 왕비 후궁 : 성비원씨, 정경궁주유씨, 화의옹주김씨, 찬덕주씨, 궁인김씨 아들 : 진안대군, 정종(방과), 익안대군, 회안대군(방과), 태종(방원), 덕안대군, 무안대군, 의안대군(방석) 왕녀 : 경순공주, 경신공주, 경선공주, 의령옹주, 숙신옹주

이성계 가계도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의형제 “이지란”과 관계는 친혈육 이상이었다고 한 다. 이지란은 이성계가 참전한 모든 전투에 참여했다.

조선이 건국되고도 이성계와 함께 했고 태종 이방원을 적극 옹호했다고 한다. 이지란의 후손들은 조선에서 주요한 관직을 지내면서 조선왕족의 일원으로 생활했다.

이성계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다. 장남인 진안대군만 조선의 건국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조선에서 대군이 되었다.

이성계 부인중 신의왕후또한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죽었다. 계비인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는데 신의왕후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넷째 이방과 와 다섯째 이방원은 건국 이후 권력에서 소외되고 신덕왕후 둘째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는 골육상쟁이 발생한다.

직계 조상과 형제들

태조 이성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와 아들들의 권력투쟁은 수많은 역사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직계 조상들은 모두 조선이 건국되고 왕으로 추존되었다.

태조 이성계 조상 “이린”은 6대 조상으로 이의방의 동생이다 . 고려 무신정권 실권자 이의방이 전주 이 씨이다. 이린의 아들 이양 무이고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이다. 이안사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추존한 최초의 추존왕 “목조”다.

태조 이성계는 이린과 이양무를 추존하지 않았다. 무신정권과 관련된 인물이어서 족보에서 삭제했다고 한다. 태조는 4대조부터 추존했다.

아버지 이자춘(환조), 할아버지 이춘(도조), 증조부 이행리(익조), 고조부 이안사(목조)로 추존하면서 태조 이전에 조선에는 4명의 왕이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 이복형 이원계(완풍대군)는 고려 무신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고 이성계와는 달리 고려에 충성을 다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죽었다.

이복동생 의안대군 이화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적극 협력한다. 이방원을 도와서 정몽주를 제거하는데 적극 개입하고 개국공신이 된다. 이후 이방원이 왕이 되는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

이복형 영성대군 이천계와 이복동생 이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아마도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죽었거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것 같다.

2022.07.26 – [분류 전체보기] – 이성계 부인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이방원 부인(원경왕후 민씨)

2022.07.19 – [분류 전체보기] – 조선시대 계급(신분제도), 조선시대 평균수명, 조선시대 형벌

2022.06.25 – [분류 전체보기] – 조선왕 계보, 조선왕조 계보(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

2022.06.11 – [분류 전체보기] –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수양대군 계유정난,중종반정,인조반정

2022.04.15 – [분류 전체보기] – 태종의 아들들_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성녕대군

2022.04.22 – [분류 전체보기] – 세종대왕의 아들_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금성대군

2022.04.24 – [분류 전체보기] – 민제,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 // 태종 이방원 장인과 처남들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이성계 (초명: 이성계李成桂, 즉위 후 이단李旦 1335년~1408년)

1335년 –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에서 탄생, 본관은 전주全州

1356년 21세 –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협조 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

1380년 46세 – 지리산 근처 황산荒山에서 왜구들을 소탕함(황산대첩)

1388년 54세 – 위화도에서 회군함

1392년 58세 – 조선 건국, 태조太祖로 즉위함

1394년 60세 –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

1400년 67세 – 왕자의 난으로 양위하고 함흥으로 거처를 옮김(함흥차사)

1402년 69세 –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으로 불교에 심취

1408년 74세 –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승하, 능은 건원릉

황혼의 제국, 몽골과 고려

칭기즈칸 이후 영원할 것만 같던 원元 제국(몽골)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특유의 야성野性을 잃어버렸고, 황실은 라마교에 빠져 흥청거렸으며, 대신들은 권력 투쟁에 혈안이 되었다. 그 사이 중원대륙 남방에서 시작된 반란은 천하에 혼란을 가져왔고, 원 제국에 의해 유지된 동아시아의 절대적인 힘은 진공 상태로 말 그대로 천하대란, 혼돈의 시절이었다. 기나긴 대몽항쟁과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을 겪은 고려는 글자 그대로 껍데기만 남았다. 천자국에서 제후국으로 강등되었고, 원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관리들은 원나라에 충성하기에 바빴고, 아예 고려를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성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 후기 간신인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등으로 이에 대해서는 환단고기를 참조할 것). 부원附元 권문세족은 고려의 정치, 경제력을 손아귀에 쥐고 민생을 살피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새 임금이 된 이가 공민왕恭愍王이었다. 원 조정은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을 감당할 수 없자 고려에 원군을 청하였는데, 이때 최영 등 장수들이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귀환한 이들의 보고를 통해 정세를 파악한 공민왕은 반원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부원 세력인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으로 권문세족의 수장이 되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하고,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하고, 1356년 동북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이때 동북면 지역 유력자 중 1명으로 다루가치(達魯花赤) 관직에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아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군 공격에 내응하여 고토 회복의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자주권을 되찾고 내정을 개혁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공민왕에게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들이 원의 토벌에 밀려 고려에 침입하여 한때 개경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350년 경인년 봄, 고려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끊임없이 고려를 침범하였다(이들의 침입은 조선 초기까지 대략 50년간 지속되어 약 4백 건 가까이 발생하였다. 1350년에만 5차례 침략이 있었다). 북로남왜北虜南倭! 국토는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은 거듭 피난 보따리를 싸야 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그 기회를 잃었다. 왕은 불운하였고, 그의 불운은 고려의 불행이 되었던 반면, 한 사내에게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조선을 개창하다

고려의 바다를 지켜라

1380년 우왕 6년 고려 남부 하삼도下三道(양광도-지금의 경기도와 충청, 강원 영서지역 일부-와 경상, 전라의 3도) 천 리 산야는 피로 물들었다. 산발적으로 해안 지대를 공격하던 왜적은 7월에 들어서자 오백여 척의 병선으로 진포鎭浦(충남 서천, 장항, 또는 전북 군산 인근 바다)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시체가 산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자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최영은 최무선을 통해 화약으로 화기를 만들게 하였다. 예성강가에서 출진한 고려 수군 100척은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왜적 격멸을 위해 진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전함 수나 등선登船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적에 전투력은 열세였으나 고려는 비장의 무기 화포가 있었다. 이 전투에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가 사용되었다.

진포에 정박해 두었던 왜선을 화포와 화통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나, 왜적은 공주, 옥주沃州(지금의 충북 옥천)까지 달아났고, 이산현과 영동현을 비롯해 내륙 깊숙이 돌며 더욱 잔혹하게 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은 고려군을 격파하면서 북쪽으로 진격해 개경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고려조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를 삼아서 왜적 토벌을 명하였다.

황산에서 왜적을 크게 이기다

삼남 지방을 피로 물들인 왜구

퇴로가 막힌 왜적은 사근내역沙斤乃驛(지금의 함양)에서 고려군을 격파, 박수경, 배언 두 원수가 전사하였다. 왜적은 서진하여 전라도 운봉을 불 지른 뒤 인월引月 근처 황산荒山에 주둔하였다. 열매 맺는 가을,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에 남도 천리의 고려 강산은 적에게 짓밟혀 황량한 폐허가 되었다. 백성들의 목숨은 폭풍 앞의 낙엽같이 무너졌다. 기록을 보면, 왜적은 두세 살 되는 여자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가른 후 깨끗이 씻어서 쌀, 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삼도의 연해 지방이 텅 비게 되었다고 참상을 전하고 있다.

황산대첩과 이성계

이미 황산 줄기가 동으로 뻗어 인풍과 인월의 두 벌판을 갈라놓은 돌출부에 집결한 왜적은 요해처를 점령하여 이성계의 선봉대를 패퇴시켰다. 이후 여러 번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이성계, 이지란이 이끄는 주력은 적진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활을 맞기도 하고 뒤에서 달려드는 적장의 창에 크게 다칠 뻔했으나 이지란이 먼저 활을 쏴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왜적은 아지발도(우리말 ‘아기’와 용맹한 자라는 몽골어 바토르의 한자 음차 표기인 ‘발도’를 합쳐 어린 영웅이란 뜻)라는 백마 탄 소년 장수가 나타나 이성계 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때 신궁 이성계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혀 떨어뜨린 틈에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장수를 잃은 왜적은 갈팡질팡하다 대패하였다. 이때 죽임을 당하는 왜적의 곡성이 마치 1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일주일 동안 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 전투로 이성계의 무명武名은 전국적으로 떨치게 된다. 이전까지 이성계는 북방으로 쳐들어오는 홍건적, 나하추 등을 격퇴하는 동북면의 장수였을 뿐, 고려 남부 백성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이 승첩 이후 이성계는 전국구 무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의 배경, 고려의 멸망

고려 말 조선 초 요동 정벌 상황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요동遼東 지역 정벌이 여러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공민왕 시절로 1356년부터 1370년 경술까지 지속되었다. 그중 1369년 공민왕 18년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삼아 동녕부(遼陽)를 들이치게 했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요동을 지나 올랄산성兀剌山城(우라산성于羅山城 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원 잔당들을 공격하였다.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연거푸 쏘아 날려 적병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요동성을 공략 함락시켰다. 하지만 왜구들이 고려 땅 곳곳을 유린하였고, 보급 문제로 실질적 지배가 힘들자 철군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좌절된 1388년의 요동 정벌이고 세 번째는 1397년 조선 태조 6년 정도전에 의해 진행된 요동 정벌 시도였다. 이는 태종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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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의 진실

1388년 우왕 14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황산대첩 이후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시기 정몽주와 긴밀했던 조반趙胖이 당시 집권자 중 한 사람인 염흥방廉興邦과 갈등을 빚은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당시 집권자들을 제거하고, 최영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정월). 이 과정에서 집권자들에게 배척을 당해 두문불출하던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성계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그와 여러 면에서 견해를 달리하던 최영은 불안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원의 잔존 세력을 평정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 명明나라는 원에 속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회수하여 철령위鐵嶺衛(현재 만주 심양 부근에 있는 본계시本溪市 부근)를 설치하여 다스리겠다는 뜻을 고려에 통보하였다(2월). 고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즉 요동 공격을 하자는 주장과 외교를 통해 해결하자는 책략이 맞섰다.

명의 철령위 설치는 원에 속했던 군민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이어받아 관할해야 마땅하다는 원칙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지의 보고가 있자, 곧바로 요양 북쪽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 즉 고려 영토가 명에 의해 회수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우왕과 최영은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여 출병을 강행하였다(4월). 무리하고 졸속적으로 서두르는 측면이 있었다.

총병력은 3만 8천여 명으로 좌, 우군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조민수의 좌군은 서경과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계림, 안동 등 넓은 지역에서 병력을 차출한 반면 이성계의 우군은 안주도, 동북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만큼 이성계는 많은 휘하 친병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요동 공격은 이성계 휘하의 강력한 사병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려는 최영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명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한 정몽주, 정도전 등 문신 세력들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이성계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등의 4가지 이유(이성계의 4불가론)를 들어 요동 공격의 부당성을 호소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묵살하였다.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에 불복,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당시 개경에 있던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6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조선 개국이 결국 무인의 쿠데타라는 사실과 함께, 조선의 사대주의 외교의 시발로 보는 견해가 많다. 몽골과의 긴 항쟁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고려의 민족주의, 신흥 강국 명을 치고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진취적 발상 등을 높이 사는 시각에서 볼 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요동 정벌 배경 자체가 최영을 위시한 친원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는 점과 당시 고려 사회 내부의 사회, 경제적 취약성을 간과할 수 없다. 외적들의 침입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요동 정벌 같은 큰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전쟁의 담보로 삼은 것은 결국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 측면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하였으며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혼자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신진 사대부가 신흥 무인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를 멸망하고 조선을 개창하는 단초가 된 사건이었다.

전제 개혁을 하다

당시 고려는 불교의 세속적 타락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해 전제 개혁, 노비 변정, 사원 정리 등이 모두 상호 연관되는 핵심 사회 문제였고, 피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제였다. 지배층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묵은 세력이었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은 조준 등을 내세운 전제田制 개혁이었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모든 백성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어 지주제를 없애고 자작농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계구수전計口授田’을 주장하였으나,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한 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을 달리하면서 서서히 멀리하는 관계가 되었다.

조준, 정도전 등이 추진한 토지제도는 여러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수조권收組權(관료들에게 나라를 대신하여 조세租稅를 거두어 월급으로 사용하게 한 권리) 측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당시 지배층들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권세로 농민들을 억압하여 하나의 토지에서 여러 명의 관료들이 수조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작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도 손에 쥐는 게 없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주되 그 대상을 대체로 현직 관료 중심으로 범위가 제한되었고, 농민의 경작권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1391년 공양왕 3년 5월 이런 취지를 담은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이 반포되었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에 의해 정도전, 조준 등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4월 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의 태조가 되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474년 제34대로 멸망하였다. 왕조 교체기는 대부분 격동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에 찬 인재들 간에 죽고 죽이는 모략과 암투가 펼쳐진다. 대규모 전쟁으로 25개 왕조가 명멸한 중국에 비해 우리의 왕조 교체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다. 이성계는 개국에 반대한 핵심 인물만 처단하였을 뿐 이외 인사들은 재등용하였다.

태조는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였다. 1394년에는 개성 중심의 구질서를 탈피하면서 행정과 수로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방위에 매우 편리하고 그 전까지 삼국 분열 의식의 색채가 적었던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 관아, 성곽, 4대문을 건설하였다. 태조는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왕권의 행사가 강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많은 개국공신과 종친을 소외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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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가계도로 보는 태종 이방원

요즘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몇 번째 아들이며 몇 번째 부인에서 태어난 자식일까요? 학창 시절 배웠던 역사가 가물가물 해지는 나이가 되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태종 이방원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려면 이성계 가계도와 태종의 왕위 등극 과정의 역사는 알아야겠죠? 오늘 드라마 이야기보다는 이성계와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성계는 누구?

위화도 회군으로 역사책에 남겨진 인물,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최영 장군을 제거한 인물이지만, 조선왕조를 창건했고 5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진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와 원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말 1335년에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 살았지만 고조부가 간도 지방으로 이주해 원나라 관리를 지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그런데 이성계가 어떻게 고려의 무관이 되었을까요? 원나라가 쇠퇴하자 부친인 이자춘이 고려로 귀하하였습니다. 즉, 아버지까지는 원나라 사람이었던 거죠. 이자춘의 귀화로 고려인이 된 이성계는 전쟁에서 올린 공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였던 원나라 나하추가 함경도 홍원으로 침입했을때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고, 공민왕을 폐위하려는 최유를 최영과 함께 무찌른 고려의 심복이자 출정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뛰어난 무인이었습니다.

이성계 가계도에 부인이 6명

그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같이 일했던 최영 장군을 치고 정도전과 함께 1392년 신왕조 건립하였습니다. 왕이 된 이성계에게는 부인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자식은 무려 8남 6녀랍니다.

하지만 자식을 낳은 부인은 4명, 그중에서도 아들을 낳은 부인은 단 2명에 불과합니다. 부인이 많을수록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권력다툼이 심했던 당시였기에 2명의 부인만이 아들을 낳은게 다행이었을까요?

하지만 이성계는 본부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만 아들 6명과 딸 2명을 낳았습니다. 이 6명의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는 둘째 아들 영안대군을 제2대 왕인 정종을 선위 하였고, 정종은 왕이 된 지 불과 2년 뒤 정안대군을 제3대 왕인 태종으로 선위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태종 이방원입니다.

이성계 가계도

구분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미상 아들 진안대군

영안대군(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

정안대군(태종)

덕안대군 무안대군

이안대군 – – – – 딸 경신공주

경선공주 경순공주 – – 숙신옹주 의령옹주

드라마틱한 태종 이방원의 인생

태종의 인생은 드라마틱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로 만들었나 봅니다. ㅎㅎㅎ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말에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했으나 정도전과의 갈등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갈등을 빗던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왕권을 선위 받아 본인이 아닌 둘째 형 이방과(영안대군)를 왕의 자리에 앉혀 정종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다섯째 아들이 말이죠.

이후 넷째형인 이방간(회안대군)과 제2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방간 세력을 제거하고 후사가 없던 정종에게서 강압적으로 왕건을 양위받아 2년 만에 본인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태종 이방원이 탄생하게 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지만, 건국자인 이성계보다 화통하고 진솔하며,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왕의로써의 자질을 보여줬던 태종입니다. 또 그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한글을 만들고 과학으로 국력을 키워 지금도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세종대왕입니다.

태종 이방원 가계도

구분 원경왕후

민씨 효빈

김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의빈

권씨 소빈

소씨 숙의

최씨 덕숙옹주

이씨 고씨 김씨 아들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세종대왕)

성녕대군 경녕군 함녕군

온녕군

근녕군 익녕군 희령군 후령군 혜령군 딸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소신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소숙옹주

경신옹주 정해

옹주 숙혜

옹주 숙순옹주 숙안옹주

태종은 부인이 무려 9명입니다. 슬하에 자식도 12남 17녀랍니다. 대단하죠?

오늘은 이방원의 궁금증을 풀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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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알아보자

고려 말의 명장이자 패망의 주도자 그리고 조선의 초대 국왕이 바로 이성계 입니다. 이성계는 주몽 이래 신궁으로 여진족과 홍건적등의 세력과도 맞붙어 이긴 무시무시한 장군 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이방원에게는 패배를 하면서 엄청난 유전자(?)를 보유하였다고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성계 가계도 에 대해 알아볼까 해요.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더더욱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거 같은데요.

저도 국사 공부를 안하다가 다시 한번 책을 열어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네요.

전장에 나아가 30년간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조선 및 역사 최고의 명장. 그전에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이성계와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를 점령할때 고려의 신하가 되면서 고려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2차 요동정벌을 위해 올라가다가 최영을 몰아내면서 공양왕을 옹립하게 된 이후에 공양왕과 정몽주가 비밀리에 이성계를 견제할려고 했으나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게 되고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투항(?) 하고 고려 멸망, 조선 건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 를 살펴보면 6명의 부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8남 5녀를 두었는데요. 부인중 신의왕후 한씨가 정종과 태종을 낳았습니다.

신의왕후 한씨 이성계가 왕이 되기 1년전에 위장병으로 인해 사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태조 때 절비 로 추증되었다가 왕자의 난 이후에 정종이 즉위를 하게 되면서 왕후로 승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태조의 외면을 받았으나 정종이 왕후로 추존을 하게 되었고 이후 태종이 왕위에 즉위 한 이후 태조가 사망하자 선억왕후 강씨 옆에 묻어달라는 태조의 유언을 듣지 않고 따로 장사를 지내게 되면서 신의왕후 한씨는 왕태후로 추상 되었다고 합니다. -승인순성신의왕태후-

이성계 가계도 에서 빠질 수 없는 신덕왕후 강씨는 충혜왕 떄 권문세족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쪽 선조 였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 하였고 여인은 바가지에 버들잎 을 띄워 주게 되는 유명한 설화.

그 설화의 주인공이 신덕왕후 강씨 였다고 합니다. 어쨋든 이성계가 왕이 되면서 조선의 왕비로 봉해졌으며 자신의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태조 는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 (의안대군) 을 세자로 선택을 하였고 신덕왕후 강씨가 죽은 이후 1차 왕자의 난에 의안대군, 무안대군은 살해 당하였고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사대문 밖으로 이장했으며 이장하면서 나온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 등은 홍수로 피해를 입은 광통교의 자재로 복구 했으며 목재는 태평관을 건축을 할때 사용되게 했다고 합니다.

짧게나마 이성계 가계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보았는데요. 잘못된 내용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참고용으로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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