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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중장년 카페 훈장 | 미성년자 관람불가 [ 남근카페 / 먹방 / 들무새 / 포천 여행 / 이색카페 / 맛집 ] 최근 답변 4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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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와 이거 뭔데 – https://youtu.be/7zswBFefp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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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카페#데이트장소#일상브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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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외로워서 혼자사는 남자 둘 – 네이버 블로그

모란각 지하 카페의 고스톱 현장은 인간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살벌한 곳이다. … 여한 국가1급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 여기에 표시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12/2022

View: 3273

동구행복한어르신복지관, 라운지 커뮤니티센터 대전점 개소식 …

지난 2일 동구행복한어르신복지관이 1층 카페에서 일자리 창구이자 지역의 … 노년을 준비하는 중장년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지역 커뮤니티센터이다.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www.dailycc.net

Date Published: 1/13/2021

View: 7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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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관람불가 [ 남근카페 / 먹방 / 들무새 / 포천 여행 / 이색카페 / 맛집 ]
미성년자 관람불가 [ 남근카페 / 먹방 / 들무새 / 포천 여행 / 이색카페 / 맛집 ]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남도 중장년 카페 훈장

  • Author: 지훈쓰
  • Views: 조회수 745,900회
  • Likes: 좋아요 3,736개
  • Date Published: 2021. 6.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5QSWmkV_ao

너무 외로워서 혼자사는 남자 둘

여의도에 모란각을 띄우다.

97년 5월 19일, 모란각의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것도 나의 제2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여의도에서. 평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방송국 동료들에게 냉면을 대접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짐이었다. 먼 일산까지 오시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냉면을

싸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의도 땅에 분점이 생긴 것이다. 개

업식 날은 많은 동료 연예인들이 찾아와 “이제 점심 걱정은 덜었구만”하며 축하해 주

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 상기된 표정의 종업원들 틈에서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분이 있었다. 바로 모란각 여의도 분점의 김형덕 사장님이시다. 180cm가 넘는 거

구의 김 사장님은 “음식점에는 이렇게 큰 놈이 버티고 있으면 안되는데…..”하며 구석에

서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큰 체격에 비해 조심스럽고 나긋나긋한 말투, 소주 한 잔만 마시면 빨개지는 얼굴,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몸가짐. 어떻게 이런 분이 과거에 국가대

표 농구선수를 하셨을까. 나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았다. 김 사장님이 불

쑥 나를 찾아온 것은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날 나는 여의도에서 라디오 방송을

녹화하고 늦은 9시가 되어 모란각에 도착했다. 손님 두 분이 기다린다고 해서 가보니

내가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작은 몸집으로 뭔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

었고, 다른 한 분은 엄청난 거구인데 그저 상대방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두 분의 얼굴이 모두 달아올라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쿠! 김용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하시는데 방해가 되진 않았는지……..

– 무슨 말씀을요, 저희가 눈이 빠져라 사장님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어디 앉을까 하다가 몸집이 작은 분의 옆자리를 택했다. 그때까지도 앞에 앉아

계신 거구의 사나이는 사람 좋은 미소만을 흘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김용 씨, 앞에 앉아 계신 분이 내일 모레 여의도에 음식점을 오픈 합니다.

-아, 그러세요. 축하드립니다. 어떤 음식점이죠?

-그게, 아직……. 제가 지금 그 말씀을 드리려고요.

-?……..

-실은, 저는 부동산 중개업자이고 이 분은 원래 국가대표 농구선수를 하셨어요. 선수

생활이 끝나고 이것저것 사업을 하셨는데, 사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산전수전 다

겪으셨습니다.

-아, 예………

-이번에 다시 음식점을 내고 일어서 보려고 하시는데, 제가 좀 확실히 돕고 싶어서

요. 내일모레 음식점이 곱창전골 전문으로 오픈을 할 텐데, 아무래도 곱창 전골로는 성

공할 것 같지 않고……,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한테 말해죠. 일산에

모란각이라는 곳에 가봤냐고. 그런 음식점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죠 형님?

말씀 좀 해보세요!

거구의 사나이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넓은 이마는 솔직함을 드러내고

있고 두툼한 입술은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말을 꺼내기 전 그 분은 시선을

내 눈에 고정시켰다. 맑은 눈빛이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허락해 주신다면 곱창전골 집을 냉면 집으로 바꾸고 싶습

니다. 제가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면 안되거든요.

-그래요. 형님! 이번에는 정말 성공하셔야 돼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요.

생판 모르는 두 사람이 지금 내게 대답을 원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나로선 분점의 위치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여의도는 나 스스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라 직접 투자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습니까. 김용 씨, 저희 형님에게 분점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와아!

두 사람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여의도 분점은 이렇게 싱겁게 탄생했다. 곱창갈

비 전문으로 오픈 3일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김 사장님은 갑작스럽게 인테리어를

바꾸고 모든 내부단장을 새롭게 해야 했다. 개업일에는 일산점의 직원들이 직접 만두

와 순대를 싸들고 원정을 나가야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번갯불에 맞아 충전이라

도 된 듯이 열심히 움직여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통 한 달이 걸리는 분점 오픈이

어떻게 3일 만에 가능했겠는가.

내가 그날 김 사장님의 부탁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

까. 여의도 분점이 오픈하고 한참 후에 김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덥석 분점을 줄 수 있었느냐”고. 마땅한 대답을 찾아보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저 김 사장님에 대한 느낌이

좋았다는 것밖에는.

‘계산하지 말고 인간을 보자’

체인 사업을 결심했을 때 내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고 그대로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이곳 저곳을 재는 짓은 하지 않겠다. 더 중요한

것은 긴 시간을 쌓아 나갈 수 있는 신뢰다.

김 사장님과 나는 같은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남들이 보

기에는 활동적이고 가장 털털할 것 같은 것이 운동선수들이지만, 실제로 우리들은 부

끄럼도 많이 타고 신중하다.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의리 있고, 마

음 씀씀이가 깊은 것이 또 운동선수들이다. 과거에 기업은행 실업팀에서 활약했었고

한국일보 신인 체육상까지 받았다는 김 사장님. 지금은 냉면 집 사장이 되어 제2의 인

생을 살고 있다. 이제 김 사장님과 나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김

사장님이 “매끼마다 꼭 먹으라”며 보약 한재를 안겨주셨다. 육수 냄새가 온 몸에 배어

서 밥맛을 잃은 내게 그 보약은 거짓말처럼 식욕을 자극했다. 지금도 주방장 냉장고

안에 챙겨두고 아침마다 먹고 있다.

여의도 분점이 오픈된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2-3일씩 꼭 그곳에 가서 찾아오는 손님

들을 맞는다. 아직 육수 끓이는 법과 양념장 담그는 법을 전수하지 못해서 날마다 미

니버스에 직접 비슷한 맛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어디서든 똑같은 맛을 제공해야

한다는 나의 고집 때문이다. 여의도 분점의 탄생과 더불어 체인에 대한 점화 문의가

빗발치듯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전화에 일일이 응답할 수 없다. 나는 육수를 끓여

야 하며 방송국에도 나가야 하고 그밖에 지하 카페에 앉아 한가하게 고스톱도 쳐야 한

다. 누구든 나와 얘기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직접 일산 모란각으로 찾아

오는 것이다. 냉면 한 그릇이라도 먹어 본 다음에 나와 얘기하자.

나를 한번 감동시켜봐!

-아니, 저 양반, 또 왔어!

돌려 보내고 또 돌려 보내기를 삼세번. 그는 오늘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모란

각 계산대 옆에 멀거니 서 있다. 깡마른 체격에 키는 또 지나치게 커서 젓가락 한 짝

이 서 잇는 것 같다.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잽싸게 내 뒤를 쫓아온다.

-사장님, 사장님.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제도 그에게 거절의 뜻을 분명

히 했었다.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닐텐데, 오늘 또 오다니. 대단한 열성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확고하다. 그 먼 포항에 분점을 내다니.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

친 짓이다!

-모란각이 아니면 전 아무것도 안됩니다. 모란각이어야만 됩니다!

-이미 끝난 얘깁네다. 포항은 무립네다. 약속드린 대로 시기가 되면 연락 드릴게요.

지금은 안돼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믿어 보세요. 전 젊지만 이미 여러 번 식당을 경영해 봤습니다.

자신있어요!

-사장님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이 김용이가 자신이 없습네다. 생각

해 보세요. 육수는 어떻게 끊이고 또 순대는 어떻게 만들 겁네까?

-제가 다 배우겠습니다. 한 달이 걸리건 두 달이 걸리건 제가 열심히 배울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제도 똑같은 입씨름을 하다가 마침 주방 하수구가 막혔

다길래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댈까. 정말 못 말리는 분이

다! 우선 붐비는 식당을 벗어나 지하 카페로 그 분을 데리고 갔다. 내 사정을 설명하고

포기시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좀, 앉으세요.

-사장님!

-앉으셔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아니, 집을 지어도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하는 법

인데, 지금 어떻게 포항에 분점을 냅니까. 대구에서도, 또 부산에서도 절 찾아왔었지만

전부 거절했어요. 그뿐만이 아닙네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분점을 내겠다고 찾아왔

었어요. 기분이야 좋지만 그게 됩네까?

-사장님, 이건 캐나다가 아니라 포항이에요.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니, 제가 수시로

드나들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니, 사장이 그렇게 가게를 비울 수 있어요? 개업과 동시에 가게에 계속 붙어 있

어야 하는 게 사장이에요. 여기서 육수 끓이는 거 배우는 동안에는 누가 어떻게 육수

를 끓여냅니까. 적당히 이름만 가져가서 흉내만 낼 수는 없어요. 제겐 제 명예가 걸려

있는 문젭네다.

-그럼, 제가 한 달간 배우고 그 후에 오픈 하면 되지 않겠어요? 예?

-어휴, 정말 고집이 대단하십네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이 분 나이가 어떻게 된다더라? 올해

로 겨우 서른하나? 반바지 차림에 하얀 얼굴, 쌍꺼풀까지 진 눈빛 탓인지 그보다 더

젊어 보인다. 처음 나를 찾아와서 불쑥 던진 말이 자기는 장사에 살고 장사에 죽는 사

람이라나? 끈질기다!. 그야말로 장사꾼 기질이다. 안된다. 그래도 안된다. 자꾸 약해지

려는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지금이야 서로 허허 웃으며 좋아할 수 있겠지만 그 뒷

수습은 누가 하랴.

시간이 9시가 넘고 내가 바쁜 듯 가게로 향하자 그분도 돌아섰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란 나의 인사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나도 역시 지지 않고 이렇게 맞받아 쳤다.

-오늘은 여관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꼭 집으로 돌아가세요. 갓난아기 아들도 있다면

서요.

그러나 그분은 그날도 역시 여관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

에게 전화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가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

로 올라온 것이다. 포대기로 등에 아이를 업고서. 다음날, 처음에 남편을 보았을 때 그

저 “아휴, 또 오셨군”이라는 답답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응응응응.

포대기에 업힌 아이를 달래고 있는 어린 엄마. 그 옆에서 큰 키를 움츠린 채 그 촉

촉한 큰 눈으로 아내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남편.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한 잔의 빛바랜 사진 같은 장면. 오래 전에 찍은 흑백영화를 보는

느낌, 아니, 그 옛날 우는 나를 어르고 있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만남 느낌.

이 가족이라면 모란각이 분에 겹다. 이 아름다운 가족이라면 불가능이 없을 것이다.

그토록 여러 번 이 사나이를 거부했건만, 나의 고집은 갓난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무너졌다. 이 위대한 어머니가 나서겠다는 데, 세상의 무엇이 그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포항점은 8월의 무더위속에 문을 열었다. 역시 지방 분점을 탄생시킨다는 것

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찾아가보니 간판이며 화환이 전혀 모란각의 것이 아

니었다. 간판과 포스터 등을 일산점과 동일한 모양으로 포항의 한 간판가게에 주문했

는데 영 딴판의 것이 배달된 것이다. 덕분에 수수하면서도 세련되어야 할 모란각의 분

위기가 터무니없이 구겨져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육수를 끓이

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칼을 외 갈지 않았냐, 간장은 ××간장을 준비해야지 왜 진간장

밖에 없는냐, 만두 속이 이렇게 부실해서 맛이 있겠느냐, 싫은 소리를 마구 해댔다. 한

참을 그러고 나니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 숙소로 들어가 누워야 했다. 결국 내 화에 내

가 당한 꼴이었다. 포항점 사장님은 숙소로 찾아와 끙끙거리는 내 머리 위에서 “하나

씩 고쳐 나가겠다.”고, 흔들림 없이 말했다.

육수는 귀순자 후배인 북한 요리사 출신 명남이를 내려보냈다. “자리 잡을 때까지

네가 옆에서 돌봐 줄 수 있겠냐”는 내 부탁에 명남이는 선선히 포항으로 내려갔다. 그

녀석이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육수 맛이 일

산 본점 맛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있으니, 어쩌면 명남이는 한동안 포항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포항 모란각은 하루가 다르게 포항의 명물로 자리를 잡

아가고 있다. 터미널 가까운 편리한 위치, 또 포항 MBC도 바로 옆에 있어서 방송국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어렵게 낳은 자식이니 만큼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

포항점 사장님의 갓난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면, 우리 모란각도 부쩍 커 있

을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

너털 웃음의 사나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 너털웃음의 사나이. 내게 ‘체인’이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쳐 준

분.

-저, 죄송합니다만, 던 그 체인점이라는 게 도통 뭔지…….

-예?

-아니, 전, 손님께서 왜 냉면 집에 와서 체인을 찾으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데…….

-잉?

-체인이라면 굵직한 쇠사슬 아닙네까. 그걸 왜 여기서 찾으시는지, 전 정말 모르겠습

네다.

-……푸, 푸하하하하하!

그 후로 벌써 두 달이 흘렀고 그동안 여의도와 포항에 분점이 생겼다. 인천과 분당

에도 분점을 하자는 제의가 와 있는 상태이고 부산과 대구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

를 설명하느라 입이 다 아플 지경이다. 이렇게 열심히 분점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날

나를 찾아와 내게 처음 ‘체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던 그 분은 왜 연락이

없는 것일까. 가끔씩 모란각 분점 사업의 뿌리가 그 분에게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분이 몹시도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명함도 받아두지 않았었고, 어쩔 수 없이

그 분이 다시 찾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체인 사업이 무엇인지 직접 알아보세

요”라고 말한 후 벌써 두달이 지났으니. 그 분은 내게 꽤 많은 시간을 준 것이다. 그러

던 어느 날, 여의도 분점에서 일을 마친 후 일산으로 돌아오자 그 너털웃음의 사나이

가 계산대 앞 테이블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이제서야 오셨어요?

-김용 사장님, 절 기억하세요?

-아이구, 기억하다 뿐입네까? 제가 선생님 오시길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덕분에 여의도 하고 포항에 분점을 냈습니다. 냉면 장사가 아주 잘되고 있

어요. 다 선생님이 미리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아니, 무슨 말씀을. 전 그저 체인을 내 달라고 한 번 찾아뵀을 뿐인데…….

-바로 그겁네다. 선생님 말씀이 아니었다면 전 체인이 뭔줄도 모르고, 분점 낼 생각

은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네다. 너털웃음의 사나이는 오히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요…….”하며 겸손해 했다. 때로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코

던진 말이 남에게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너털웃음의 사나이가 무심코 던진 돌이 내겐

다이아몬드였던 것이다.

-그래, 저희 모란각 분점을 내보시려고요?

-생각은 있는데……. 때를 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 회장님 뜻이 있으시니까요.

-회장님이라면…….

나를 찾아온 이 너털웃음의 사나이는, 한 달 후 상계 분점의 대표가 된 김두응 사장.

김 사장에겐 위로 긴 턱수염을 기른 멋진 용모의 형님이 있고 아래로 젊고 핸섬한 동

생이 있다. 그리고 이 삼형제에겐 절대 복종해야 하는 회장님이 계시니, 바로 삼형제의

아버지였다. 회장님은 맨손으로 큰 사업체를 일궤낸 분이라 하신다. 그리고 지금은 큰

형님이 그 사업을 돕고 있으며 둘째인 김두응 사장 역시 형님을 돕고 있다. 이렇게 부

자가 일궈낸 사업체는 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내노라 하는 저작권 에이전시다. 부모에

대한 효, 자식에 대한 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일까. 이 회사는 열악한 출판 현시에도

불구하고 매우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린 아버지가 한 마디 하시면, 필승, 충성을 외치면서 따라야 해요, 아버지는 하늘

이거든요.

결국 모든 결정은 회장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김 사장님은 모란각을 요모조

모 관찰하여 회장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모란각이

관찰을 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냥, 저랑 가끔 술 한잔씩 하시면서 친해집시다. 그러다 때가 되면 체인을 꼭 내주

시는 겁니다. 그러깁니다!

-아, 물론이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께라면 꼭 분점을 드리겠습니다.

역시 출판계에서 일하는 분이라 서인지 내가 몇 년 전 출간했던 <머리를 빠는 남자 >와 <빨래하는 남자>를 모두 읽어보았다고 한다.

-참 재미 있게 읽었어요. 다음 후편은 언제 나오지요? 허허.

또 다시 너털웃음을 짓는 김 사장님에게 나 역시 큰 소리로 “지금 열심히 쓰고 있어

요!”하며 웃었다. 오랜만에 좋은 술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인연이 닿을 모양인지 모란

각 단골 손님이신 한 실향민 어른신께서 김 사장의 부친을 잘 안다고 하셨다.

-그 양반, 정말 사람이 좋은 분이시지. 법 없이도 살 분이야. 용이 니가 누군가와 동

업을 한다며 바로 그런 사람이랑 해야 돼. 자식 교육도 얼마나 잘 시켰는지 아들 세

명이 모두 예의바르고 의젓하지. 몇 주 후, 김 사장은 “드디어 회장님께서 허락하셨다”

며 나에게 달려 왔다.

-이제 됐어요. 회장님께서 모란각은 정직하고 따뜻한 기업이라며 잘 해보라고 하셨

어요.

-아니, 여기 와본 적도 없으신데……. 어떻게 그렇게 좋게 생각해 주실 수가……?

-김용 씨를 보면 다 안다고 하시던데요? “그 사람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어도 같

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사람 같으니 잘 사귀어 보라”하셨어요. 완전히 허락하신 거죠.

상계점 탄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계 전철역 부근 대로변에 녹색의 모란각 간

판이 큼지막하게 빛난다. 터가 좋은 만큼 손님도 많다. 상계점 오픈 이후로 김 사장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빠졌다. 출판일을 거들랴 회장님 돌보랴, 거기도 모란각

까지 경영하고 있으니 김용에 맞먹는 ‘지독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김

사장은 절대로 사람을 기다리게 한 적이 없으며 시간 약속도 깔끔하게 엄수한다. 나처

럼 한 시간 두 시간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분점 사장단 회의에도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 게다가 고스톱을 해봤더니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김 사장은 여로 모로 내게 굉장한 자극이 되는 존재다. 혹시

상계점이 일산 모란각 분점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면 어쩌나. 나는 괜한 걱정을 해본

다. 하지만 걱정하는 만큼 나도 김 사장 못지 않게0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나를 채찍

질 해보는 것이다.

고스톱 예찬

이 책을 꼼꼼하게 읽은 분이라면, 이곳 저곳에서 고스톱을 무척 좋아하는 놈이란 사

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고스톱을 좋아한다. 그것도 무척이나. 잠을자고 밥

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고스톱은 친다. 육수를 끓이다가 잠시 눈 붙일 시간이 있으면,

나는 단고기집 아래 지하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잠을 자는가. 천

만의 말씀이다. 그곳에 내려가면 작은 이불보와 화투가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이미 모

란각 식구들이 웅성웅성 모여 판을 벌이고 있다. 주차장을 관리해 주는 귀순자 이영우

형님, 경철이, 남한에서 사귄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유연호 사장-지금은 전혀 사장이 아

니지만-, 나의 매니저 상민이, 냉장고 사장님까지. 내가 끼여들 틈이 있을까?

우선 판을 들여다보며 어쩌고 저쩌고 한 마디씩 거들면서 내 존재를 알린다. 그래도

사람들이 무시하면 고스톱을 하느라 정신 없는 사람 한 명에게 막 말을 시킨다.

-야, 연호야. 어제 김 마담한테 전화 왔었는데. 통화했어?

화투를 손에 쥔 채 나를 실눈으로 째려보는 유연호.

-말 시키지 마.

살벌한 고스톱 현장에서 누군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내게 앉을 자리를 권한다.

-용이 형, 저 의자에 앉아.

서서 알짱거리는 것이 귀찮다는 말투다. 이쯤 되면 다른 수가 없다. 주머니에서 천원

짜리를 한움큼 꺼내서 사람들 눈앞에 흔드는 것이다.

-나도 껴줘라. 나 오늘 돈 많아.

그제야 누군가의 눈치를 받은 누군가가 자리를 떨고 일어선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

터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고스톱을 하겠다고 덤볐고, 이미 돈을 다 읽고서도 나중에

주겠다며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허, 참. 오늘 끗발 되게 안 서네.

모란각 지하 카페의 고스톱 현장은 인간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살벌한 곳이다.

한치의 양보가 없으며 예의도 없고 위 아래도 없다. 물론 누군가 이에 대해 비난받아

야 한다면, 그런 바로 나 자신이다. 모란각에 이 공산당식 고스톱을 전파한 사람은 바

로 나, 김용이기 때문이다. 착하기만 한 경철이도, 유 사장도, 영우 형님까지도 원래 고

스톱을 잘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모란각 생활을 시작한 몇 달만에

다들 이렇게 고스톱 귀신이 된 것이다.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귀신들이다. 다만 내

매니저 상민이 만큼은 원래 나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고스톱 전문가였다. 유쾌한 스튜

디오, 남과 북 시절부터 내 뒤를 돌봐줬던 상민이는 김 형사와 홍 형사에게 배운 나의

어설픈 고스톱을 단숨에 케이오 시켰다.

-형, 그것도 고스톱이라고 치시오? 어여 가서 돈 좀 더 갖고 오랑께.

전라도 해남 출신의 상민이는 과거에 유도를 해서 집채만한 몸집이 꼭 나의 세 배

다. 평소에 순한 놈이 고스톱만 하면 나와 똑같은 공산당이 되어 버린다. 아니 상민이

말로는 자신이 ‘민주화 투사’라고 한다.

-공산당은 무신? 꿋꿋이 민주화로 버티겠어!

공산당 고스톱이란 어감 그대로 질 줄은 모르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어거지식 고스

톱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저기 지뢰밭과 땅굴을 파놓고 상

대편이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이른바 우리끼리의 ‘월약’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부 사람

이 잘 모르고 뛰어들었다간 큰코다친다. 결국 민주화로 버티던 상민이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경철이, 영우 형님, 그리고 내가 합세하여 덤비자 상민이는 꼼짝을 못했다. 모

란각에 들어온 후 상민이가 우리 세 사람에게 뜯긴 돈만 아마 20∼30만원이 넘을 것이

다. 처음엔 나를 가르쳤던 상민이가 이제는 오히려 나에게 구박을 받는 신세가 된 것

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영우 형님은 지금도 유 사장에게서 받을 돈이 한 10만원쯤

있는 듯하다. 나 역시 분명히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돈을 줘야 하

는 입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도통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마치 우리 모란각 가족들이 거대한 사기꾼 도박단인 것 같다. 하지만 이토록

살벌한 도박단이 반드시 모란각 지붕 아래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휴시

과여유, 모란각 가족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육수를 끓이다 보면 어깨는 물론 전신

이 걸리고 쓰러질 것만 같다 .그렇게 아프다가도 ‘고스톱’이란 말만 들으면 신이나서

일어서는 것이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경철이도 영우 형님도, 상민이, 유사장 까지,

모두들 모란각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가. 고스톱이 없었다면 모두들 우울증에 걸리

거나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한 판의 고스톱으로 욕도 하고 고함도 지르다 보면 스트

레스가 저절로 풀린다. 언젠가 지배인님이 작업 중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주를 마신

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뜨거운 육수 국물을 식히고 냉면을 삶고 한편에선 만두와

순대가 끓고 있는 모란각 주방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20여평 남짓한 주방에서 서른 명

의 식구들이 북적거리며 숨 쉴 틈 없이 일을 하니 저녁 일곱 여덟시쯤 되면 다들 녹초

가 된다. 이때 지배인님이 모란각의 분홍색 물컵에 소주를 콸콸 부어서 식구들에게 돌

리는 것이다. 한잔씩 꿀꺽꿀꺽 들이킨 후에야 모든 육체적 고통을 잊어 버리고 다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다. 주방 식구들이 소주로 고통을 잊듯이, 주방 밖의 모란각 가족

들은 고스톱으로 시름을 잊는다.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빠져 나갈 틈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대기업 총수들이 매주 골프를 하듯이, 샐러리맨들이 금요일 저녁마다 동료들

과 실컷 맥주를 마시듯이, 대학생들이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나이트 클럽에서 몸을

풀 듯이, 그렇게 고스톱은 모란각 식구들에게 고마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고스톱 현

장의 살벌함은 반경 채 5미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 카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

는 다시 형님과 아우를 찾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본연의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다. 만약 그날 고스톱 판에서 누군가 크게 돈을 땄다면, 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돈을 다시 모란각 가족들에게 돌려준다. 어느새 가족들의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씩이

들려 있는 식이다. “이게 웬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물으면 그날 끗발이 좋았던 영우 형

님이 어느새 한턱 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스톱에서 돈을 잃고 버는 것에

무감각하다. 내 돈이 우리 돈이고 우리 돈이 내 돈이니까. 백원짜리 동전 하나로 언성

을 높이고 싸운 것이 5분 전인데 일단 고스톱이 끝나면 그걸로 모두 잘된 일이다. 그

래서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고스톱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것.

요즘 들어 나의 즐거움은 동생들의 고스톱 자금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끔 육수를 끓

이고 있는 내 옆으로 경철이가 고개를 빠끔 내밀 때가 있다.

-형, 돈 떨어져서 왔어요.

-어, 그래?

나는 즉시 주머니를 뒤적여서 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건네준다.

-잃지 말고 꼭 따야 한다.

-아, 그럼요. 내가 따면 두배로 드리갔어요.

경철이는 또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사라진다. 요즘은 분점 사장님들까지 가세하여

모란각 도박단의 규모는 제법 커졌다. 모두들 일년에 한두 번 명절 때만 고스톱을 치

던 순진한 분들이었는데 나 때문에 다들 고스톱 귀신이 되어 버렸다. 여의도 사장님,

상계점 사장님 등은 이제 우리 고스톱 판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이토록 고스

톱을 좋아하는 김용이지만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첫째, 절대로 모르는 사람과 고스톱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윌

식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말도 안되는 말들을 씨부렁거리며, 백원짜리 동전을 두고 내

거다 니거다 다퉈가면서, 그렇게 아옹다옹 고스톱을 치고 싶을 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돈을 따겠다고 옆에 끼여드는 것은 사양한다.

둘째, 고스톱을 치다 보면 상대편의 성격을 죄다 알게 된다.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

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사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가

된다. 결코 겉으로는 드러낸 적은 없지만, 나는 고스톱을 하면서 앞으로 이 사람을 어

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정리한다. 어디까지 잘 해줘야 하고, 어디까지 경

계해야 할 사람인지, 또 그 사람의 이런 부분은 미덥지만 저런 부분은 허풍이 좀 있다

든지,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을 정확히 그을 수 있다. 나는 이 선들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다. 결코 남들에게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인 것 같아” 하는 식으로 얘기해 본 적은 없

다. 그 선들은 김용이란 사람이 자기 관점에서 그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까

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스톱은 내 인생의 오락이며 철학이다. 앞으로 내가 결

혼을 하더라도 식구들이 고스톱을 하고 있는 한, 집에 일찍 들어갈 생각은 없다. 고스

톱 때문에 집에 좀 늦게 들어가고 한달에 일, 이십만원씩 돈을 날린다 해도 내 마누라

는 절대로 잔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그래야 나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

문이다.

도박단 사건?

내가 처음으로 화투를 본 것은 대여섯 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형님과 누나가 막내인

나만 따돌리고 이불 앞에서 뭔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보니 엄마와 할머니

까지 합세하여 흥분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등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다.

-오마니……배고프다. 지금 뭐하나? 나도 끼워주라.

-용이 너는 저만치 가 있으라. 어린 놈이 뭘 아나.

형님이 핀잔을 준다. 씨. 나보다 겨우 일곱 살 많으며서…….

도대체 가족들이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들여다보니 그저 빨간 색 딱지가 이불 위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뭔데 다들 이렇게 난리지? 화투라는 단어에 익숙

해진 것은 그 후로도 한참 뒤였다. 형님과 누님,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비

웠을 때 몰래 화투를 쳤다. 그리곤 구경하는 나에게 “아바이한테 절대 말하면 안된다”

며 신신당부를 했다. 한 번을 네 가족이 나만 따돌리고 또 한 번 화투에 골몰하고 있

었다. 갑자기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벌컥 열렸다. 안방에서 화투 중이던 네

식구는 화들짝 놀라면서 이불을 화투째로 들고 얼른 장롱 안에 감췄다.

-뭣들 했는데 이리 놀라나?

아버지도 낌새가 이상했나 보다. 오마니는 “당신 피곤하시죠. 오늘 날씨가 왜 이리

더워요?”하며 딴청을 피웠다. 한참 후, 나는 발을 씻고 시원한 자세로 누워 있는 아버

지에게 쓱쓱 다가갔다.

-아바이, 아까 오마니랑 형님이랑 뭐했는지 나는 안다.

-오, 그래? 둘이 뭐하든?

-할머니랑 누나도 같이 했다. 나만 빼놓고, 빨간 딱지 만지고 놀았다.

-오호! 이것들이 화투를 했구만.

아버지는 입가에 씩 하고 미소를 띄웠다. 뭔가 큰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용아, 너…….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양복 바지 안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내게 1원짜리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내게 1원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에 오마니랑 형님이랑 또 화투하면 나한테 말해라. 알간.

-예.

아버지는 내 짱구머리를 싹싹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 북한 사회는 화투를 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 딸은 물론 아내와 할머니도 화투를 못

하도록 단속했다. 하지만 당신 눈에 띄지 않는다면 몰래 눈감아 주시는 편이었다. 당신

의 어머니가 그토록 화투를 좋아 하셨으니. 물론 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화투는 인민들의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초상집에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는 모습이

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는 화투가 일본문화의 잔재이며 또 노름성 성격이

짙다는 이유로 완전히 금시했다. 화투를 만들어 내던 공장도 폐쇄시켰다. 화투가 생산

되지 않으니 화투를 하던 인구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향수는 남

아, 어떤 사람들은 딱딱한 종이위에 아예 그림을 그려서 화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희귀한 화투가 어떻게 우리 집에 굴러 들어오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형님

과 누나는 화투를 금덩어리 다루듯이 소중히 여겼다. 한쪽 귀퉁이가 부러지거나 뜨거

운 방바닥에 녹아 흐물거리면 서로를 탓하며 싸우곤 했다. 한 번을 형님이 어떻게 잘

못해서 화투 한 짝을 잃어 버렸다. 누나는 버럭 화를 내며 물어내라고 호통을 쳤다. 형

님이 나 모르겠다며 집을 나가 버리자 누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한 참을 그렇게 펑펑

운 후에, 누나는 마분지와 물감을 준비하더니 잃어 버린 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그

림이 어찌나 실물과 똑같던지, 일하고 있던 어머니, 옆방에서 쉬고 있던 할머니까지 몰

려들어 감탄을 했다.

-아유, 어찌 그리 똑같게 그렸나. 꼭 사진 박은 것 같다.

늦게 들어온 형님도 그림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리곤 누나와 이러쿵 저러쿵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이불을 가운데 두고 한판을벌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화투

싸움은 칼로 물베기였다.

형님과 내가 속도빙상 선수생활로 집을 떠나면서부터 화투는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

혀져 갔다. 대신 선수단에서는 주폐라고 불리는 트럼프 놀이가 유행했다. 돈을 건다거

나 카드를 만진다는 점에서는 화투랑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단지 주폐가 일본이 아닌 중

국에서 들어온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 없이 북한 사회에 확산됐다. 아마 지금도

주폐는 북한 사회 최고의 심심풀이 오락일 것이라 생각된다. 스케이트 선수단은 나이

에 따라 나이 많은 선수들은 1조, 나이 어린 선수들은 2조로 방을 나눠 썼다. 가끔 심

부름이나 볼일이 있어 형님들 방문을 열면 열댓 명이 빙 둘러앉아 트럼프 놀이에 정신

이 팔려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의 형님도 있었다. 형님은 1조 선수들 중에서 제일 키

도 컸고 용모도 준수했다. 나의 형님은 트럼프 놀이에서도 지는 법이 없었다. 뭘하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형님이 국가대표 속도빙상 선수생활을 거친

후 지도원(감독)으로 직행했을 때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풍이 형님은 스케이트 실

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실력도 뛰어났다. 국가대표 선수단에서는 ‘김풍 사

단’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형님을 따르는 선수들이 많았다. 이들은 형님의 말이라면

메주로 죽을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형님이 선수들에게 독재적으로

대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아침 6시면 기상해야 하는 선수촌. 기상

나팔이 합숙소를 뒤흔들기 5분 전, 형님은 먼저 선수들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나직이 속삭이면서 창문을 두들겼다.

-기상. 기상. 기상.

훈련에 지쳐 곤히 잠든 선수들은 그런 작은 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형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기만 하다.

-기상. 기상. 기상.

이렇게 한참을 두드리고 있으면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부시시 눈을 뜬다.

창문 밖의 김풍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형님과 똑같은 키로 목소리를 낮추고 다른 동료들을 깨운다. 시끄러운 기상나

팔은 선수들의 아침을 망친다고 늘 형님은 말했다. 선수들을 그렇게 아침부터 놀라게

하면 훈련이 제대로 되겠냐고 불평했다. 그래도 시정이 되지 않자 스스로 직접 새벽에

일어나 기상나팔이 불기 전에 선수들을 깨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내게 형님은 산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홉 살 철부지를 체육구락부에 집어넣은 사람도 형

님이었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 형님은 혁명화-잘못에 대한 징계로 내리는 강제노동-

까지 무릅쓰고 나를 2·8체육단에 보내려고 애썼다. 나의 스케이트 실력을 확신한 형

님은 어린 동생을 도체육단이 아닌 평야의 중아 체육단으로 보내려고 물밑교섭을 벌이

다 발각됐던 것이다. “동생은 어디 있냐”며 다그치는 자강도 체육단에게 형님은 “모른

다”고 잡아뗐다. 그 대가로 형님은 체육단에서 보일러를 떼는 신세로 전락했다. 강제노

동은 내가 결국 백기를 들고 자강도체육단으로 돌아올 때까지 2주 동안 계속됐다. 얼

굴과 옷에 연탄을 잔뜩 묻히고 보일러실에서 비실비실 걸어 나오는 형님.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형님은 그저 “용이 왔냐?”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그토록 강

인하고 굳세기만 한 나의 형님이 꼭 한번 내게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형님은 애지중지 훈련시킨 스케이트 대표 팀 선수 7명과 함

께 러시아 공동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날짜를 받아둔 상황에서 갑자기 형님에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 할 수없이 7명의 선수를 먼저 러시아로 보내기로 했다. 공항에서

선수들 한 명과 악수를 나누고 “곧 따라갈테니 먼저 가 있어라” 하며 배웅한 직후였다.

선수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는 듯하더니 곧바로 땅으로 곧두박질쳤다. 연쇄적

인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색이 된 형님은 추락한 비행기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사람들이 가로막았지만 형님은 기어이 불꽃에 휩싸인 비행기의 문

고리를 뜯어내고 내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미 아무 소용

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형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더욱 야

위고 말수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낸 선수들을 하루 아침에 잃어

버렸으니, 그 고통이 오죽할까. 심지어 형님은 대표팀 책임지도원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당은 여전히 형님을 원했다. “김풍만큼 훌륭한 지도원을 어디서 찾으란

말이냐”며 간곡히 남아주길 간청했다. 특히 남아 있는 스케이트 선수들이 김풍 감독이

돌아오기만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형님은 자신을 추스리고 책임지도원으로 돌아

갔다. 남아 있는 어린 선수들을 먹이고 훈련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고스톱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모란각 지하 카페에서 가족들과 고

스톱을 하다 보면 갑자기 여기가 거대 사기 도박의 현장이라면 어떨까란 상상에 빠질

때가 있다. 말이 거칠어지고, 언성이 높아지고, 자욱한 담배연기가 어두컴컴한 카페를

뒤덮고, 기침이 나올 정도로 공기가 탁해졌을 때, “바로 이곳이 도박단의 현장이었어!”

란 농담도 나올 법도 하다. 바로 나의 형님이 북한 최대의 사기 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노동소로 끌려갔던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형

님이 어릴 적 화투도 좋아했고 트럼프를 하는 모습도 종종 보며 자랐지만, 결코 사기

도박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음이 분명했다. 90년 여름, 러시아 공동훈련을

마치고 평양 공항에 도착한 형님은 대기하고 있던 안전원들에게 붙들려 수갑이 채워진

채 곧바로 강계로 이송됐다. 그리고 또다시 강계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탄광으로 끌려

갔다. 옷이 벗겨지고 잿빛 죄수복이 입혀지고, 삽과 괭이를 손에 쥔 형님은 지하 수십

미터 탄광 아래로 떨어졌다. 안전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3년 전 형님이 아이스하키

대표선수 지도원 탁구 대표선수 지도원들과 함께 대규모 도박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북한 역시 도박은 단속 대상이고 규제와 처벌방법도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

의 형님은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3년전 대표팀이 모두 어느 도시에서 합숙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호텔 지배인이 제안하여 형님과 동료 지도원들이 함께

트럼프를 한 적이 있었다. 형님이 기억하기로는 호텔측 영업부장, 아이스하키 지도원,

탁구 선수들 몇 명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돈을 걸어야 트럼프가 재미 있다고 누

군가 말하길래 종업원을 시켜 달러를 바꿔오도록 했다고 한다. 체육단 선수들은 대부

분 외국에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주머니 속에 어느 정도의 달러는 갖고 있다. 그렇게

이날 밤을 트럼프로 재미 있게 보낸 후, 형님은 이일에 대해 깡그리 잊어 버리고 몇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형님을 제외한 몇몇이 이날 이후로 계속 달러 돈을 불려가며

트럼프 도박에 재미를 붙여갔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도박판을 늘려가며 회원을 끌

어들이던 이들이 드디어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형님과 함

께 대표 팀을 이끌고 있던 탁구 지도원이 포함돼 있었다. “관련자 이름을 불라”는 안전

원의 심문에 잔뜩 겁먹은 탁구 지도원은 엉겁결에 3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그렇

게 해서 나의 형님이 북한 희대 도박단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껍질이 벗

겨지자 당황한 사람들은 오히려 안전원들이었다. 도박단 리스트에 당원은 물론 고위

공무원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돼 있었던 것이다. 나의 형님만 해도 김정일이 직접 수

여한 국가1급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의외의 이름이 튀어 나오자 당황한 안전원들은

아예 사건의 해결을 김정일에게 부탁했다. 김정일은 도박에 있어서만은 철두철미한 원

칙주의자였다. 안 그래도 도박을 뿌리뽑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김정일은 “지금까지

의 공로는 무시하고 가차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하라”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누나는 평

양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엉엉 울었다. 어떻게 손을 써보려고 애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공산대학 조직비서로 학장을 좌지우지하는 파워풀한

인물인 매부까지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고행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일

반 노동자들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날마다 털어 닭 한 마리를 샀다. 푹 곤

닭을 먹기 좋게 찢어 찬합에 담아들고 탄광 노동소로 향하는 1시간 반의 여정을 재촉

했다. 뜨거운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 놈이 노름으로 탄광촌에 끌려갔다는 주

위의 수군거림도 상관 없이, 그렇게 25일을 한결같이 찾아갔다. 결국 당신이 앓아 눕자

이번엔 형수가 나섰다. 탄광촌에 끌려간 죄수는 가족도 외면하는 법인데, 어머니와 형

수는 아들, 혹은 지아비를 외면하느니 차라리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길을 택했다. 형

과 함께 도박범으로 끌려간 12명의 동료들도 어머니와 형수의 정성에 눈물을 흘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직 김풍 감독의

어머니와 아내만이 그들 옆에 있었다. 평양에서 이 사실을 통보받은 나의 가슴도 찢어

지듯 아팠다. 무슨 짓이든 하지 않으면 평새토록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간부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다. 간혹 당간부에게 돈만갖다 바치면 뭐든지 안되는게 없다는 동무들의 말을 듣

기는 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었다. 당시 내

게는 무역회사 일로 모아둔 달러가 적지 않게 쌓여 있었다. 거기다 친한 동무에게 이

유는 묻지 말고 달러를 빌려 달라고 하여 몇백달러를 더 보탰다. 그렇게 만들어진 돈

을 평소 안면을 알고 지내던 공산당 고위간부에게 건네주었다. 형님 얘기와 어머니 얘

기를 넌지시 건네며……. 그 고위간부는 다음날로 김정일을 찾아가 “벌써 한 달 가까

이 사상개조를 했으니 이제 관대히 봐주자”며 김정일을 설득했다. 그리고 스케이트 대

표 팀을 훌륭히 이끌어 온 김풍 감독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김정일은 그 고

위간부의 얘기를 차분히 들은 후 결정을 내렸다. 원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되 6개월간

혁명화를 시킬 것. 혁명화 후에도 외국 여행은 1년 동안 금지시킬 것. 과연 김정일다운

결단이었다. 나의 형님은 이렇게 다시 대표 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린 선수들

앞에서 6개월 동안 보일러를 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른 대표 팀 감독들이 다 해

외 공동훈련을 떠날 때에도 형님은 묵묵히 북한에 남아 있었다. 91년 가을, 내가 귀순

하기 직전 출장으로 러시아에 있었을 때, 호텔 객실로 형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용아, 이제 러시아 전지훈련 허락이 떨어졌다. 1주일만 기다리면 거서 니 얼굴 볼

수 있갔다.

형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모든 징계가 풀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1주일

을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형님이 선수단을 끌고 러시아로 왔을 때, 나는 이미 귀순자

의 몸으로 남한 땅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형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한 채 6년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

다섯 살배기 꼬마 종업원

오랜만에 연락이 된 한 귀순자 친구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야, 용이 너한테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냐?

-이 자식이, 오랜만에 전화질 해서 무슨 소리야?

-정말이야, 그런 소문이 나돌아서 그래. 누가 모란각에 가서 냉면을 먹었는데, 거기

서 니가 쪼그만 남자 아이를 안고서 “내 아들”하며 엉덩이를 두들기는 걸 봤다던데?

-그래?

그제서야 내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아, 그렇구나, 참, 나한테도 아들이 있었지! 하루

에도 수십번씩 그 아이의 가늘고 작은 몸이 눈에 뛸 때마다 나는 달려가서 “윤상이 요

놈” 하며 녀석을 붙잡는다. 그리곤 달아나려는 그 녀석을 내 무릎에 앉히고 이것 저것

말을 붙여본다.

-너, 아빠 하고 아저씨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이잉, 몰라. 실여 실여.

내 몸을 바둥바둥 빠져 나가려는 그 녀석. 아마도 밖에서 메롱이랑 한바탕 뛰어노는

중인가 보다. 녀석에게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안되지.

그래도 그 녀석의 조그만 얼굴은 너무나도 귀엽다. 북에 두고 온 내 조카 훈이 생각이

절로난다. 그래서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온다.

-내 아들. 이 녀석. 너, 내 아들 맞지?

-실여, 실여! 밖에 나가야 해.

누군가 손님 중에 이 장면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그래서 김용이에게 다 큰 아들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난 것이다. 처음엔 “그런 헛소문이!” 하며 분개했지만,그

소문의 주인공이 윤상이인 것을 깨닫고 보니 화낼 일도 아니다. 윤상이는 정말 내 아

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엿다! 아저씨가 천원 줄게.

-피! 빨간 돈은 실여. 나는 파란게 좋아!

여허! 이 녀석 돈에 있어서만은 다섯 살이 아니다. 모란각 생활 1년만에, 매일 돈 가

방을 들고 다니며 마감하는 지배인 아빠를 따라다니더니 확실히 배운 것이 돈이다. 간

혹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이 귀엽다고 내미는 백원짜리 동전을 쳐다도보지 않는 윤

상이,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그런 돈은 관심 없어!”란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문다.

고 녀석! 나중에 커서 사업하면 꽤 잘할 것 같다.

-파란 돈 안 주면 나 갈래.

꼬마는 내 우악스런 가슴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리곤 밖으로 뛰어나가 모란

각 주변의 호수공원과 어린이 놀이터 등 이곳 저곳을 누비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달려나가는 윤상이의 뒷주머니에 만원짜리 한 장을 찔러넣었다. 윤상이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깔깔 웃는다. 윤상이는 모란각 지배인의 아들이다. 두 부자뿐만이 아니

라 지배인의 아내, 그리고 그 집의 애완견인 메롱이까지, 이렇게 네 식구가 날마다 모

란각으로 출근한다. 일단 출근하면 메롱이는 끈에 매달아 주방 뒤켠에 붙잡아 두고 엄

마 아빠는 곧바로 주방 일에 파묻힌다.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데리고 나왔지만

그렇다고 옆에서 돌봐줄 수는 없는 것이다. 가끔씩 설거지를 멈추고 주방 너머로 아들

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엄마 아빠의 표정은 그만큼 애틋하다. 다행히도 윤상이는 씩씩

하게 자랐다. 올해로 겨우 다섯 살. 밖에서 신나게 뛰어 놀다가도 갑자기 울음이 터지

며 엄마 품이 그리운 나이다. 그런데도 나는 윤상이가 단 한 번도 주방에 들어와 엄마

에게 안아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녀석은 놀이터와 호수공원, 지하

카페와 단고기집, 모란각을 수십번씩 드나들면서 신기하게도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단

고기집 누나와 깔깔거리다가 금새 주차를 관리하는 이영우 형의 품에 안겨 있고, 또

어느새 지하 카페에서 콜라를 홀짝거리기도 한다. 그리곤 호수 공원을 달리고 놀이터

모래밭에서 뒹굴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졸린 눈을 비비며 모란각의 현관에 나

타난 윤상이의 무릎은 오래된 상처들의 딱지와 금방 생긴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뒤범

벅이 돼 있다.

-윤상아, 너 다쳤니?

누군가 걱정하며 그 녀석의 무릎을 들여다보면 윤상이는 얼른 뒷걸음질 친다.

-괜찮아. 안 아파.

그리곤 꼬질꼬질해진 손바닥으로 피를 쓱쓱 문지른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윤상이는 그렇게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낯도 가리질 않는 그 녀석은 모

란각에 있는 몰든 어른들을 친구처럼 생각한다. 경철이에게 “이놈아! 이놈아!”하며 놀

리기도 하고 상민이의 알통에 매달려 “내려줘! 내려쥐!”하며 애원하기도 한다. 칭얼거

리지도 않고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알아서 잘 해내는 윤상이는 모란각의 최고 종업원입

에 분명하다. 그런데 윤상이는 어째서 또래 아이들처럼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것일까.

보통 다섯 살짜리 아이들은 벌써 한글을 읽기도 하고 덧셈 뺄셈쯤은 보통으로 해치울

텐데. 윤상이네 가족이 모란각에 들어오고 한 달쯤 지나서였을까. 지배인 내외는 윤상

이를 유치원에 넣기로 결심했다. 마침 문화유치원이 가까워서 곧바로 등록을 하고 윤

상이를 맡겼다. 그런데 일이 터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친구를 사귀면 괜찮겠지 했는

데. 윤상이는 무려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다. 유치원에는 가기 싫다는 것이

다. 그 이유는 “조그만 애들밖에 없어서 싫다”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모란각에서 큰

어른들과 부딪치며 살아온 윤상이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작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야 할 나이에 어른들 틈에서

자란 윤상이는 오래 전에 아이들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렸다. 3일 동안 꺼이꺼이 울기

만 하는 윤상이를 결국 모란각으로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윤상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신나게 뛰어 놀았다. 하지만 지배인 부부는 앞으로 윤상

이가 어떻게 자랄지 큰 고민에 빠졌다. 결국 언젠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텐데,

그때도 저렇게 울기만 하면 어쩌나,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한글을 척척 읽고 영어도 술

술 말한다는데, 제대로 유아교육을 받지 못한 윤상이가 견딜 수 있을까. 두 부부의 시

름은 잘 날이 없다. 가끔씩 윤상이를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눈빛이 내 가슴을 흔들도

록 슬퍼 보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나는 잠든 윤상이를 껴안고 있는 지배인

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솟은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

면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그날 윤상이는 온종일 뛰어다니며 놀

다가 저녁 9시30분쯤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잠들기 싫어서 눈을 껌벅거리며 모란각

의 이곳 저곳을 헤매던 윤상이가 때마침 주방 밖으로 나와 냉장고 안의 맥주병을 정리

하고 있던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

윤상이는 곧바로 아빠의 푹신푹신한 가슴팍에 안겼다. 두 사람은 곧 모란각 밖의 어

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모란각으로 들어온 지배인의 품속에는 윤상이가 그

천사 같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고이 잠들어 있었다. 아직 손님들이 몇 팀이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아들을 그대로 껴안은 채 손님방으로 올라가는 귀퉁이에 걸

터앉았다. 아빠의 시선은 잠든 아들의 얼굴에 고정돼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빠

의 얼굴은 흐뭇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손님까지 빠져

나가자 아빠는 손님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방석 세 개를 차례로 편 후 그 위에 잠

든 아이를 눕혔다. 따뜻한 아빠의 품을 빼앗긴 윤상이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뒤척이

고 아빠는 아들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들겨 다시 잠으로 빠지게 한다. 아빠는 잠든 아

들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방석을 요 삼아 곤히 잠든 윤상이의 모습은 더욱 작고 추워 보였다. 테이블 위를

청소하던 종업원 아줌마 한 명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주방에서 앞치마 하나를 가져와

윤상이의 몸에 덮어주었다. 잠시 후 일을 마치고 메롱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의 눈은

즉시 아들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리곤 방 한구석에서 앞치마를 덮고 잠들어 있는

아들을 찾아내곤 얼근 달려가 품에 끌어안는다. 윤상이는 그렇게 엄마 품에 안겨서 하

루를 마쳤다. 잠든 아들을 꼭 끌어안고 모란각 문을 나서는 엄마, 그런 아내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안은 아빠. 세 식구의 모습은 그렇게 슬픈 그림이 되어 내 마음을 어지

럽힌다.

시간을 ‘뚝고 먹는’ 사장님

북한에서 ‘시간을 뚝고 먹는다’는 말은 남한말로 ‘땡땡이 깐다’는 뜻과 흡사하다. 인

민학교 때는 감히 시간 뜯고 먹는 일은 없다. 남한의 초등학교 학생들처럼 선생님 말

잘 듣고 학교와 집만 아는 착한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굵어지면 슬슬 꾀가 나는 법. 고등중학교 에 입학하면서부터 숙제를 안해간다거나 수

업을 빼먹는 요령이 하나씩 둘씩 생기기 시작한다. 나 역시 고등중학교 2학년 때 시간

을 뜯고 먹은 적이 있다. 더운 여름날, 체육단에서 나눠준 간식을 먹지 않고 모아두엇

다가 학교에 가지고 간 날이었다. 동무들은 이 간식을 가지고 아예 학교를 빠져 나가

가자고 나를 꼬드겼다.

-누구 코에 붙인다고 여서 먹어! 강가에 가서 우리끼리 먹자. 응?

의기투합한 우리들은 학교 담을넘어 북천강으로 달려갔다. 옷을 홀랑벗고 물속에 첨

벙 빠졌다. 미역 감다가 지치면 나와서 간식을 먹었다. 간식 먹다 심심하면 다시 미역

을 감았다. 공부고 스케이트고 다 잊어버리고 물과 햇살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때

멀리서 학생들의 무리가 줄을 서서 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이라고 생

각하고 물 속에 있는데 갑자기 처녀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다 나왓!

깜짝 놀란 우리들, 들킨 것도 문제지만 벌거벗은 몸이 더 큰 문제다. 14∼15살의 사

춘기 소년들이 처녀 선생님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게 생겼으니. 하는 수 없이 대충 중

요한 부분만 손으로 가리고 물에서 나왔다. 이미 옷과 신발을 안고 서 있는 선생님. 그

래도 처녀 선생이라 보기가 짠했던지 팬티만 던져주었다. 그날 우리는 맨발에 팬티 차

림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오후반 여학생들이 등교할 때까지 서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

는 순간 배꼽을 잡고 웃어대던 여학생들. 완전히 개코 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어릴 적

땡땡이는 그렇게 형편 없이 끝났지만 다 큰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는 나의 땡땡이에 대해 상민이와 함께 심각하게 토론(의논)했다.

-상민아, 그래도 내가 사장 아니냐.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줘야 하니 치밀하게 계

획 좀 짜주라.

-그러면, 일단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고, 출발 시간과

접속 장소를 정하면…….

-이 녀석. 완전히 간첩들 교신하는 말투로 말하누만.

-실패해선 안되니까. 치밀하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팬티 바람으로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잠자는 것이었

다. 그러다 눈을 뜨게 되면 옆에 있는 상민이나 유 사장과 죽어라 고스톱을 치고 싶었

다. 그러다 배고프면 잠깐밖에나가 바닷바람 쐬면서 회 한접시에 소주 한잔 기울인다

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모란각 가족들이 알면 얼

마나 미안한 일인가. 3백65일 연중 무휴인 모란각인지라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여름

휴가를 챙기지 못했다. 나 역시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드는 유령

같은 생활을 반 년이나 계속해 온 터였다. 말은 안했지만 상민아 역시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난다면 상민이는 적어도 4시에 일어나 내 아파

트로 와야 한다.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가는 나를 데려다 주는 상민이는 3시쯤 되야 잠

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 잠으로 하루를 버텨온 것이다. 대단한 녀석이다.

다음날, 나는 원래대로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상민이가 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우리

는 윙크로써 서로가 같은 음모에 가담한 공범임을 확인했다. 하루치 육수를 다 마련한

후 상민이와 나는 “포항점에 급한 일이 생겨 빨리 가봐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영

우 형님이 “아침에 다 잘돼간다고 포항에서 전화 왔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상

민이의 임기웅변이 나를 앞섰다. “아니, 육수맛이 일산하고 틀리다고 손님들이 항의를

한 대요. 빨리 가서 봐줘야 한다구요.” 영우 형님은 “뭐, 지금 내려간다고 갑자기 육수

맛이 달라지냐. 뭘 그렇게 급하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렷다. 그러다가 “그래 빨리

가봐라” 하며 선선히 물러났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달리는 순간 우리는 “야호!”하며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탈출 성공! 시간 뜯고 먹는데 성공한 것이다. 자동차가 자유로를

탄 순간 유 사장의 핸드폰을 눌렀다. 그때 막 오픈을 앞두고 있는 강남점을 돌아보고

일산으로 돌아오고 있던 유 사장. 핸드폰 소리가 울리자 누구의 전화일까 궁금해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 유 사장.

-지금 빨리 김포공항 1청사로 와라.

-뭐? 김포공…!

뚝. 영문도 모르는 유 사장이 김포공항의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상민이와 나는 이

미 서울발 제주행 비행기표 왕복 3매를 구입 해두고 승리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아, 이 귀신 같은 놈들. 뭐 어쩌자구?

-제주도로 가는 거야. 그냥 가는 거야.

-짐도 없이?

-무슨 짐이 필요하냐. 화투는 챙겨가니 걱정 말아라.

비행기에 오른 후에야 유 사장은 자신을 불러준 나를 고맙게 생각했다. 다음날 약속

이 이중 삼중으로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갑작

스런 여행으로 유 사장의 마음도 상민이와 나의 마음처럼 한껏 들썩거렸다. 드디어 숙

소에 도착. 커튼을 젖히니 제주도 중문 해수욕장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영복을

입고 설치는 여자들, 온몸에 꼼꼼히 오일을 바르는 여자들. 그 주변을 맴도는 젊은 남

자들의 모습이 깨알같이 눈에 잡혔다. 우리는 당장 차례로 뜨거운 물에 싸워를 했다.

그리곤 세사람 모두 팬티 바람이 되어 방바닥에 털썩 앉았다. 가방 속에 고이 모셔온

화투를 꺼낸 것이다.

-고놈, 참 예쁘게도 생겼구만.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심심하셨죠?

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가지고 있는 돈이 숙박비를 제외고 겨우 3∼4만원? 이런, 낭

패다. 하지만 뭐 괜찮다. 따면 되니깐. 잃지 않고 따면, 밖에 나가서 해물탕이고 파전이

고 멋지게 한턱 내야지.

-똥좀 작작 싸라. 더럽다, 더러워.

-이 여편네가 미쳤구만. 오늘 와 이리 내 말을 안 들어?

-형? 이거 배판이지? 그렇지? 둘다 3만원씩 내놔!

그날의 행운아는 상민이였다. 녀석은 우리 두 사람에게서 족히 10만원을 긁어모았다.

주머니가 꽤 두둑해졌다고 생각됐는지 녀석의 두 눈은 자꾸만 창 밖을 향했다. 잘 그

을린 피부에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뛰어 노는 곳.

-임마, 좀만 기다려, 아직 내가 딸 때까지는 못 나가.

-아유, 형! 배고파서 손이 떨린다! 그만하구 나가 놀자!

-야, 그럼 용이하고 나하고 둘이 할테니 너 혼자 나가라.

-무신 소리. 상민아, 형님이 자장면 시켜 줄까?

-이거, 완전히 모란각 지하 카페랑 똑같군. 도대체 누가 여기 오자고 한 거야?

결국 우리가 굶주린 배를 달래며 밖으로 나온 시간은 밤 11시. 해변에는 아리따운

아가씨족들은 다 사라지고, 신혼부부들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벌써 실망해 버린 상

민이는 나이트 클럽에 가자고 난리다. 거기 가면 아가씨들이 있을 거라나? 하지만 30

대 아저씨가 둘이나 있는데 20대의 의견을 따를 리가 없지. 우리는 해변에서 영업 중

인 허름한 포장마차를 찾아냈다. 소라와 고동, 조개등을 시켜 놓고 소주 한잔씩 기울였

다. 여름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우리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경철이 섭섭해하겠다.

-모르게 해야지. 끝가지 모르게 해야 돼.

-영우 형님은 어떻고. 안 그래도 지난번 나이트 클럽도 젊은 사람들끼리만 갔다고

한마디 하시던데.

-야, 영우 형님은 형수님이 날마다 떡 버티고 계신데 어딜 같이 가자 그러냐. 너 형

수님한테 맞고 싶냐?

-그나저나, 윤상이도 불쌍하다. 이 좋은 여름에 엄마 아빠랑 바다 한번 못 가봤으니.

고 녀석 우리가 데려올 것 그랬나?

-그랬다간 시간 뚝고 먹는 거 다 들통났갔지. 사장이 웬 망신이냐. 다들 입 다물어

라.

바닷바람이 향긋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북한에서도 몇 번 이렇게 바닷바람을 마신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옆에는 조카가 재잘거리고 있었고 뒤편에 형님과 형수님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렇게 형제 식구가 모여 바다에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마지막? 꼭 그렇지는 않겠지. 통일이 되면 형님과 내가 조카들을 안고서 이 제

주 바다로 다시 오겠다. “형님 이게 말로만 듣던 남해바다라요. 멋지죠?”라고 자랑스럽

게 말하겠다. 조카의 자그마한 몸을 따듯한 바닷물에 풍덩 던져도 보고, 까르르 웃어대

는 그 녀석의 발가락을 물속에서 간지럽혀도 보겠다.

-용아, 뭐하냐?

-으,응?

-들어가서 한판 더 하자.

-야, 나 돈 다 털렸어.

-형, 내가 꿔줄게. 고스톱 자금쯤은 죽을 때까지 내가 대줄게.

-이런, 녀석. 들어가자!

우린 아침 9시까지 눈에 불을 켜고 고스톱을 친 후 뻗어 버렸다. 오후 2시쯤 눈을 떴

을 때 방안은 온통 담배 냄새와 홀애비 냄새로 진동했다. 재떨이는 꽁초로 수북해져

틈이 없을 정도고 바닥에는 누가 홧김에 던졌는지, 자다가 발로 찼는지 화투가 사방팔

방 널려 있었다.

-야, 일어나자.

두 사람을 흔들어 깨우다 보니 문득 내가 모란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수는 모자라지 않았을까. 손님들하고 무슨 마찰은 없었을까. 내 얼굴 보려고 달려온

친구들은 허탕 치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 경철이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불과 단

하룻밤을 떨어져 있었는데 모란각이 이토록 그립다니.

-빨리 일어나! 돌아가야지.

-야, 좀 자자. 왜 그렇게 서두르냐?

-형. 난 3시간밖에 못 잤어.

눈을 비비며 도로 드러눕는 두 사람의 배 위에 나는 냉장고에 있던 얼음을 한 움큼씩

올렸다.

-앗, 차가! 이게 뭐야!

-날래 이러나라우! 내레 미치갔어! 빨리 모란각에 가야 돼. 우리 식구들 보고 싶어

미치갔다구!

모란각을 떠나올 때보다 더 빨리, 더 긴급하게, 우리는 제주도를 떠났다. 나를 기다리

고 있는 가족들을 볼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후계자

9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모란각의 주방장 모자를

내 동생 경철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여름 내내 방송국은 물론 여의도, 인천, 포

항, 상계, 강남까지 분점을 일일이 쫓아다녔고 더불어 일산으로 돌아와 육수까지 끊여

야 했던 나는 몸이 축날 대로 축나 있었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모란각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하늘이 흔들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어딘가 딱히 아픈 것은 아닌데 갑자

기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식은 땀이 흐르는 걸 보니, 이건 분명히 과로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식한 짓이다. 부지런하다고 칭찬받

을 일도 아니고 성실하다고 인정받을 일도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자신의

건강만큼은 돌보고 일하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무식하게도 그 많은 일을 혼자 다 하

겠다고 거만을 떨었던 것이다. 그건 부지런한 것도 성실한 것도 아닌,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믿는 것이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생들을 사랑하고 친

구들을 신뢰한다고 생각했건만, 실제로 내가 믿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다 하지

않으면 안돼”란 생각이 “내가 최고”란 생각으로 왜곡되었고 어느새 나는 모란각의 독

재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내가 전적으로 일임해 준다면, 나는 물론이고 당사자도 무척 편안하게 일을 할

텐데, 나는 끝까지 내가 한다고 우기면서 한편으론 사람들을 내 옆에 꼼짝 못하게 붙

잡아 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건방졌던 것이다. 경철이는 일찍부터 내 옆에서 육수

끓이는 방법을 배워두었다. 그 녀석은 육수를 끓이는 기술적인 방법뿐만이 아니라 육

수에 대한 나의 애정. 그 마음가짐까지도 그대로 습득하고 있었다. 경철이는 진작부터

혼자서 육수를 끓일 수 있었는데 나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그 녀석을 이

도 저도 못하게 옭아맸던 것이다. 일단 경철이에게 육수를 일임하자 모든 것이 수월해

졌다. 혹시나 염려했던 것처럼 육수 맛이 이상하다며 항의하는 손님도 전혀 없었다. 내

가 육수에서 손을 뗏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경

철이가 가시섞인 농담을 건네다.

-형, 이거 손님들이 항의를 하고 난리야.

-어? 왜? 육수 맛이 이상하대?

-아니, 이거 너무 맛있다고, 이렇게 맛있게 만들면 어쩌냐고 막 항의를 하는데.

그 후로 나는 육수에 대한 걱정 근심을 뚝 끊어 버렸다. 경철이 혼자서도 너무나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철이는 요즘 일산 본점은 물론 여의도, 상계, 강남점의 육수

를 모두 혼자서 끓여댄다. 새벽 2∼3시까지 함께 눈이 벌게지도록 고스톱을 치고도, 새

벽 5시면 어김없이 모란각 주방으로 들어가 육수를 끊이는 경철이의 모습을 볼 수 있

다. 경철이 역시 국가대표 운동선수 출신이라 나처럼 합숙훈련때 주방장 할아버지 옆

에서 요리를 거들곤 했었단다. 그래서인지 북한출신 남자답지 않게 요리하는데 거부감

이 없다. 육수를 책임지기 전에도 영업이 끝난 후 모란각 가족들을 위해 미역국이나

단고기탕(보신탕)을 뚝딱 끓여내곤 해서 종업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곤 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육수를 책임지기 위해 경철이가 학교를 휴학하게 된 것이다. 연세대 체육

교육학과에 재학중이었던 경철이는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다. 어서 빨

리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할 텐데, 또 하나의 기회를 내가 빼앗은 듯해서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쨌든 경철이가 끓이는 육수 맛은 기가 막히다. 내가 직접 육수를

끓일 때는 하루에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젠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이 끓

인 육수를 한 사발씩 들이킨다. 나는 이제 야윈 몸에 살을 찌우고 움푹 패인 볼에 바

람을 집어낼 생각으로 꿈을 부풀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조금은 볼 만한 얼굴

이 되겠지. 반대로 경철이는 점점 입맛을 잃어가는 듯하다. 육수 냄새가 온 몸에 배기

시작했는지 개들이 경철이를 따라다니고 더불어 경철이의 몸이 바짝 야위어 간다. 비

뚤어진 내 성격은 그 녀석에게 따뜻한 말조차 건네지 못한다.

-넌, 왜 그리 비실거리냐. 도대체 밥은 먹고 사는 거야?

버럭 화를 내는 나를 경철이는 특유의 실실거리는 미소로 놀려댄다.

-아니, 형은 거울도 없어? 자기 몰골은 보지도 않고 왜 내 몸매 가지고 시비야?

꿋꿋이 버텨주는 경철이가 정말로 고맙다. 분점 사장님들도 모일 때마다 경철이의 건

강을 걱정하며 그 녀석을 격려한다. 나의 후계자 경철이는 친동생 이상으로 내게 소중

한 존재다. 우리는 피보다 더 진한 육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나는 경철이

에게 조그만 단독주택을 사주었다. 마당에는 은행나무와 대추나무를 심고 해가 들 때

마다 빨래를 빳빳하게 말릴 수 있는 소박한 집이다. 그 녀석이 그 집에서 아내를 맞이

하고 아이들을 낳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언제까지 내 옆에서 예쁘게 살아주길 기도한

다.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리는 것일까.

내 동생 경철이의 집안 살림

경철이의 집에 가끔 놀러가 보면 갖출 것은 다 갖춘 한 따뜻한 가정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수저니 밥상이니 냉장고, TV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내 집에는 아직 없는 에

어컨까지돋 버젓이 놓여 있다. 냉장고에도 반찬 등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다. 넘어온 지

1년여밖에 안된, 총각 귀순자의 집이라고는 상상 조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떤 물건을 사 놓을까 하는 고민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어야만 하는데 이상

하다는 궁금증이 솟구치게 만든다. 남한에 왔을 때 처음 보았을 때 비틀거리던 모습과

는 분위기가 전혀 딴 판이다. 동생은 늘상 “나는 형님과 달라요. 부자예요. 형님은 냉

장고까지도 늘 텅텅 비어있고, 벽시계도 하나 제대로 없지만 내 집에는 없는 게 없잖

아요.”하고 자신있게 자랑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같은 그의 자랑과 포근한

집안 분위기의 이면에는 뒤에서 말없이 경철이의 운명을 새 삶으로 바꿔주고, 가슴에

‘자유와 사랑’일나 글자를 새겨넣어 주며, 오늘에 와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키워주고 계

시는 양아버지 목사님이 계신다. 구로 중앙감리교회 곽전태 감독님(67세)이다. 경철이

가 곽 목사님을 만난 것은 러시아에서였다. 내가 진행하는 KBS 사회교육방송 ‘행운의

남자 김용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삶의 일기처럼 매일 저녁 들으며 남으냐 북이냐 하

는 운명의 갈김길에 놓여 있을 때 바로 구원의 손길로 목사님을 만났다고 한다. 벌목

장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러시아 어느한 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

족한 나의 동생은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럴 때 러

시아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목사님을 만났고 그분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주시고 그

분의 도움으로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내 소중한 동생 전경철 ‘못난이’다. 어쩌면 그렇

게도 못 생겼을까? 남들은 다 잘생기겠다고 애 쓸 때 이 녀석은 낮잠을 잤는지, 아니

면 뒷산에 가서 나무를 했는지? 강계미인 예쁘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지만 이

강계 촌놈 경철이는 강계망신을 지지리도 시키는 몬상에 또 몬상, 못난이다. (하지만

지기 자신은 나보다 자기다 휠씬 잘 생겼다고 우긴다) 이렇게 못 생긴 녀석을 곽 목사

님 내외분은 무엇이 예쁘다고 막내 아들로 삼고 생활에 불편이 있을세라, 사회생활에

조그마한 실수라도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돌봐주시는 걸까. 경철의 아버지, 곽전태 목사

님이 한 마디로 존경스럽고 고맙기만 하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북한에서 탁구 국가대표까지 지내며 17

년간 선수생활을 하던 경철이가 러시아 벌목공을 지원한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에서

TV를 거뜬히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희망자들 중에서 운좋게 러시아로 간

셈이다. 그러나 이 ‘행운아’가 러시아에서 미국영화를 한 번 본 것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려 3개월간 감방생활을 한 것이 탈출을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나에게는 영화

한 편 볼 권리와 자유도 없는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탈출을 꿈꾼들 넓고 넓은 러시아 대륙 허허벌판에서 받아주고 안아줄 사람도 없었고

갈 길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지 곽 목사님을 만나 “한국의 품에

안겨라. 북에서 교육받는 것처럼 한국사회가 모질지않다. 꼭 살아서 돌아와라. 너의 운

명을 하나님과 내가 돌봐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에 힘을 받아 경철이가

한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한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철이는 불안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경철이는 이번에도 엄청난 행운아였다. 양아버지이자 신앙의 아버지인 곽 목사

님과 그 가족들은 기꺼이 모든 것의 길잡이가 되어주셨다. 어렵더라도 학비 걱정말고

공부해라. 이왕 온 바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물심양면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곽

목사님이 주도적으로 만든 ‘전경철 돕기회’의 회원이 40-50명에 이르러 정성껏 지원을

다 한다. 양어머니(이상화 여사)는 김치, 밑반찬, 쌀 뿐 아니라 철 바뀔 때마다 옷까지

챙겨주시고 매년 집 도배까지 해주신단다. 곽 목사님의 아들 3형제 중 미국에 이민간

큰 형님만은 자주 보지 못하지만 둘 째 주환이형, 셋째 민환이형과는 친형제처럼 지낸

다니 얼마나 좋을까? 경철이는 운동선수 출신답게 연세대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가 2학

년까지 다니다가 잠시 휴학하여 나를 돕고 있다. 신학공부를 해보라는 곽 목사님의 권

유를 따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는단다. 통일되고 나면 남북간 스포츠

교류에 앞장서고 싶고 꼭 성공해서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한 평을 요구하자 경철이가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용이 형을 지켜볼 때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이자 산 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 많고 정도 많고

열심히 산다. 만원짜리 청바지만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하다.” 어찌 보면 경철이도 나

와 비슷한 데가 많다. 경철이도 벌써 스물아홉 살이다. 나는 경철이가 좋다.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더욱 좋다.

보디 가드만큼은 걱정 없수다.

97년 2월,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선배의 아파트 복도에서 괴한들에게 피격됐을 때

의 일이다. 갑작스럽게 신문에서 귀순자들의 안전에 대해 떠들어댔다. 남파간첩이 수백

명에 이르는데 귀순자들에 대한 안전대책이 전혀 없으니 큰일 났다는 말들이었다. 지

금까지 전혀 신경쓰지도 않더니 왜 갑자기 걱정을 해주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날마다 걱정하는 기사만 날 뿐, 그 후로도 대책을 간구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

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후 97년 여름,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반복됐다. 뉴스속보에

서 망명한 황장엽을 제거하기 위해 북에서 2인조 간첩을 침투시켰다고 떠들썩하게 보

도했다. 게다가 속보는 “간첩들이 황장엽 제거에 실패할 경우 대신 다른 귀순자들을

해칠 가능성이 짙다”며 겁을 주었다. 며칠 후 안기부가 간첩이 노릴 가능성이 있는 귀

순자들에게 경호원을 붙이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제의가 전

혀 없었으니 아마도 나는 간첩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인물인가 보다. 만약 경호원을

여주겠다는 제의가 왔었다 하더라도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나에겐 휠씬 민첩하고 날

렵한 두 명의 보디가드가 있기 때문이다. 유 사장과 상민이, 내겐 두 사람이면 충분하

다. 두 사람을 내 양옆에 두고 걸아가면 반대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짝

긴장한다. 모두들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겠는데…….”하며 겁먹은 표

정을 짓는다. 1백80가 넘는 훤칠한 키, 태권도, 유도 등으로 단련된 다부진 몸매, 지금

은 관리소홀로 약간 튀어나온 배만 눈감아준다면, 유 사장의 몸집은 완벽에 가깝다. 고

등학교 시절까지 유도로 날렸던 상민이 역시 만만치 않다. 나 같은 놈 세 명을 합치면

그 놈 한 명이 만들어질까, 엄청난 거구지만 그렇다고 결코 둔한 몸은 아니다. 나이트

클럽에서 춤추는 상민이의 허리는 문어처럼 유연하기만 하다. 이런 두 사람이 내 옆에

버티고 있으니, 간첩이든 뭐든 올 테면 와봐라.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으니 두 사람의 경호실력을 테스트 해볼 기회는 없었다. 나는 다만 믿을 뿐이다.

알아서 잘 해주겠지 하고, 그리고 사실은 웬만한 젊은 남자쯤은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나 역시 운동을 꽤 했으니 그 가닥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하지

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유 사장이 나를 위해 몸을 던지며 희생했던 일이다. 그때 우리

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지하 술집을 나왔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

깨동무를 채로 술집의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가 가까워졌을 때,

그때,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불렀던가, 취기에 몸을 흔든다는 것이 그냥 무게 중심을 잃

어버렸던 것이다. 어깨동무를 하고있었으니, 두 사람의 몸이 한 몸처럼 층계 밑으로 떨

어지고 말았따.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술이 번쩍 깬 유 사장이 본능적으로 내 몸 아래

로 몸을 겹친 것이다. 똑같이 층계 밑으로 떨어졌지만 내가 떨어진 곳은 유 사장의 듬

직한 배 위였다. 내 몸은 찰과상 하나 없이 말짱했따. 반면 유 사장은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쳤고 정강이 살이 찢겨져 나갔다. 후에 유사장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돈 벌

놈 살리고 보자”는 생각이었다나? 유 사장, 상민이. 두 사람 역시 평생토록 옆에 두고

싶은 소중한 동무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

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한때 가수 송창식의 매니저로 눈부시게 활약했던 상민이는

누구보다도 꿈이 큰 녀석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결혼실에 1만명 이상의 하객이 찾아

오길 기대하는, 그래서 되도록 많은 사람이 그 녀석의 행복을 증언해 주길 희망하는,

세상을 상대로 도전장을 던진 놈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내겠다고 벌써부터

큰소리를 친다. 녀석읠 당당하고 힘찬 모습에 나는 가끔 눈이 부시다. 유 사장은 조금

씩 조금씩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내게 말은 안했찐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미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기 때문에 붙잡을 면목이 없다. 동갑 친구지만 유 사

장을 “연호야”란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손님과 사장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원에서 귀빈들만 드나든느 고급 일식 집을 경영하고 있었

다. 안기부 반공교육을 받으며 가끔 드나들던 그 일식 집에서 유 사장은 단연 내 눈을

끌었다. 무슨 밥집 사장이 그리도 멋지게 생겼단 말인가. 북한에서 밥집이라면 천한 사

람들이 하는 것인데,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말끔히 면도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

유 사장은 멋쟁이 중의 멋쟁이였다. 우린 단숨에 친구가 되었다. 앞으로 몇 번 언급했

듯이, 전국을 무대로 술을 퍼마시며 인생을 논했다. 유 사장은 내가 사기를 당하고 밤

무대에 서는 것을 지켜봤으며, 유치원 문을 열고 고생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드디

어 모란각을 열었을 때, 도와달라는 나의 부탁에 유 사장은 자신의 가게까지 처분하고

달려와 주었다. 두 사람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잃어 버린 보디 가드를 어디서 구

해야 하나. 이 걱정에 나는 가끔씩 엄살을 떨어본다. 너희 두 사람 없으면 나 죽는다고

우는 소리를 해본다. 그런 나의 엄살이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

시켜 주길 기대하며…….

제4부 아직도 혼자 살아요?

여자 여자 여자

아직도 내가 못다한 얘기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여자에 대한 그리움일 터이다. 서

울 생활 6년이니 낯선 도시에서 독수공방한 지도 꼭 6년이 도니다. 하지만 이불 속이

허전할수록, 옆자리가 썰렁할수록, 나는 더욱더 밖으로 나돌고 애꿎은 동생들과 친구들

만 괴롭히고 있으니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성격 탓이고 팔자 탓이라 자위해 본다. 이

러다 정말로 완전히 총각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내일 모레면 내 나이 마흔이다. 마

흔 되기 전에 내 아이를 두 팔에 안아 볼 수나 있을까.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사실 아

내의 자리 보다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 바로 아이들의 자리다. 초인종르 누르면 “아빠

다!”란 탄성과 함께 우당탕쿵쾅 뛰어나오며 내 가슴을 향해 돌진하는 아이들. 요즘 들

어 부쩍 꼬마들을 보면 가던 걸음을 멈춰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이이를 품에

안고 걸어가는 중년 남자들이 때려주고 싶도록 부럽다. 이런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드디어 철이 든다. 장가갈 때가 왔구나”하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때를 놓쳤다는 생

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아들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을 하려면, 일단 여자를 만나야 한다. 서울 생활 6년동안 여자 한 명 진득하게 사

귀지 못하고 뭐했나교 묻는 분들이 있다. 정말 글너 질문을 받으면 나도 할말이 없다.

나 스스로도 내가 한심하다. 그렇다고 내 주위에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주변에는 남자보다도 항상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여자들은 나를 많

이도 사랑해 주었다. 나이 많은 누나들은 친동생처럼 귀여워해 줬고, 나이 어린 여동생

들은 친오빠같다면 내게 기대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관계 하나도 연애감정으로 발전

한 적이 없으니, 그것도 내 성격 탓이고 운명 탓인가 보다. 남한으로 온 뒤에도 내 주

변엔 여자가 많았다. 방송국 동료들, 연예인 친구들, 이곳 저곳에서 스쳐 지나간 여자

여자들……. 나를 좋아한다며 날마다 공연장으로 찾아오던 팬들. 결혼하자며 날마다 팬

레터를 보내던 여대생들. 왜 그때 나는 이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생각을 못했을까.

순진했던 나는 그들을 그저 고마운 팬들로만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내 팬들은 이제 더 이상 20대 여대생도 아니고 혼기가 꽉찬 직

장 여성들도 아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녕의 아줌마들로 변해 있었다. 나 역시 그 아줌마 팬들이 예전의 아가씨 팬들보다

훨씬 편안하니, 이건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대로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을 생각은 절대로 없다. 나는 곧 한 여자를 만날 것이며 그녀와 죽도

록 사랑하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야 말겠다. 그렇게 번듯한 가정을 이루어야 통일된

후에도 어머니 얼굴을 뵐 면목이 서겠다. 그렇게 죽을 고생해서 오게 된 남한 땅인데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살고 있단면, 어머니는 아마도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이눔! 내가 남한에 와서 대체 한 것이 뭐냐?

그럼 정말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대체 내가 한 것이 뭔가. 맨손으로 모란각을 일

궈 직원 2백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키워낸들, TV에 얼굴을 내밀고 유명인사가 된들,

어머니를 태우고 자유로를 씽씽 달릴 벤 승합차를 마련한들, 그런 것들은 어머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진짜로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싹싹한 며느리와 똘똘한 손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평범히 보아 넘기지 않으려고 한다. 인연의 기회는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서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는 최소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빗

으려고 한다.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릴 것가지야 없겠지만, 헝클어진 머리나 삐죽삐

죽 자란 손톱만큼은 내가 여자 입장으로 생각해 봐도 정이 뚝 떨어진다. 최소한 청결

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한 남자들의 매너를 배

우려고 노력해본다. 정말이지, 뼛속까지 북한 남자일 수밖에 없는 나 김용은 남한 여자

들이 보기에 가부장적이고 뻣뻣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나에게 잘 맞는 여자를 남한

땅에서 찾으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변하는 쪽이 훨씬 더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파이팅!

인연의 시작과 끝

‘인연’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

다. 그냥 그녀를 ‘명자’라는 이름으로 불러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맺어지려고

노력해도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헤어나려고 발버

둥쳐도 끝내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인생의 큰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흔적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명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나는 명자와의 인연을 떠올릴 때면 흐뭇해지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 명자도 똑같은 감정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명자의 감정에 대해

서는 나도 자신이 없다. 결국 그녀는 내게 연락하길 멈췄고 그대로 나를 잊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나를 잊는다는 것은 즉, 자신의 과거를 잊는다는 것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자는 지금 꽤 유명한 CF 모델이 가끔씩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잇는 얼굴을

지하철에서, 신문, 잡지에서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인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서로 연락은 주고 받지 않지만 이렇게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

지 않은가. 내가 처음 명자를 만낫을 때, 그녀는 반쯤 벗은 몸으로 무대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른바 극장식 나이트 클럽. 그곳에서 춤추는 한 무리의 무희들 중 하

나가 바로 명자였다. 유난히 긴 다리, 하얀 피부, 명자는 아름다운 무희들 중에서도 단

연 아름다웠다. 그 날 나는 그렇게 벌거벗고 춤추는 여자들을 처음 보았다. 황홀함은

저편이고, 오히려 나는 여자들의 벗은 몸을 바라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것

이 자본주의 나라 여인들의 현주소구나. 어떻게 태어난 여자들이길래 이 여자들은 남

자들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춰야 하는 것일까. 슬픔에 빠져 있는 나에게 친구녀석은

엉뚱한 주문을 했다.

-용아, 너. 쟤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 한 명 찍어라.

-엉?

-찍어, 누가 니 눈에 제일 예쁘냐?

친구의 주문을 나는 단순하게 누가 제일 예쁘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망설

임 없이 손가락으로 명자를 가리켰다.

-저 아이, 참 곱다. 미인이 많다는 강계에서도 저런 미인은 드물 텐데…….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춤이 끝나고 무희들이 무대에서 사라졌나 싶더니, 어느새 내가 찍었던 그 아이가 우

리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자예요.

그리고 명자는 내 옆에 앉았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명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 시간 있으면 나 좀 만나요. 오빠랑 얘기하고 싶어요.

-잠은 많이 잤냐?

-응, 잘 수 있는 만큼, 많이. 정말이야. 오빠랑 얘기하고 싶어.

나는 여의도 어느 커피숍으로 명자를 불러냈다. 대낮에 만난 명자는 밤무대의 무희도

아니고 술집 여자도 아니었다. 그저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였다.

명자는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휘적거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재빨리 말했다.

-나, 그동안 정말로 인간이 그리웠어. 알죠? 그런 곳은 여자를 사람 취급 하지 않는

데라는 거. 처음 만난 남자도 옆에만 앉으면 제 여자 취급해. 우리도 감정이 있는데.

낯선 손이 몸을 더듬어도 우린 그냥 웃어야 해.

여기까지 말하고서 명자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는 신사적이었어요. 날 만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조용히 얘기만하고. 어젠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오빠랑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면, 그럼 이런 생활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명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이트 클럽의 무희 생활이 2년째 접어들면서, 명자의 심신

은 지칠 대로 지쳤다. 가슴에 쌓인 울분을 제대로 터놓고 말할 상대도 없었으니 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명자의 심정이 내게 그대로 전달됐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다는

생각보다 어린 여동생을 대한느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그녀가 나를 부를는 방식 그대

로, 나는 그녀의 오빠가 되기로 결심했다.

-명자야, 그럼 오빠 말대로 한 번 해볼래?

-응?

-너, 그 정도 외모면 모델도 가능하고 탤런트도 될 수 있는데. 당장 나이트 클럽 그

만두고 연기학원을 다니는 게 어떻갔어?

내 말에 명자가 피식 웃는다.

-오빤, 내가 그런 걸 안 해봤겠어? 다 실패했어요. 그리고 이젠 나이가 너무 들어서

신인 탤런트에도 공모할 수 없어. 먹고 살려면 나이트 클럽밖에는 갈 데가 없어.

명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방송생활이었지만 방송계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곳은 아니다.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미모와 연기력, 말 그대로

‘탤런트’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두고 있는 곳이 바로 방송계다. 나는 명자를

조금 더 설득하고 싶었다.

-명자야, 내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광고계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으니 혹시 사진

이 있으면 오빠한테 한 장 줘라. 니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때 나이트 클럽을 그만두는 거야. 알갔어?

명자는 뭔가 반박할 듯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가방을 뒤적거려 사진 한 장을

내게 건네줬다. 아마도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인 듯했다.

뒤에는 무시무시한 청룡열차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서 명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이었다. 사진작가가 찍은 홍보용 사진이라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사진 속의 명자는 예

쁘기만 하다.

-한 번 해보세요. 하지만 별 반응이 없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어도. 난 이대로도 괜찮

아요.

명자는 별로 기대를 안했겠지만, 나는 적잖은 기대를 했다. 명자의 사진을 가지고 곧

바로 내가 아는 유일한 CF 감독 한 분을 찾아갔다. 그때 나는 막 한 제과회사의 신제

품 껌 모데롤 광고를 찍은 직후였다. 감독님은 내가 갑자기 찾아가자 매우 놀랐지만

명자의 사진을 보여주자 꽤나 꼼꼼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가 스물다서이라서 안될 거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글세……, 이 정도의 마스크람녀 괜찮은데. 스물다섯처럼 그렇게 많이 안 보여. 음

음…….가능성 있는 얼굴이야.

-정말요?

-그래.

내가 너무 기뻐하자 감독님은 나를 슬쩍 노려보았다.

-용이 너. 이 여자 누구야?

-도, 동생이야요.

-참말이야요. 얼굴은 예쁜데 하는 일이 없어서, 한 번 광고 모델이나 탤런트에 도전

해 보라고, 그래서 가져온 거야요.

내가 펄쩍 뛰자 감독님이 나를 붙잡고는 심각하게 얘기했다.

-야, 너 총각이 이렇게 처녀 사진을 들고 다니면 어떡하냐. 이 사진 또 누구한테 보

여줬어?

-아니,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어요. 감독님이 처음이야요.

-다행이군. 야, 너 이렇게 여자 사진 갖고 다니다 기자들 눈에 듸어봐. 당장 소문나.

얼른 나한테 넘겨.

-예?

-내가 갖고 있다가 친구 감독들한테 보여줄게.

감독님은 명자의 사진을 펄렁펄렁 흔들어 보였다.

-안되겠다. 이 사진은 안되고, 좀 잘 찍은 거 없냐. 전신사진하고 얼굴 클로즈업 사

진 한 장하고, 사진작가가 잘 찍은 사진을 구해봐라.

-그럼, 되갔시오?

-아니, 아직 확답을 줄 수 없짐나,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볼게. 그러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겠지.

다음날 아침,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명자에게 당장 연

기학원에 등록하라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사진을 제대로 찍어서 내게 달라고 호통을

쳤다.

-오빠.

-됐어. 괜찮아. 힘들더라도 좀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올 테니까. 알간?

-고마워요.

명자로선느 고생의 시작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잘났다는

어린 후배들 틈에서 다시 연기 수없을 시작한 것이다. 나이트 클럽을 다니며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학원비를 충당하기 시작했다. 학원비가 만만치 않으니, 모아둔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일자리가 나타나야 할 텐데. 경제적인 고생도 고생이지만,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명자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나이트 클럽은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다. 네가 나이트 클럽을 다시 나감녀 그길로 오빠로서의 인연을 끊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

다. 그리곤 어느 날 명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며칠 동안 다시 나이트 클럽에서 일했

다고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빠가 그렇게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잖아?

-오빠,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됐다. 이젠 니 맘대로 해라. 이젠 니 오빠 노릇 그만하겠다.

나는 전화가 부서지도록 딸깍 끊었따.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오온 명자는 제발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애원을 했다.

-오빠, 정말이야. 딱 3일만 나갔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자식들이 마지막 달에

3일을 안 채웠다고 월급을 주지 않잖아. 그래서 월급 받아내려고 할 수 없이 딱 3일만

나갔었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쁜 놈들. 밤의 세계에서 일하는 놈들은 뺏속까지 냉혹하다.

가슴 속에 피 한 방울 흐리지 않는 놈들이다. 3일을 덜 채웠다고 한 달치 월급을 주지

않으려 하다니, 나쁜 놈들. 명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도대체 명자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다. 가슴 한 구석이 쥐가난 듯 저려왔다. 그리고 며

칠 후, 명자는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왔다는 것이다.

-오빠, 나더러 내레이터 모델을 하래!

-내레이터 모델? 그게 뭐냐?

-아이, 오빤, 왜, 사람들 앞에서 회사 신제품 소개해 주는 모델 말이야. 한 번 나가면

30만원 준대. 괜찮지?

-야, 그거 괜찮구나. 축하한다.

나는 좀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하지만 명자는 미스코리아라

도 된 듯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록, 명자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

다. 내가 다시 명자의 얼굴을 본 것은 꼭 반 년 후였다. 어느날 방송국 로비에서 여성

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한 광고에 명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어, 그랬

구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그것을 시작으로 명자의 얼굴은 여기저기서 발견

됐다. 그녀의 얼굴은 신문 사이에 끼어진 광고 전단에도 있었고 백화점 카탈로그에도

있었고, 심지어 TV 광고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했다. 명자가 드디어 해낸 것이

다. 나는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오래간 만에 수첩을 뒤적거려 겨우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번호는 결번이었다. 호출번호도 돌려보았지만 역시 결번이었따.

모델 일을 시작함과 더불어. 명자는 과거와 완전히 이별했던 것이다. 전화번호를 바꾸

고 옛 친구들과의 인연을 끊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녀의 과거를 알

고 있는 나마저도, 명자에겐 짐이 됐을 것이다. 나는 명자의 결다닝 옳았다고 믿는다.

그녀는 훌륭했다. 완벽한 새 삶을 살기 위해, 명자는 자신의 과거의 발자국을 지워야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나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 우연히 우리가 마주쳤을 때, 서로 모른 척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몇 마디 인

사를 나눌 수 있겠지.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그리고

그 인연 이후 이토록 각자 열심히 살고 있으니, 서로에게 한점 부끄러운 것이 없다. 서

로 당당하게 환히 웃어 주기. 바로 이것이 우리 인연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숙제다.

김용은 바람둥이?

나는 서울에 온 이후는 물론 북한에서도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세간에는 내가 지독한 바람둥이란 소문이 나돈다고 하니, 참 어이없는 노릇이다. 도대

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 나게 됐을까. 주위 사람들은 “어차피 연예인에겐 그런 소문쯤

은 있어야 제 맛”이라고 말한다. 스캔들이 없는 연예인은 그만큼 인기도 없다나? 하지

만 모란각을 자주 찾는 어르신들마저 그런 소문을 믿는다면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는가. 이런 헛소문도 모두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내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나의 첫 스캔들은 아마도 내가 노사연 씨를 사랑한다는 신문

기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것도 벌써 한 5년 전의 얘기니. 이제 생각하면 오히려 그

리워질 정도다. 하지만 단시 스캔들의 당사자가 된 노사연 씨에겐 얼마나 미안했는지

방송국에서 얼굴도 들기 못할 정도였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92년 7월 나는 당시 노

사연 씨가 진행하는 ‘김승현 노사연의 100분쇼’에 초대손님을 출연했었다. 그때 처음으

로 노사연 씨를 알게 됐는데 참 마음씨가 곱고 이해심이 넣ㅂ은 여성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곤 곧 노사연 씨의 노래 ‘만남’을 알게 됐다. 무슨 굵직한 실연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 노래가 무턱대고 좋았다. 사랑 타령 없이 멋없게 살다가도 이 노래만

나오면 자꾸 있지도 않은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눈물이 나왔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특히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는 구절에 이르면 어머니가 감상에

젖은 나를 큰소리로 꾸지즌ㄴ 듯하여 화들짝 놀라며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동안

나의 18번은 그렇게 ‘만남’이 되었다. 덩달아 좋아하는 가수도 노사연 씨가 되었다. 그

때 한 스포츠 신문의 기자가 내게 “노사연 씨르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당연하게

“노래가 좋으니 가수도 좋디요”라고 말했는데, 그 기자가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다음날 조간 신문에 ‘귀순가수 김용 노사연 짝사랑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엉뚱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화가 났지만 그보다도 나를 오해할 노사연 씨를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이를 어쩐다. 결혼도 안한 처녀에게 이런 스캔들이 나면 어

떡하나, 나 때문에 노사연 씨의 혼사길이 막히면 어쩌나. 순전히 북한 식의 고민을 하

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결혼하고 싶다는 나의 말을 전해들은 노사연 씨는

“부담스럽다. 결혼은 아직 누구와도 할 생각이 없다”며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는 것이

다. 나는 노사연 씨의 라디오 방송 녹음시간에 맞춰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사과

해야 마음 풀릴까. 조마조마하며 녹음시간 두 시간을 그대로 기다렸던 것 같다. 마침내

녹음이 끝나고 지친 얼굴로 나오는 노사연 씨. 나를 발견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모른

다는 듯 환히 웃는 것이 아닌가.

-저 노사연 씨. 죄송합네다. 사실은…….

-신문 기사 때문에 그러시죠? 괜찮아요. 신문이라는 게 다 그래요.

-?…….

-마음쓰지 마세요. 그런데 하나하나 고민하다 보면 연예인 생활 잘 못해요.

-고, 고맙습네다. 사실 전 노사연 씨가 화가 났을까 봐서…….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용 씨가 그런 말은 했따니, 저도 믿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아는 건 이렇게 좋은 것이다. 노사연 씨는 신문기사를 믿기보

다 평소 자신이 느꼈던 김용이란 사람에 대한 느낌을 믿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

라고 하든 내 생각을 신뢰하기, 신문기사나 TV보도에 유혹당하지 않기. 이것이야말로

연예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내겐 심심치 않

은 스캔들이 일어났지만 워낙 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어서인지 내가 이렇다

변명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한 예로 내가 처음으로 ‘머리를 빠는 남자’

를 출간했을 때다. 나는 이화여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책 출간을 앞두고 내용을

상으하고 문체를 다듬느라 출판사의 여직원들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그때 나는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스스럼없이 그들의 출입을

반겼다. 남자 셋이 살 때였으니 손님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런데 이웃 사람들은 그

렇게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슈퍼마켓에 담배를 사러갔더니 보통 때 이말 저말

곰살맞게 물어보고 “담배 좀 작작 피워!”하며 어머니 같은 말씀도 하시던 슈퍼마켓 아

주머니가 뽀로통 한 것이었다.

-결혼은 안 할 거여?

-아유, 무슨 결혼이요. 아줌마도 잘아시면서 그러세요. 여자들이 절 쳐다나 본답니

까?

-무슨 오리발이여? 집에 젊은 여자들 서너 명이 드나들더구만. 엊그저께도 웬 여자

가 김용 씨 집이 어디냐고 물어봐서 내가 가르쳐 줬는데?

-아유. 그게 다 일 때문에 찾아온 손님이에요.

-일은 무슨? 아니 일할 여자들이 그렇게 예쁘게 화장하고 와?

-아유, 아줌마는! 남한 여자들 다들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던데요? 어디 화장 안하

고 다니는 여자가 있습니까?

한동안 실랑이를 했지만 슈퍼마켓 아줌마는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리곤 분을

삭이시더니 내게 아주 귀한 말을 해주셨다.

-아무리 일이라도 남자 사는 집에 그렇게 여자들이 드나들면 안되는 거여. 알지? 그

리고 김용 씨는 연예인이잖아. 한두명도 아니고 그렇게 자꾸 바귀니까 좋게 생각들 하

겠어? 어제 동네 아주머니들이 김용 씨가 이 여자 저 여자 하고 바람 핀다고 수군거리

잖아. 나도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 듣고 보니 하나하나

가 옳은 말이어 . 그렇지, 나는 연예인이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되는 거싱다.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

도록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게 연예인이다. 후에 동숭동에서 ‘결혼’이란 연극

을 할 때에도 이런 비슷한 스캔들이 생겼었다. 날마다 꽃을 들고 찾아오는 팬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한 번은 커피숍에서 대여섯 명의 여성팬들과 한 시간 정도 얘

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연극이 끝난 뒤여서 시간도 10시가 넘을 정도록 늦은 시간이

었다. 피곤해서 하품은 나오고 팬들은 계속 질문공세를 해대며 나를 놓아주질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만 집에들 들어가셔야죠. 시간이 늦었습네다.”라며 재촉했지만 팬

들은 오히려 호프지벵 가자며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어쨌든 빨리 일어서는 게 상책이

다 싶어서 “그럼 호프집에 갑시다”라며 계산대로 성큼 걸어갔다. 카페의 주인 아저씨가

싱긋 웃으며 “김용 씬 여복이 많아서 좋겠어”라며 놀린다. 역시 내일이면 동숭동 전ㅊ

에 “김용은 바람둥이”란 소문이 쫙 퍼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

오자마자, 여성들이 핸드백을 추스리고 옷매무새를 만지는 동안, 그리고 몇몇은 화장실

에 간 동안,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이곤 냅다 줄행랑을 쳤다.

-그럼, 안영히들 가세요. 저 열심히 할게요. 또 봅시다.

누가 쫓아오는 듯 헐레벌떡 달리는 내 모습. 뒤에선 나를 놓친 여성들이 “김용 씨!”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굽의 신발을 신은 여성들이 스케이트

선수 출신의 나를 무슨 수로 붙잡겠는가. 미안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바람둥이로 만든 최대의 사건은 역시 ‘룸살롱 사건’일 것이다. 노래방과도 나이트 크럽

과도 또다른 별천지인 룸살롱을 처음으로 가 본 것은 93년. 순진한 나를 꼬신 사람은

지금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남한 사람 유연호 사장이었다. 귀순자 선배님들과 이

북5도청의 간사님들에게 한턱 내는 자리였는데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연호는 “룸살롱이 제일 낫다”고 적극 추천했다.

-그게 또 뭐하는 곳인데?

못미덥다고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있는 내게 연호는 “남한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

이라며 “앞으로 사업을 하려면 꼭 알아두어야 하는 곳”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

찬을 했다. 그래서 유 사장을 믿기로 했다. 남한에 온 이상 남들 하는 짓은 다 해보기

로 하지 않았던가. 대충 들어보니 룸살롱은 노래방처럼 노래를 할 수도 있고 더불어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게다가 돈을 내면 ‘파트너’라고 불리는 여자까지 한

명씩 붙여주는데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3-5만원의 팁을 주어야 예의라고 한다. 여자들

이 다들 예쁘고 늘씬하며 노래도 잘 부르는 등 분위기 잡는데는 그만이라고 한다. 과

연 유 사장의 설명은 틀림이 없었다. 덕분에 다소 딱딱할 수있었어던 그 날의 모임이

‘룸살롱’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인지 흥겹게 풀려갔다. 평소에 쑥맥으로만 보였떤

귀순자 선배들이 어찌나 신나게 노시는지 내가 다 뿌듯했다. 아, 저분들에게도 저런 면

이 있었구나 하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야, 너는 왜 파트너가 없냐?

노래만 부르는 줄 알았던 유 사장이 불쑥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녀 묻는다.

-아니, 난 됐어. 그냥 재미 있다.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너만 파트너가 없냐? 마담, 어서 빨리 파트너 한 명

데리고 와!

-아니, 난 됐다니깐.

유 사장의 명령에 마담이 잽싸게 움직였다. 사실 이 순간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좋았지만, 여자를 전혀 모르는 내가 파트너를 어떻

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룸살롱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마담이 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내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예쁘다!”,”용아, 니 파

트너 얼굴 참 좋다!”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영 모르겠다. 그저 그 여자의 키가 꽤 컸으며 허

벅지가 훤히 드러난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ㄴ

데 그 여자가 내 옆에 앉더니 다짜고짜 애교를 떠는 것이 아닌가.

-어머, 김용 씨가 맞구나! 어머, 너무 귀엽게 생겼다!

그러면서 내 허벅지를 마구 더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 왜 이래요?”하며 화들짝

놀라 일어서 도망쳤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어댔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

람들은 틈만 나면 룸살롱 얘기를 들먹이며 나를 놀려댔다. 나에게도 룸살롱은 공포의

장소였다. 그렇게 대가 센 여자들이 있으니, 나 같은 쑥맥은 두려울 수밖에. 하지만 얼

마 후 또 룸살롱에 가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다함께 가야하는 것이라 나 혼자만 빠질

수도 없고, 한참을 고민하는데 유 사장이 좋은 꾀를 생각해 냈다.

-아유, 난 키 큰 여자가 옆에 앉으면 정신을 못차린다구. 당황스러워. 좀 말이 없고

얌전한 여자가 파트너였으면 좋겠는데…….

-그럼 말이지…….

유 사장이 짜잰 꾀는 파트너가 들어온 순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턱을 살짝 만지고,

마음에 들면 코를 만지라는 것.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모든 남자들이 그의 제안을 마

음에 들어했다.

-그래, 참 그렇게 해야겠다. 요즘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도 환불한다는데, 여자들도

그렇게 해야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는 게 옳지.

나는 좀 덜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긴 했지만, 그것도 자본주의 사고방식이

란 걸 조용히 인정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바꿔달라 요구하는

것보다 이렇게 신호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신사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의

사를 전달했더니 마담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세요. 제가 잘 지켜보고 턱을 만지는 분들껜 파트너를 바꿔드릴게요.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 ‘코’와 ‘턱’을 혼동했다는데 있다. 마음에 들면 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인데, 나는 거꾸로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두고 게속 ‘코’를 만졌던 것이다. 한

참 재미 있게 파트너와 얘기를 하려면 갑자기 파트너가 “화장실에 다녀올게요”하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첫 번째 파트너가 돌아오지 않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하지만 두 번째 파트너는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한 10분을 얘기하더니 그냥 나가 버리

는 것이었다. 다음에 들어온 세 번째 파트너 역시 5분을 채 붙어 있지 않았다. 네 번째

파트너는 엄청난 꺽다리 나는 기가 죽어서 계속 턱을 만지며 신호를 보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떠날 생각을 안하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화가 나서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선 김에 마담에게 따졌다.

-아니, 왜 자꾸 파트너를 바꾸세요?

-예?

-마음에 든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자꾸 파트너를 바꾸니까 이거 술을 제대로 못 마

시갔어요!

-김용 씨가 자꾸 코를 만지니까 바꿔드린 거잖아요?

-예?

-맞잖아요? 마음에 들면 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

-아니디요! 마음에 들면 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턱!

-아이구! 생사람 잡지 마세요. 다른 분들은 다들 턱 만지고 일찌감치 파트너를 정했

는데, 김용 씨만 벌써 다섯 명째라구요. 벌써 우리 아이들은 김용 씨한테 단단히 화가

났어요! 바람둥이도 저런 바람둥이가 없다나요?

-예?

-그렇잖아요! 30분 만에 벌써 여자 다섯이 왔다갔다 했으니, 바람둥이가 아니면 누가

그러겠어요?

나는 그제야 내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코를 만지는 바람에 5분 만에 퇴

장해야 했던 그 여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이구! 이거 쥐구멍은 어디 있는

거야? 룸으로 돌아오니 다섯 번째로 들어온 꺽다리 파트너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

유! 난 정말 키 큰 여자는 당황스러운데. 하지만 벌써 다섯 명이나 돌려 보냈으니, 나

는 감히 코를 만질 수가 없었다. 이 여자까지 돌려 보내면 바람둥이 앞에 ‘천하의’ 바

람둥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판이다. 결국 그 꺽다리 파트너를 운명의 상대로 생각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죽음조차 용서 못한 사랑

공원, 영화관, 노래방, 나이트 클럽, 남한 남녀들에겐 데이트할 곳이 참으로 많다. 북

한의 남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배가 아프도록 부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데이트라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고 살고 있으며 부모님과 당이 정해주는 배

필이 천생연분이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남녀관계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사

람 사는 곳에 사랑이 없겠는가. 데이트라는 것은 없지만 ‘산보’라는 것은 있다. 이 산보

에는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뛰어넘은 은밀함이 담겨 잇따. 야밤에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 비밀스럽게 즐기는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보는 십중팔구

부모와 당이 허락하지 않은 금지된 사랑이다. 깊은 밤, 사랑에 빠진 북의 남녀들은 안

전원들의 순찰을 피해 되도록 음침한 곳으로 몸을 피하낟. 안전원의 눈에 띄었다 하면

그 다음날로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공개 자아비판을 해야 하낟. 당의 허

락이 없는 연애는 사상적으로 느슨한 것이며 혁명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다. 그래도 북의 남녀들은 ‘산보’를 감행하니, 그들의 사랑은 오죽이나 깊을 것인가. 간

혹 시린 겨울 아침, 두 구의 시체가 대동강 강물 위로 떠오른다. 아까운 젊은 청춘이

또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남한 같음녀 아직도 이런 순애보가 있을 수 있다니, 그들의

못 이룬 사랑을 서글퍼 할 것이다. 하지만 북은 그렇지 않다. 자살은 국가에 대한 가장

큰 배신행위이기에 두 남녀는 죽어서도 죄인이다. 북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까치 까치

살자’는 말이 유행한다. 길게 말하자면 ‘까치는 까치끼리 살고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살

자’는 속담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놈은 신분은 높은 신분낄, 낮은 신분은 낮은 신분끼

리 짝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사랑에서도 까치와 까마귀의 경계는

명확하다. 우선 권력기관에서 일하는 남자 당원들은 호텔 직원, 외화 상점이나 백화점

의 판매원, 의사나 간호원 등 꽤 인기 있는 직업을 가진 신부감을 택할 수 있다. 만약

이 여자가 당 간부의 딸이라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들이 화교나 공장 노동자, 탄광

노동자의 딸과 결혼하려면 당의 저지를 받는다. 여자 집안의 혁명의식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권력기관에 몸담고 있는 자제들은 연예계의 눈에 띄는 미인들을

신부감으로 택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북한도 얼굴만 예쁘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북한에서 연예인의 지위는 꽤 높다. 이는 예술단이 당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으며 형성됐기 때문이다. 또 영화와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김정일의 기호도 많은

작용을 했다. 따라서 인민 배우 출신의 깜짝 놀랄 미모의 여자가 고위 간부의 자제와

결혼하는 것은 북한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모란봉 예술단의 무용수인

내 어릴 적 친구 동석이가 사랑한 여자는, 공교롭게도 화교였다. 현명한 남자라면 여자

가 화교라는 것을 알게 된 즉시, 마음에서 지워 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동석이는 그러

질 못했다. 그 녀석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잘되길 바라는 나로

서는 그 녀석을 말리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녀석이 사랑하는 여자는 나의 누나가 간부

로 일하는 강계 편집물 공장의 노동자였다. 생긴 것이 참 곱고 한 눈에 봐도 참한 여

자였다. 하지만 ‘화교’라는 신분은 그녀의 집안이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석이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출세는 물론 가난하게 살아야 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내겐 그녀가 있어. 적어도 사랑만은 잃지 않잖아.

그렇게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 동석이는 절실하게 그 여자를 사랑했다.

결국 동석이는 모란봉 예술단에 결혼 허락을 신청했다. 단장 앞에 불려간 동석이는

“왜 꼭 그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단장의 얼굴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사랑, 그게 무시기 소립네까?

하얗게 질린 동석의 얼굴 위로 단장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동무, 정신 있수까?

당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이상 결혼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여자는 이미 동석이를 포

기하고 연락을 뚝 끊었다. 하지만 동석이는 그럴 수 없었다. 어느날 불쑥 휴가를 내어

여자가 있는 강게로 가보겠단다.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한 번은 그녀를 봐야겠어.

그렇게 떠난 동석이는 밤이 늦은 무렵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여자

의 오빠들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여자는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내 마

음이 무척 아팠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까치는 까치끼리 살아야 한다는

당의 원칙이 부당하다고 생각됐다. 이토록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있는데, 당의 원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한기 위해선인데, 사상이

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들의 사랑을 막는가.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강계행 기차를 타고 동석이의 애인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행을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니, 만약 당에서 발각되는 날이면 나 역시도 징계를 피하지 못했

을 것이다. 과연 동석이의 말이 맞았다. 여자는 도무지 만날 수 없었고 집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자니 건장한 남자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여자의 오빠들이었다. 도망가는 내

뒤를 여자의 여동생이 몰래 따라왔다. 그리곤 “언니가 오빠들에게 두들겨 맞고 옷도

빼앗아가 속옷바람으로 갇혀 지내니 어쩌면 좋겠냐”고 울먹이며 말했다. 여동생만큼은

언니의 사랑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즉시 동생 편으로 편지를 써 전했다. 속옷

바람이라도 좋으니 아무 걱정 말고 내일 밤 10시까지 강계역으로 나와달라는 내용이었

다. 다음날, 초조한 마음으로 역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오지 는다는 쪽과 꼭 온다

는 쪽에 반반의 확률을 걸어보았다. 그녀의 마음이야 벌써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달리

고 있겠지만, 시퍼런 눈으로 감시하는 오빠들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더욱이 그렇게 가

족을 등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합친다하더라도, 앞으로 두 사람이 헤쳐나갈 일을 생각

하면 앞에 깜깜해질 것이다. 그녀가 오지 못한다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10시 5분

전, 이제 오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하며 포기할 즈음이었다. 저만치에서 어떤 여자가 정

말 속옷바람에 끌신(슬리퍼)만 신고 정신나간 여자처럼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동석이

의 애인, 화교 처녀가 분명했다. 나는 당장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오

빠들의 감시를 피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속옷바람으로 뛰어온 그녀는 참

으로 용감했다. 평양 역에 도착하자 그녀는 동석이의 집을 알고 있다며 혼자 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을 놓치는 것은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들러리가 되는 것도

내 취미에 맞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잘 될 겁네다.

그렇게 격려하고 버스를 태워 그녀를 보냈다. 여자는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고맙습네다. 정말, 고맙습네다.

예술단의 합숙소롤 돌아온 나는 저녁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쉬고 있어 . 나도 조

금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문을

열어보니 동석이의 애인인 화교 처녀였다.

-용이 동무. 어떡해요. 동석 동무가, 동석 동무가 죽어가고 있어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쯤 두 사람이 눈물의 상봉을 하고 어딘가로 도망갔

으리라 생각했는데, 동석이가 죽어가다니?

-어떡해요. 어떡하면 좋아요?

속옷 바람으로 뛰어왔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화교 처녀는 아예 합숙소의 내

방에 철퍼덕 주저앉아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빨리 가봅시다.

울고 있는 화교 처녀를 일으켜 세운 후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동석의 집까지 몇

십분을 뛰었을 것이다. 도착했을 때 동석이의 몸은 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귀를 대보니 분명히 심장이 쿵더쿵덕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

은 것이다! 대충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화교 처녀가 동석의 집에 도착 했을 때 이미

동석이는 약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설마 설마 하면서 화교 처녀는 물도 끼얹

어 보고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보기도 하고, 혼자서 살려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동석이의 몸은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기만 했다.

-그래도, 네 얼굴을 보며 죽으니 행복하다.

희미하게 정신이 들 때마다 동석이는 이렇게 말했다.

-동석 씨. 죽으면 안돼. 내가 이렇게 왔을데. 제발 눈을 떠봐요!

울며 애워하는 화교 처녀에게 동석이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점점 그의 몸

이 굳어갔던 것이다. 나는 동석의 몸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설레 설레 고개를

흔들던 의사가 즉시 위세척을 시작했다. 워낙 많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의사 역시 장담

을 하지 못했따. 하지만 숨이 붙어 있다는데 그도 일말의 희망을 거는 듯했다. 그렇게

한식간 정도 위세척을 했을까. 동석이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따. 의사는 안도의 숨

을 쉬고 화교 처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동석이는 살아났다. 이제

는 당도 부모도 두사람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당과 간부의 무관심이야말로 세상에

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두사람은 양가 부모들이 불참ㅎ나 가운데 결혼식을 단행했다.

이제 세상에서 서로를 위해줄 사람은 단둘뿐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부부를

손가락질하고 끝까지 따돌릴 것이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를 저버리고 당

을 배신한 동석이는 죄인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동석

이는 예술단에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선처가 되었다. 다만 출세나 좋은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내가 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잘 살았다. 어떻게 하게된 결혼인데 잘못

되겠는가. 어렵게 이룬 사랑인 만큼 더욱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들의 사랑에 책임을 지

리라.

내가 찾는 한 여자

그날은 엄청 행복한 날이었다. 내 신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햇살 아래 눈부시

게 웃었다. 나도 내 얼굴에 잘 어울린다는 하얀 색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우린 그렇게

손을 잡고 모란봉 꼭대기로 향했따. 신부는 가끔씩 산길이 험한지 다리를 삐끗하기도

했고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도 했지만, 나늘 바라보며 계속 행복한 미

소를 짓기를 잊지 않았다. 모란봉 산길이 이토록 가뿐할 수가! 갑자기 구름 위를 걷는

듯 두 발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신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신부도 나를 놓치기

싫은 듯 두 팔을 내 목에 둘러 단단히 매잡았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두둥실 떠올랐다. 바람과 구름과 비가 우리를 모란봉 꼭대기로 데려다 줄 것이 분명하

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고 내 신부의 촉촉한 입술 위에…….

잠을 깨보니 아파트의 썰렁한 침대 위다. 참 좋은 꿈이었는데. 다시 잠을 자면 그 꿈

을 이어서 꿀 수 있을까. 꿈이라는게 항상 이렇게 감질나게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버린

다. 그후 모란봉 꼭대기에 도착한 나와 내 신부는 어떻게 됐을까. 하객들ㅇ느 어떻게

모란봉 꼭대기에 도착한 나와 내 신분느 어떻게 됐을까. 하객들은 어떻게 모란봉으로

올라왔을까. 결혼 축가를 불러주기로 약속한 가수 최백호 씨는 그곳까지 와 주었을까.

꿈속의 내 신부는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녀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어딘가

에 분명히 있으니 이렇게 꿈속에라도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녀의 허리를 안았을 때 그녀의 이마가 내 코와 턱쯤에 닿았으니 키는 160을 약

간 넘었을 것이다 .항상 강조하듯이 내게 키 큰 여자는 버거운 상대다. 방송국에서 자

주 마주치는 미스코리아류의 장대들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볼도 꼬집어봐야 할텐데 그렇게 키가 크면 내가 사랑해줄 수 있겠는가.

키는 나보다 약간 작은 160이상을 거수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눈이 작기 때문인지, 나

는 굵직한 쌍거풀이 진 시원시원한 눈매의 여성을 좋아해 왔다. 한창 여자에 관심이

많았던 스물여섯 때에는 온통 쌍꺼풀 진 여자만 눈에 띄었다. 한 여자의 눈이 너무 예

뻐서 그 눈을 짝사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쌍꺼풀진 눈에 대한 신비

로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젠 쌍꺼풀이 업더라도 눈이 크고 눈빛이 초롱초롱하면 그

걸로 족한다. 북한에서도 코는 작고 높은 것을 예쁜 코로 생각한다. 하지만 남한 여성

들처럼 성형수술하여 뾰적하게 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뾰족한 콧날보다는

오똑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의 코를 좋아한다. 그녀의 몸매는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

했으면 좋겠다. 허리와 팔목 발목 등은 여성스럽게 가늘어야 하지만 엉덩이 허벅지 등

에는 웬마큼 살이 있어야 매력적이다. 다리는 곧고 번듯해야 한다. 2세의 골격만큼은

엄마 골격을 많이 유전받는다고 하니 아내의 몸매는 그만큼 중요하다. 아이가 후에 무

용수나 체육선수가 도니다해도 보족하지 않을 만큼의 몸매, 그런 골결을 물려줄 수 있

는 여자라면 좋겠다. 여기까지 들으면 내가 무척 여자의 외모를 따지는 남자라고 오해

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인정하듯이, 일단 외모에서 거부감

이 없어야 사랑도 해볼일이 아니던가, 게다가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깜짝 놀

라만한 엄청난 미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에 예뻐보이는 여성이면 그뿐이

다. 온통 아름다움을 뽐내는 다이아몬드 밭에서 단 하나의 진주알을 발견하고 싶은 것

이다. 또 내 스스로가 볼품이 없으니 아내라도 반듯해야 후에 태어날 아들 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못생긴 사람들을 놀리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뒷동산에 나무하러 갔땠냐”는 것이다. 결국 못생긴 건 엄마 아빠 탓이

란 뜻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 시사잡지의 과학란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니 인간의 사

랑이란 행위에 대해서 꽤나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남자와 여

자가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기초는 ‘성적 매력’에 기인한다는 것

이다. 그리고 이 성적 매력이란 감정 자체는 “상대방과 닮은 자식을 낳고 싶은 유전자

적 충동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청혼을 할 때 “너와 결혼하고 싶

어”보다 “너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가 훨씬 강렬하게 들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외모가 내 눈에 띄었다면, 그 다음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겠

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천천히 조금씩 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한 여성과 30분만 얘기를 하면 그 여

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낼 수 있다. 가정 교육이 제대로 된 여자인지, 행실에 절제가

있는 여자인지, 씀슴이가 헤픈 여자인지, 인정이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 대번에 알수 있

은 것이다. 이를테면 앉은 모습 하나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른 앞에서도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는 여성, 미니스커트를 입고서도 다리를 오므리는 것을 잊는 여성,

반대로 너무 짧은 스커트를 감당하지 못하며 불안한 자세로 엉거주춤 앉아있는 여

성…….이런 여성은 아무리 교양 있는 척, 당당한 척 말한다해도, 나는 속지 않는다. 몸

가짐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체험과 습득으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한껏 교태를 부리며 점잖은 몸짓을 하려해도 더욱 어색할 뿐이다. 나는 차라리

거칠더라도 솔직하게 원래의 몸짓을 보여주는 여성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겠다. 서울

에 와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요즘 젊은 여성들 중에 제대로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꽤 드물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른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법을 귀에 못

이 닳도록 배웠다. 어머니께서는 “인사를 못하는 사람은 나머지 모든 것이 글러먹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살아보니 어머니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

는 사람이 어떻게 윗사람에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친절할 것이며, 또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분하겠는가. 인사는 인감됨의

기본이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는 반드시 인사를 해야하는 것도 물론이다. 아무말 없이

쓱 사라지고 또 아무말 없이 쓱 나타나는 여자는 아니올시다. 글세, 여떤 여자들은 그

런 것이 꽤나 멋있고 신비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배워온

가르침은 그런 행동을 버릇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통일이 된 후 어머니와 형님

가족, 그 많은 조카들과 함께 살 생각이다. 그러니 내 마누라는 당연히 웃어른들을 모

셔야 할 것이고 그 많은 조카들의 빨래도 군소리 않고 뚝딱 해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

니 자신의 영역만을 챙기는 개인주의적인 서울 여성들을 바라볼 때면 이게 아닌데 하

며 정신이 버쩍난다. 남한에서도 요즘은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모시는 것은 거부한

다고 하니, 과연 나와 결혼하여 대가족에 파묻혀 살 여자가 있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

만 나를 믿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줄 것이다. 꿈속에 나타난 천사 같은 그녀

라면 분명히 그렇게 해줄 것이다. 하짐나 결코 내가 아내에게 보수적인 주부상을 강요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내는 시부모를 모시고 조카들을 챙기면서도 아내로서, 대한민

국의 한 여성으로서의 특권은 모두 누릴 수 있다. 그녀는 원하는 직장에서 신나게 일

할 수도 있다. 직장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그녀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잘 나타내주

는 지표일 것이다. 사실, 직업이 없은 평범한 여자가 나를 더 잘 이끌어주겠지만, 사회

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멋진 직업여성도 나쁘진 않다. 함께 가사를 분담하고 노력한다

면 그런 어려움쯤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모나 집안 배경으로 단숨에

출세한 여성은 싫다. 한단계 한단계 천천히 사회적으로 성장한 여성을 높이 사겠다. 중

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냐가 아닌, 지금까지 어떤 계단을 밟아왔느냐가 아닐까. 그

녀의 기호가 원한다면 담배를 피우는 것도 간섭하지 않겠다. 술 역시 주정이 심하지

않다면 즐겨도 상관없다. 아무리 술이 취하더라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목소리를 높

이지 않으면 합격이다. 내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어색해하지 않고 즐기는 여성이라면

더욱 좋겠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언짢아도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는 자신의 감정

을 드러내지 않고 분위기를 맞출 줄도 알아야 하겠다. 유행을 너무 민감하게 좇지 않

는 한에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으로 멋을 부릴 수도 있다. 사실, 옷차림이나 화장에

너무 신경쓰지 않는 여자도 매력 없다. 화장이 너무 지나쳐 분장이나 변장이 된다면

몰라도, 남한에 온 뒤로 바뀐 생각이 있다면 여성들의 가벼운 화장은 사회적인 ‘예의’

라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부부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줘야 한다. 내게 아내가 아닌

다른 인간관계가 있듯이 아내에게도 그녀만의 인간관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인간

관계를 일일이 다 알아내려고 하면 그녀는 물론 나 역시 피곤할 것이다. 부부사이에도

적당한 무관심은 필요한 것이다. 적당한 무관심이 평화롭게 존재하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야 한다. 내가 밤을 새우고 들어오더라도 드라마에서 보듯 팬티를 뒤집어

본다거나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있는지 검사는 아내는 무섭다. 서로 신뢰한다면

그런 짓이 왜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질투는 사절한다. 맹세하건대, 나 김용은 아내의

가슴에 못박을 짓은 절대로 안한다. 아내가 나를 믿는 만큼,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최

선을 다할 것이다. 집에 일찍 들어가지도 못하더라도 반드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

을 하고 있는지를 밝힐 것이다. 아내가 나를 믿는 만큼 그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

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질투심이 심한 여자라면 나 역시 나 스스로를 감당

하기 힘들 것이다. 그 질투가 싫어서 삐뚜로 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 어디서 이런 여성을 보았다면, 즉시 내게 연락해주길 바란다. 세상은 이렇

게 넓은데 그녀는 단 한 명 뿐이다. 운이 좋아서 내일 당장 그녀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운이 나쁘다면 평생 못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기 바란다. 정말이지, 내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귀순자의 눈물

귀순자에 관한 진실

지면을 빌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책을 읽는 독자

분이 나와 같은 처지의 귀순자이거나 실향민 어르신이라면, 잠깐 나의 이런 당돌한 질

문을 한번만 눈감아 주길 부탁드린다. 남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귀순자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는가.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보겠다. 만약 여러

분 앞에 30대를 갓 넘은 애송이 같은 얼굴의 귀순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아직

청년기가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에 북한 사람 특유의 촌티와 깡마른 모습. 그는 어눌

한 말투로 어떻게 북한을 탈출하게 됐으며 고향에는 누굴 남겨두고 왔는지를 덛듬더듬

얘기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처음 남한 땅에 발을 디뎠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으며

요즘 귀순하는 젊은이들의 한결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귀순하고도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귀순자들의 처음 모습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이는 북한이 변화와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갈설하고 본론

으로 들어가자. 남한 사람들은 이 청년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질문에 대답하기 곤

란하다면 내가 대신 대답해보겠다. 우선, 일반적인 감정이라면 측은함과 동정심이랄까.

그런 막연한 감정일 것 같다. 하지만 그 감정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인다. 어떻게 가족을 북한에 남겨두고 혼자 귀순할 수 있었을까. 북한에서는 귀

순자의 가족은 모두 아오지 탄광으로 보낸다던데, 그걸 알면서 어떻게 혼자 살아보겠

다고 남한에 왔을까. 갑자기 청녕의 어수룩한 얼굴이 냉혹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청년이 정부로부터 받게 될 돈의 액수를 가늠해 보기 시작하낟. 허, 그

청년, 꽤 많은 돈을 벌겠구만. 정부가 집도 사줄 것이고, 웬만한 직장도 잡아줄 것이고.

허! 그 친구 귀순한 덕분에 봉 잡았군만!

모든 독자 여러분이, 모든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겟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분들을 탓할 생각도 없다. 실제로 나 역시 정부가 마련

해준 전셋집을 받았으며 ‘한국관광공사’라는 번듯한 직장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 과연 그 청년 귀순자가 완전한 남한인으로 받아들여졌느

냐이다. 정부로부터 집과 돈과 일터를 선물받은 그 청녕은 과연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행복한 남한인으로 변신했을까. 남한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가치척도로 볼 때 이 청년

의 현재는 완벽하다. 그는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전셋집과 전망 좋은 직장과 보상

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예금통장이 있다. 귀순자이니 직장에서 잘릴 이유도 없고 경

혼과 동시에 자녀들을 위한 교육비도 지급된다. 얼마나 좋은가, 대한민국 만세다! 하지

만 그래서 이 청년은 홀홀단신 남한 땅에서 행복한 삶을 찾았을까. 집이 있고 돈도 있

지만, 결국 이 청년은 남한 사회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북한 촌놈일 뿐이다. 직장에서는

꼭두각시처럼 이 부서 저 부서로 비실비실 옮겨 다닌다. 정 붙이고 마음을 터놓을 직

장 동료는 꿈도 꿀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다.

가족을 버렸다는 자책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순자에겐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열렬한 연애가 아닌 바에야

귀순자에게 결혼은 귀순보다 더 큰 모험이다. 잘못하다 직업적인 중매쟁이에게 걸리는

날에는 돈을 노리는 속물 가족에게 덜미를 잡힌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평생을 후회하

는 귀순자도 있다. 이쯤 되면 이 귀순자는 자시느이 운명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 부모 형제와 헤어진 채 왜 이 낯선 땅에서 홀로 슬퍼해야 하

는가. 차라리 힘들더라도 북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헤쳐나갈 것을, 왜 내가 이 살벌한

남한 땅에 떨어져 있는가. 집은 온기 한나 없이 싸늘하기만하고, 직장은 계속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무능력한 꼭두각시 직원으로 낙인 찍힌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

만 둘 수도 없다. 도대체 이 낯선 땅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94년 이후로

귀순자의 실상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94년 새로 개정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르면

그동안 지급하던 전셋집에 대한 조항이 사라지고 대신 7백-1천2백만원의 보상금이 지

급될 뿐이다. 직장을 구해주는 것도 담당형상의 몫으로 미뤄졌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

리는 담당형사가 귀순자 한 사람의 취업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조

금만 기다려 보라는 담당형사의 말에 귀순자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지만 반가운 소식

은 들리지 않는다. 결국 95년 이후로 귀순자 실업률이 점점 늘고 있다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게 되었다. 실제로 귀순자의 22.5%가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먹고 살

아가고 있으며 한달 수입이 1백만원 이하인 경우가 73.5%, 이중 50만원 이하인 경우도

29.6%나 된다는 사실이 조사로도 밝혀졌다.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 많

다던 보상금은 어디 갔으며 안정된 직장의 약속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문제를 풀

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출발저 로 돌아가야 한다. 어색한 표정, 어눌한 말투의 청년 귀

순자, 그는 왜 남한에 왔는가. 나는 남한 정부는 우선 그 이유부터 다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귀순자의 귀순 동기는 대게 세 가지로 나뉠수 있다. 첫째, 생

활이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파서. 둘째, 북한 사회에 대한 배신감, 체재에 대한 회의, 남

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에. 셋째,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을 믿고 무

작정 남으로 넘어온 경우다. 언뜻 보면 이 세 가지 동기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하나로

집약될 수 있다. 과거 간첩들에게 자수를 권할 때 사용됐던 표어처럼 ‘따뜻한 남쪽나라

의 품에 안겨’ 자유와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일단 남한에 오게 되면 귀순자

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싶어한다. 결코 혼자 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흔들리는 북한 사회를 직접 경험한 이들은 멀지 않아 통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때

까지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두어 가족들을 편히 모실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

이 내가 남한 땅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귀순자들은 날마다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

한의 상황은 이런 귓누자들의 마음가짐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다. 처음에는 모

든 것이 순조로워 보인다. 집과 직장, 적당한 보상금,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귀순

자에겐 아무것도 없다. 처음엔 많아 보였던 보상금도 막상 정착을 위해 활용하려면 터

무니 없이 작을 뿐이다. 게다가 순진한 귀순자를 호리는 사기꾼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이들은 아직 한국 실정에 익숙하지 않은 귀순자들을 홀려 보상금을 탈취하려는 작자들

이다. 귀순자들은 초기에 보상금으로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둥, 어디에 투자하면 두 배

로 불릴 수 있다는 둥 각종 감언이설에 시달린다. 나는 틈나는대로 동료 귀순자들에게

이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94년 이후 귀순자들의 경우는 더 비참하다. 그들

이 이 살벌한 남한 사회의 분위기를 깨달았을 즈음이면, 그들에겐 집도 돈도 맘 붙이

고 일할 직장까지도, 아무것도 없다. 절망한 이들은 오히려 통일이 될까봐 불안해한다.

남한 땅에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낯으로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남한 정부가 북한 귀순자들에게 ‘씨앗’이 아닌 ‘꽃송이’를 주려는데 있

다. 꽃송이는 겉으론 그럴 듯하고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시들면 그뿐이다. 만약 남한

정부가 씨앗을 주었다면, 당장은 어렵겠지만 그 씨앗은 곧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줄기가 자라고 마침내 꽃을 피웠을 것이다. 대표적인 ‘꽃송이’는 남한 정부가

귀순자들에게 제공하는 각종 공사의 공무원 자리다.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사는

얼마나 좋은 직장인가. 안정된 월급에 평생 직장,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의 하나다. 대내적으로도 또 내외적으로도, 귀순자에게 공무원 자리를 주었다는 것은

굉장한 자랑거리가 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귀순자에게 적합한 직장인가. 남한 실정

을 잘 알지도 못하는 귀순자가 남한의 행정을 책임지는 공무원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내 개인적인 경우를 말하자면,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그나마 나는 한국 관광공사에서

관광 홍보 역을 맡아서 비교적 즐거운 공무원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인맥과 학맥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북한 촌놈에 불과한 나는 언제나 겉돌기만했다. 윗살함은 하루

가 멀다 하고 바뀌었고 덩달아 아랫사람들까지도 우수수 교체됐다. 하루 아침에 실업

자가 되어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 아침에 간부가 되어 승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직장에서 귀순자들이 얼만 버틸 수 있을까. 나는 2년을 버텼짐나 더 이상 적을

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곳은 생명이 없는 직장이었다. 아무리 물을 뿌리고 거름

을 준다해도 한 송이 뿌리 없는 꽃에 불과한 나는 그대로 시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정

부의 빈곤한 상상력을 탓하고 싶다. 어째서 공무원이어야만 하는가. 오직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조망을 넘어 온 그들이다. 그들이 공사판 막노동이라고 마다하겠는가. 그들

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집가 돼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폼내기 위해서 귀순한 것이 아니다! 94년 이후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공무원 자리도

사라졌다. 남ㅎ나정부는 이제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텔리 귀순자를 공장인부로 집어넣

기도 하고 건설현자에서 막노동을 했던 탈북자를 사무직에 앉히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

다. 이 때문에 귀순자들 사이에도 위화감이 조성됐다.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한 달에 80만원을 버는 귀순자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자기와 비슷한 출신의 귀순자

가 연봉 2천만원을 벌어들이는 사무원이더라고 하소연을 해온다. 귀순자의 능력이나

적성이 아닌, 단순히 ‘운’-담당 형사를 누굴 만나는가. 때마침 괜찮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가 등-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 경우였다. 우리는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잇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적오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디딤돌만을 마련해 달

라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 귀순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나아가 통일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통일이

된 후에는 바로 이들이 남과 북을 맺어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북한 사람들

은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해도 남한인들을 곱게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아래 남한 사람들이 북한 땅에 포크레인을 들이댄다면, 그들이 쌍수 들어 환영할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붉한 사람들은 그렇게 호락홀가하지 않다. 91년 귀순하여

지금은 북한문제조사연구소에서 일하시는 고요환 연구위원님의 말씀처럼 북한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남한 괴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통

일이 됐다고 해서 남한 사람들을 넙죽 동포로 받아들일 것 같은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귀순자들 뿐이다. 귀순자들의 말 한마디가 북한

사람들에겐 확실한 고증이 된다. 남한 사람들이 과연 내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내 형제를 어떻게 대우했는가각 그들의 행동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그

들에게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가.

맞선, 그 신랄한 자아비판

평소 아끼던 후배 귀순자인 영선이가 나르 보자고 하여 신촌에서 만났다. 물론 나는

신촌이란 동네를 무척 어색해하다. 신촌의 복잡한 길거리에 5분만 서있으면 머리가 지

끈지끈 아파올 정도다. 약속 장소롤 신촌을 택한 것은 순전히 영선이의 편리를 위해서

였다. 그 녀석의 자취방이 연대 앞에 있기 때문이다. 영선이는 북한 인민군 중위출신으

로 지난 95년 귀순을 했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따. 그 녀석을

볼 때면 내 야윈 몸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북한 출신답지 않게 큰키에 다부진 몸매, 남

자다운 생김새가 나를 주눅들게 한다. 게다가 항상 사람 좋은 그 웃음이 멋지다. 얼마

나 대견하고 흐뭇한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내 입이 양옆으로 찢어진다. 영선이는

그렇게 지켜보기 즐거운 후배였다. 하지만 오늘 그 녀석의 못브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형, 술사줘!

아직 저녁을 먹기도 이른 시간에 만났는데 이 녀석은 다짜고짜 술타령부터 시작한다.

-소주로 해. 맥주는 싱거워.

영선이 표정이 너무 비장새 보여서 내가 오히려 한 술을 더 뜨기로 했다.

-소주는 뒤끝이 좋지 않아. 양주로 하자.

신촌에서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몇 군데 그럴듯한 술집

에 들어갔다가 엄청난 굉음과 현란한 조명에 당황해하며 황급히 나와야 했다. 그러게

서너 군데를 돌아다닌 후에야 겨우 마음에 드는 술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교적 한

산하고 음악소리도 조용한 곳이었다.

-어때, 요즘?

-기냥길지 뭐.

-공분 잘 되고?

-기냥

주문한 양주가 얌전히 정리된 안주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렇

게 양주를 먹는 것도 아주 오래간만이다. 모란각에서 육수를 끓인 이후로 술도 잘 먹

히지 않았다. 기껏해야 늦은 저녁 때 한 두 잔 반주를 곁들이는 것이 고작인네. 영선이

덕분에 이렇게 신촌 땅에서 양주도 먹고. 아무튼 오늘은 좋은 밤이 될 것 같다.

-마셔라.

내가 먼저 영선의 잔을 채워줬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그쓴 양주를 한 입에 툭 털어

넣는다. 그리고 술잔을 입에서 떼는 영선이의 입에서는 ‘훅’하는 깊은 한숨 소리가 새

어 나왔다.

-너래, 왜 그래?

-형!

-왜 술을 기ㄹ기 마셔?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북에 있을 때, 살면서 자아비판도 여러 번 했었어. 형도 해봤지?

물론이다. 북한 주민으로 성장하면서 자아비판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일이다. 그

리고 북한의 자아비판은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

다. 정치비판이나 사상 비판이 아닌 바에야 자아비판은 그저 자신의 잘못을 많은 사람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정하고 반성하는 차원일 뿐이다. 내가 자아비판을 한 것은 열

일곱 살 때였다. 그때 나는 미성년자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육단에서 술을 마시다

고문에게 걸렸었다. 술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어린 나를 술자리에 끼어준 형님들이 고

마울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고문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고 나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

다 발목을 삐었다. 그렇게 얼마 달아나지도 못하고 고문에게 잡혀서 자아비판대에 세

워진 것이다. 자아비판은 솔직하게 진솔되게 잘 해야 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강제

노동이란 벌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형님과 지도원들 앞에서 비판대에 선

나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었다. 하지만 지금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나는 그 자

리에서 서 있어야 할만큼 잘못을 저질렀었고 그 점을 뼈에 사무치게 반성했다는 것이

다. 억울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여러 자아비판을 해봤지만 이런 자아비판은 처음이야. 형.

-?…….

-남한에도 자아비판이 있다는 거. 형은 알았어?

-말 돌리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보라우. 무신 일이 있었던 거야?

-형, 맞선이라는 거……, 그런 거 본 적 있어?

-맞선 너래 오늘 맞선 봤어?

-응…….

영선이는 두 잔째 양주를 말없이 털어넣었다. 맞선이라…….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나

이가 올해로 서른둘. 나이도 나이지만 귀순 후 몇 년을 홀로 보냈으니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결혼이 하고 싶었을그 녀석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이해한다.

-그런데? 아가씨가 버릇이 없던?

-후웃! 아가씨가 그랬다면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겠다.

-그럼 누가?

-형, 남한은 북한과 너무 달라. 난 북한 식으로만 생각했어. 맞선보는 거, 그거 당사자

끼리 만나는 것 아니야? 남자하고 여자하고.

-당연하지.

-그런데, 오늘 맞선에 여자가 나오딜 않았어. 여잔 없고 아줌마만 나온 거야. 여자의

엄마라는데. 정말 그 여자 지독했어.

나도 서서히 양주에 손이 가기 시작한다. 영선이가 무슨 말을 할 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선 장소에 여자가 나오지 않고 어머니가 나왔다. 이건 남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 보아도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 여자가 어디가 갑자기 아팠다면 모를까. 어

느 여자가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 얼굴을 엄마더러 보고 오라고 맡기는가. 뭔가 잘

못된 만남이다.

-그 아주머니, 완전히 나르 공개비판하러 나왔더구만.

첫눈에 값비싸 보이는 외모의 그 아주머니는 첫인사부터 기분 나쁘게 나왔다. 아가씨

가 없어서 당황해하는 영선이에게 사과의 말조차 없이.

“자네가 임영선이란 북한 귀순잔가?” “예, 처음 뵙겠습네다. 그런데, 저 이소희 씨

는……?” “내 딸이야. 그앤 오늘 안 와.” “예?” “북한 귀순자라 그러기에 자넬 만날 생

각도 없었어. 그런데 중매쟁이 말이 사람이 아주 똑똑하다 하기에, 한번 얼굴이 나 보

러 왔지.” “!…….” “그래, 언제 귀순했어?” “몇 년 됐습니다.” “집 있어?” “예? 아니, 저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쯧쯧, 그 나이에 아직도. 그래도 듣자하니 정부에서 돈 많이

줬다던데. 얼마 받았어?” “예? 아니, 그건…….” “벌써 다 써버렸구나! 이런! 그동안 벌

어둔 돈은 없어?” “저, 그런 질문은 …….” “이런 질문이 어때서! 결혼 하려면 이런 건

다 알아야 하는 거라구. 자넨 아직도 남한을 너무 모르는군!” “……” “자가용은 몰고

다니나?” “예” “사업체를 하나 한다고 들었는데, 돈은 잘 벌리나? 한달 수입이 얼마나

되지?” “아직 학생이라서. 사업은 그저 열성을 다할 뿐입니다. 돈은 아직…….” “아휴!

이 친구 답답하네! 그럼 도대체 무러 믿고 선을 보겠다는 거야.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그렇다고 인물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돈 얼마나 벌어?” “저,

실례하짐나 제가 벼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이쯤에서 일어나…….” “어서, 앉니 못해!

어른이 앉아 있는데 먼저 자리를 뜨는 법이 어딨어? 북한에서 그렇게 가르치던가? 아

직 내 질문이 끝나지 않았잖아!” ” 전 아주머니 말씀대로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북한에

서 온 귀순자라서 남한 실정도 잘 모릅네다. 아주머니 귀한 따님을 잘 모실 자신이 없

습네다. 그러니 얘기는 이쯤에서 그냥 끝내는 게 어떨까요.” “아니! 이 사람이 머리는

똑똑하다더니 그것도 아니구만! 어른한테 이렇게 말대답이나 하구! 내 말 똑똑히 들어!

그런 꼴로 무슨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남한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구! 자네가 뭘 볼 게 있나! 건방지게! 그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구!”

-건방지게! 내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구!

-임마, 그만해!

-형, 한잔 더 줘. 그 아줌마 말이 틀릴게 하나도 없어. 나 같은 놈은 그냥 가족 없이

혼자 살아야 해. 내가 어떻게 감히 결혼을!

-시끄러!

-정말, 내가 이렇게 못난 놈일 줄 오늘에야 알았어. 자아비판 중에서도 제일 혹독한

자아비판이더라구. 본임 임영선은 돈도 없고 집도 없어, 결혼을 할 자격이 안되는북한

귀순자로서……, 감히 결혼을 하려고 덤벼서 이 사회에너무나 큰 죄를 졌습네다. 물의

를 일으킨 점 깊이 반성합네다. 앞으로는 절대로 결혼할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네다. 절

대로, 절대로…….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있다. 저 녀석의 뺨을 한 대 갈겨야겠다. 오늘의 상처가 저

녀석의 뇌세포에 각인 되기 전에 뭔가 수를 써야겠다. 영선아,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사

실은 원래 니 생각이 옳은 것이다. 비정상의 사회에서 정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너다. 온통 비정상이라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남한 사회다. 너는 정상이야. 너를 미워해선 안돼! 나는 그날 영선이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영선이는 내가 그렇게 화난 것을 그날 처음 보았다고 한다. 뭔가에 대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나는 그 모든 화르 영선이에게 퍼부었다.

-미친 자식! 앞으로 혼자서 선보러 나갔가간 내가 니 다릴 부러뜨릴 테다.

-형, 난 결혼 안해. 안 한다니까. 이제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을 거야.

-이 미친놈. 내가 무신 일이 있어도 니 놈 하나는 결혼시키고 말 테다. 이 머저리 같

은 놈. 너 같이 멍청한 놈이 결혼 안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결혼하냐?

-난 안해. 안 할거야. 형처럼 혼자 늙어버리지 뭐.

-뭐! 이 새끼. 딱!

-윽!

우리는 그렇게 치고 받으면서 양주 세 병을 깨끗이 비웠다. 그렇게 술이 취해가면서

그 지독한 아주머니에 대해선 잊기로 했다. 영선이는 곧 두 번째 선을 볼 것이다. 그리

고 그 자리엔 꼭 내가 함께 간다.

내 딸은 보여줄 수 없네!

워낙 코미디 같은 기억이라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지만 영선이 얘길 하다보니 생

각이난다. 벌써 2-3년 전의 일이다. 얼떨결에 내가 맞선을 본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졸지에 맞선을 보았는데 모두 다 한결같이 “내 딸은 보여줄 수 없어! 내

딸과 결혼하겠나 안 하겠나? 어서 말하게!”라며 나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내겐 그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했기에 영선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는 피할 수 있었다. 하

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은 했었다. “귀순자로 남한에서 살아가려니 별일을 다 당한다.”

는생각이었다. 93년 신촌 청파극장에서 <결혼>이라는 연극에 몰두해있을 때였다. 연극

의 줄거리는 평양남자와 서울처녀간의 줄다리기 사랑싸움과 결혼으로 이르기까지의 과

정. 뒤로는 남북의 화해를 통한 통일염원이란 뜻있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매일 저녁마

다 팬들의 박수 갈채와 분장실까지 배달되는 꽃다발ㄹ로 뿌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

다. 그때 사인을 해달라며 분장실로 몰려오던 긴 생머리의 20대 아가씨들 틈에 파마머

리의 중년 여인이 한 분 있었다. 풍성한 장미꽃다발을 내게 선사한 그 아주머니는 관

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배우들이 분장을 지울 때까지도 극장 안에 남아 있었다.

-김용 씨.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커피? 남한 사람들은 중요한 할 말이 있을 때 커피를 마시자고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때 나는 막 은은한 향기를 내는 부드러운 갈색 커피의 맛에 반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 처음에는 정말 오로지 커피를 마시러 가는 줄로

만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거리며 마냥좋아한고 있을 쯤이면, 상

대방은 항상 어려운 주제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커피 마시자는 말

을 무서워하기로 했다.

-저,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저는 처음 뵙는데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김용 씨께도 꼭 필요한 얘깁니다. 같이 가시죠.

철부지 20대 아가씨도 아니고 50대 아주머니가 부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딱 30분만

앉아 있어야지. 그 이상은 곤란하다. 난 정말 커피만 마실 테다. 대포 한 잔 하자는 단

원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근처 카페를 찾았다.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는 우선 내 칭찬부터 시작했다.

-아이, 사람이 참 착하게도 생겼따. 연극하는 건 언제 그렇게 배웠어? 노래도 하고 방

송도 하더니, 재주도 많아!

-뭐, 그저, 감사합네다.

-실제로 보니 인물도 꽤 있네. 북에서도 처녀들한테 인기 좋았겠어!

-어휴, 그런 말씀 오늘 처음 들었습네다. 부끄럽습네다.

아주머니의 칭찬이 내겐 편하게 들리지 않았따.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칭

찬이 아닌걸. 카페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주머니의 말투에 희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뭔가

들뜬 듯한, 내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가식적인 말투……. 도대체 이 아주머니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어, 그거!

아주머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다른 게 아니라, 자네, 결혼할 생각 아직 없나?

-결혼이요?

-뭐, 나이도 벌써 서른넷이라 들었는데, 어서 서둘러야지.

-글쎄요. 전 뭐, 때가 되면 하게 되리라 생각합네다.

-아유! 그렇게 답답하니 아직 장갈 못 갔지. 결혼은 자긱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거야. 마냥 기다리고 있다간 좋은 시절 다 지나간다고!

-.

-그래서 말인데. 음, 내가 중신을 좀 서 볼까하고.

-예?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해하자 아주머니는 더 신이 났따. 핸드백을 뒤적뒤적하던 아주머

니는 당장 내 앞에 작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아이야. 예쁘지! 내 친구 딸인데. 나인 좀 많지만….아니, 많지도 않아. 서른 한 살

이야. 자네 나이가 그 정도니 딱 좋구만!

세상에! 내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주제였다. 기껏 내가 추측했던 것은 이 아주머니의

고향이 이북이라던가, 혹은 이북5도민의 며느리라던가, 그래서 향수를 달래고 싶어 나

를 찾았다든가, 그런 것이 전부였다. 중매를 하려고 나를 찾아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뭐해! 한번 봐! 사진 좀 보란 말이야!

-이게, 그 분의 사진인가요?

한 순간이나마 기대를 했던 탓일까. 내 목소리에는 실망이 배어 있었다. 사진 속의 여

자가 못생겨서가 아니다. 사진 자체가 너무 조잡했기 때문이다. 서울처럼 사진관이 흔

하고 자동카메라가 흔한 나라에서, 중매용 사진으로 증명 사진을 달랑 한 장 가져오다

니. 그것도 지하철에 있는 3분 포토에서 찍었는지 인화지 가장자리가 도르르 말려있었

다. 이건 성의 부족이 아닌가.

-아이, 그게. 그 아이가 워낙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아이라서. 워낙 성격이 조용조용

해. 기독교 신자라서 하느님밖에 모르는 아이야. 이 사진 한 장 얻어내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다구.

-그럼, 당사자도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것 아닙네까?

-아유! 아니야. 결혼하고 싶데. 김용 씨 정도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내 귀로 들었는 걸. 어때? 한 번 생각해 보겠나?

-저, 생각은 고맙습네다만, 경혼은 당사자끼리 만난 다음에 가능ㅎ나 게 아닐까요. 이

렇게 사진 한 장으로는…….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아이가 참하고, 그리고 집안도 참 좋아. 자네가

결혼만 함녀 사업체 하나 정도는 차려 줄 걸. 어떤가? 괜찮지?

-글세, 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사업체 하나 정도는 차려 준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기분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 이 아주머니는 이 대목에서 마치 좋은 미끼라도 내 놓은 듯 코와 눈을 찡끗거렸

다. 이건 마치 거래를 하는 듯하다. 결혼을 해주면 사업체를 차려주게다고? 딱 잘라 거

절할 수 없었던 것으 대한민국 식의 예의 때문이었다. 원래 북한 식은 싫으면 싫고 좋

으면 좋은 것이다. 내 성격 역시 예, 아니오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렇게 행

동했다간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다. 처음에 한국에 와서 남들의 호의나 제안에 대해 내

가 딱 부러지게 거절하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말했었다. “용아, 그렇게 하면 욕먹어.

나중에 골치 아프더라도 지금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흐지부지 대답하는게 좋아.

” 흐지부지? 좋아, 흐지부지 작전이다! 어쨌든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아주머니. 제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네다. 지금 당장은 너무 놀라서 잘

판단이 되지 않고요. 제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럼, 자네, 이 사진 가져가! 사진 가져가게!

얼떨결에 나는 그 자그마한 증명사진을 떠맡게 됐다.

-사진 들여다보념서 잘 생각해봐. 결혼하면 그 집에서 섭섭하지 않게 해줄 거야. 자네

도 이젠 잘 살아봐야지. 안 그렇나?

결혼으로 인한 신분상승, 물질적인 풍요……. 그런 것이 과연 내게 무슨 소용일까. 그

아주머니가 사람을 잘 못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그 증명사진을 TV근천 어딘가에 팽

개친 후에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혼을 사랑이 아닌 ‘거래’로 생각해 본 적은 꿈

에도 없었다. 그런 것은 북한의 고위 간부의 아들이 예쁘장한 여배우를 아내로 맞아들

이는 경우, 혹은 한국의 내노라 하는 대기업의 아들 딸이 또 다른 대기업의 아들 딸과

결혼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왔따. 아니면 정치인의 아들 딸이 또 다른 정치

인의 아들 딸과 결혼하는 경우. 사랑의 결합이 아닌 돈과 권력과 배경의 결합. 까치는

까치끼리 살고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산다고 하지 않던가. 나로 말하자면, 나는 까치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여자르 죽도록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와 나를 반반씩 닮은 아들 딸을 낳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돈? 그런

건 결혼과는 별개로 생각한다. 며칠 후, 이 일을 잊은 채 여전히 연극으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분장을 지우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용 씨? 나야 나?

-예? 누구신지…….

-아, 왜 글세. 지난번에 카페에서…….

그때서야 그 목소리가 기억났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 일이라면.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합네다. 사실은 제가 너무 바쁘고. 지금은 결혼

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말씀은 고맙지만, 죄송합네다.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본다면서? 아니 그게 고작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인가? 자네, 사

람 다시 봐야겠구만!

-아니, 저.

-됐네! 자네가 내 딸을 우습게 만들었구만.

-딸이라니요?

-그 아이가 내 딸이라구! 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아닌 척했지.

그 아이가 어떤 아인 줄 알아? 인물도 좋고 일류 대학도 나오고, 자네한텐 과분하지.

암. 과분하고 말고.

-죄송합네다. 따님이 그렇게 참하니 저보다 더 좋은 혼처가 있겠지요. 그럼. 이만.

-이봐, 잠깐! 사진을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예?

-아니, 자네가 내 딸 사진을 갖고 갔잖아. 이렇게 거절할거면서 사진은 왜 들고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막무가내로 사진을 떠맡길 때는 언제고.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야 했다. 어쨌든 그 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 아닌가.

-알겠습니다. 사진은 돌려드리겠습네다.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우편으로 부쳐드…….

-이 친구가! 왜 이렇게 예의를 몰라? 손으로 받아갔으면 손으로 돌려주는 게 예의 아

닌가? 자네 북에서는 그렇게 배웠어?

나는 결구 그 일로 그 아주머니를 또 한번 만나야 했다. 엄지손톱 만한 증명 사진

한 장을 돌려주기 위해서. 호텔 커피숍으로 나를 부른 그 아주머니는 사진을 돌려준

다음에도 말이 많았다. 내겐 이미 끝난 일이었는데 그 아주머니에겐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내 다시 한 번 묻겠네. 정말 내 딸이 마음에 없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주머니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초조하게 딸을 결혼시키려는 것일까. 그것도 부르 미끼로 내걸어야 할

정도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중년여자의 아집 뒤에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네다. 제가 문제죠. 아직 남한 땅에서 기반도 잡지 못

했고, 건강도 더 추슬러야 하고. 결혼을 생각하기는 너무 이릅네다. 제가 따님과 결혼

하긴 너무 부족하죠.

이 말 때문이었을까. 아주머니는 신선히 물러갔다. 증명사진을 지갑 속에 소중히 집어

넣고는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이렇게 나의 얼떨결 맞선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시

는 이런 일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마,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어

느 날 받은 한 통의 팬레터가 화근이 되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인 할머닐세. TV로

자네를 볼 때마다 고향 생각이 나. 나를 좀 만나 줄 수 있겠나.’ 편지를 읽은 후 나는

곧바로 어머니 생각에 빠졌꼬 뭔가에 홀린 듯 전화번호를 돌렸따. 팬레터를 보낸 할머

니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어디 어디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만난 팬레터의 주인공은 향수에 젖은 실향민도, 머리가 희끗한 할

머니도 아니었다. 완벽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는 중년여인이

었다. 전혀 고향 얘기를 꺼낼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아주머니는 난데없이 ‘결혼’이

란 주제를 꺼냈다.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그 아주머니에게 서른네 살된 딸이 있

는데 내게 주겠다는 것. 아주머니의 얘기는 거창했다. 남편이 몇 년 전 죽었는데 국회

의원을 몇 번이나 했으며 집에 재산을 많이 남겼다는 것. 남편이 몰던 BMW, 볼보, 소

나타 등 차만 3대가 있다는 것. 집이 단독 2층집으로 으리으리하고 빈방이 너무 많아

서 나는 맨몸으로 그냥 들어와 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따

님을 한 번 만나봐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씀드렸다. 결혼이란느 건 당사자끼리 아

해야 하는 것인데 따님을 보지 않고서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내 딸? 그 아이, 지금 이 커피숍 안에 있어. 자네가 오케이만 하면 당장 보여줄 수

있네.

-예?

-오케이만 해. 그럼 보여줄 테니.

나는 그럴 순 없다고 버텼다.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려 했지만 어머니는 계속 말꼬

리를 붙잡았다.

-자네, 아직 집 없지?

-예.

-돈도 벌어 둔 거 없지?

-예.

-거봐! 내 사위만 돼봐. 그럼 세상이 달라질 걸. 잘 생각해봐. 자네, 머리 좋다면서!

커피숍 저쪽에서 여자 서너명이 나를 흘끗거리는 것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혹시 저

중에 한 명이 이 아주머니의 딸이 아닐까?

-어머님 따님 저 쪽에 있는 분 아닐네까?

-뭐야! 아니야! 내 딸은 금방 나갔어. 저기 없어. 어서 얘기나 마저 해보자구!

-저기 어머니 닮은 분이 앉아 있는데요. 혹시 따님이…….

-이 사람이 자꾸 왜 딴 얘기만 하나,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게. 자네 여자 인물 많

이 가리나?

-예?

-반반하고 땡전 한푼 없는 여자가 좋은가, 얼굴은 좀 못생겨도 돈 많은 여자가 좋은

푹하고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질문 치곤 너무 이상한 질문이다. 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두 쪽 어느 여자도

싫다. 나는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열심히 일하는 커리어 우먼형을 좋아하는데 그

런 여자가 땡전한품 없을 리도 없고, 또 그런 여자가 지나치게 돈이 많을 리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여자는 얼굴도 예쁘다. 미스코리아나 탤런트처럼 객관적

으로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나 김용의 눈에 예뻐 보일 것이란 뜻이다. 열심히 사는 사

람은 다 아름답다. 무려 한 시간 반 동아 그 아주머니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돈 자

랑 자식 자랑에 그 아주머니에겐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일분 일초가 지

루했다. 깊이 생각해보겠다고, 꼭 전화를 드리겠다고 둘러댄 후에야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가보니 아주머니와 내가 미신 음료수 외에도 다른

테이블의 음료수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 돈을 모두 지불하고 그 테이블이 어디냐고 물

었다. 역시, 아까부터 나를 흘끔거렸던 그 여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이다. 분명이 저

중에 한 명이 아주머니의 딸일텐데. 아무리 봐도 다펑퍼짐한 아줌마들일 뿐이다. 아가

씨는 없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커피숍 문을 나서려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옆의 복

도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그 아주머니가 일행을 대동하고 이리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소리가 그대로 내 귀에 꽂혔다.

-아유, 사람도 쪼그만 게, 볼품이 없어!

-꼬챙이처럼 말라 가지고, 고집은 왜 그렇게 세!

-그만큼 말했으면 지도 알아들었겠지. 전화 안하면 지 손해지 뭐. 재수없이!

나는 커피숍을 박차고 나가는 여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됐어! 엄마, 나 결혼 안

해! 어린아이처럼 소리치는 여자의 뒷모습은 족히 내 몸집의 세배는 돼 보였다. 한눈에

꽉 차고도 다 들어오지 않는 우량돼지(뚱돼지)같은 몸매였다. 숨이 막히고 식은 땀이

흘렀다. 이 얘기를 동생들에게 들려주니 방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웃어젖힌다. 당사

자는 죽었다. 살아나온 심정인데, 듣는 사람들은 재미있기만 한가보다.

-형, 그냥 결혼하지 그랬어. 덕분에 우리도 BMW 한번 타보고. 얼마나 좋아!

-자식들, 다신 말 꺼내지도 마. 그 여자랑 결혼했다간 내 갈비뼈 순서가 밤마다 바뀌

겠다. 결혼하고 날마다 침대 부러져서 침대 바꿀 일 있냐? 밤마다 그 몸무게에 눌려서

빈대떡 될 일 있냐?

-우히히히! 형 죽었다!

자살 충동

-형, 나 죽고 싶어!

-뭐!

잠이 확 달아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죽고 싶다는 소리였다. 아

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응응거리고 있던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머리가 쭈뼛 일어섰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형…….

-다시 말해보라우! 무신 말을 한 거야?

-아무 것도 아냐. 그만 끊을게.

딸깍. 뚜뚜뚜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친 듯이 수첩을 찾았다. 녀석의 전화번호를 어딘가에

써 두었을 텐데. 미친놈. 사내 자식이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니래 가만

놔두지 않갔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눌렀지만 녀석은 받지 않는

다. 나는 급한 마음에 그 녁석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다던 또 다른 후배의 집

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너 지금 시간 괜찮지?

-용이 형? 무슨 일이야?

-너 빨리 00내 잡으로 달려가 봐라. 지금 빨리.

-왜?

-글세, 어서 달려가서 얘기 좀 해봐. 녀석이 이상해서 그래.

-음. 그렇구나…….

-뭐 짚이는 거 있어?

-음, 요즘 많이 힘들어 하던데.

-혹시, 사기라도 당한 거야?

-아니, 직장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하더라. 고향 생각도 많이 하고. 외로워서 그러지

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로우면 직작 나한테 올 것이지. 혼자서

끙끙거리다 드디어 마음에 병이 난 것이다.

-넌, 도대체 가까이 있으면서 뭘 했어? 야, 친구가 그 지경이 되도록 뭐 한거야?

나는 되려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서, 날래 달려가 보라우. 한동안 계속 옆에 같이 있어봐. 알간?

-알았어. 형, 연락할게. 걱정 말고.

무서운 일이다. 죽고 싶다고 말했떤 그 친구는 인민군 공작원 출신이다. 유사시에 자

폭 훈련까지 받았던 그 친구가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다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건 자살이다! 귀순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본 생각이 아닐까. 자살 충동. 왜 내가 목숨을 걸고 남한 땅에 왔을까에 대

한 회의감. 남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이 꼴로 살려고 부모 형제를 떠났던가란 자학.

이처럼 극심한 자기 혐오에 시달리는 시기는 대게 귀순 후 1년쯤이 지났을 때 찾아온

다.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의 그 대대적인 환영은 거짓이었던가. 따뜻하게 안아주던

어린이들. 이젠 걱정 말라고 등을 두드리던 안기부 직원들. 잘 왔다며 손을 잡아주던

귀순자들. 영웅처럼 모시며 꼬치꼬치 질문하던 기자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희망을 찾았따고 생각하며 들뜬 그에게 사람들은 ‘공허’만을 남긴 채 사라진 것

이다. 절망 앞에서 귀순자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은 또 다시 북으로 돌아가는 것뿐

이다. 죽더라도 단 한번만 어미니를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죽더라도 내 고향에서, 내

가족 앞에서 죽고 싶다! 94년 탈북했던 나의 후배 김형덕은 한국 생활 2년을 채 견디

지 못했다. 그는 중국화물서을 통해 몰래 북으로 밀항하여다 해양경찰서에 발각됐다.

허름한 옷차림에 초췌한 몰고롤 체포된 그는 “아버지를 만나러 나는 가고 싶었다.”는

말만 실성한 사람처럼 되풀이했다. 북에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평남돌격대(건설단)소

속이었던 그가 남한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막노동뿐이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귀순

자가 늘고 있는 점에 대해서 일종의 체제 우월감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북

한보다 남한이 우월하다. 귀순자가 한국 땅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지켜봐

라”며 호들갑을 떤다. 귀순자에게 집과 보상금이 주어지고 괜찮은 직장이 주어진다.

“거봐, 귀순자에게 얼마나 대우를 잘해주는데.” 이렇게 우쭐해하면서 한발 두발 발을

빼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 될 것인가. 전보다 탈북자에 대한 대우가 더

열악해진 상황에서 형덕이와 같은 제2, 제3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날로 커지고만

있다. 꼭 돈 때문만도 아니다. 귀순자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과

의 단절이다.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때만 되면 ‘우리의 소원은 통

일’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통일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더구나 전쟁이란 말을 꺼내면

그저 치를 떨면서 그런 말 하지도 말라며 화를 낸다. 북한의 경우 두메산골의 세 살배

기 어린애까지도 남한이라면 치를 떨면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데.

남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너무도 무신경하다. 안보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경고하면 보

수주의자로 몰아세우니 강하게 말도 할 수 없다. 사회에 나가면 귀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으로 무시당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남한 땅에 뚝 떨어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할 일을 찾아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지만 ‘귀순자’

라는 꼬리표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남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희들끼리 위

호하며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귀순자들 끼리도 그렇게 쉬

운 것은 아니다. 특히 94년 이후로 탈북자보호법이 달라진 이후로 귀순자들 사이에도

소위 말하는 ‘레벨’, 즉 상류층과 하류층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는 동시에 귀순한 사람

들 간에도 운명의 장난에 의히여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길이 갈라진다. 귀순자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상처받는 가슴이 있는데, 이런 사정을 툭 터넣고 얘기할 상대를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탈북자가 점점 많아지는 요즈음, 나는 되도록 갓 귀순한 후배들에

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중 내가 하는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정신 똑바로 차

려. 여긴 너 혼자밖에 없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구! 정신 못 차리는 동안 코 베어

가는 게 남한 사회야! 절대로 한국 사람들 흉내내지 마! 니가 한국에 왔다고 한국 사람

인 줄 착각하지 마. 내가 왜 냉면집을 차렸는데! 내가 왜 육수를 끓이고 있는데! 춤추

지 마. 달리지도 마. 아차 하는 순간에 발목을 삔다구. 천천히 계속 걸어. 걸음마를 배

우는 아기처럼.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귀순자 폭주족

어느 하루는 동생 경철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승학이라는 아이 알지요?

-누구? 승학이가 누구야?

-아 거, 이북에서 국경경비대에 있던 도깨비 있잖아요.

-응, 그래. 그 도깨비 생각난다. 왜 그 녀석 장가라도 간다냐?

-장가가면 얼마나 좋을라구요. 그 녀석이 어제 술을 정신없이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앞차를 받으면서 앞 차의 뒷 유리창으로 몸을 뚫고 들어가 부부간에 나란히 타

고 가던 사람들을 덮쳤대요. 그래 가지구요, 파출소에 끌려가 족쇄(수갑)를 찼는데 더

가관인 게 난장판을 만들었대요. 경찰들한데 ‘내가 무슨 도적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

냐? 내술 먹고 내 머리로 앞차 받았는데 왜 갔다가 족쇄를 채우냐’하고 떠드는 것을

승학이 전담 형사가 겨우 설득히켜서 지금 집에 와있는데요. 시간 있으면 형님도 면회

좀 와서 저꼴을 한 번 좀 보세요.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보기

싫은 사람한테 오토바이를 사준다는 말도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앞차를 받

아서 뚫고 들어간 정도면 몸은 둘째 치고 머리가 정상이 아닐 터인데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을 온통 채웠다. 일을 대강 정리하고 가양동에 있는 도깨비 승학이네 집으로 향

했다. 귀순자들은 대체로 가양동에 많이 산다. 이 가양동 아파트는 12-15평짜리 서민

아파트로 귀순자들에게 영구임대 해주는 아파트이다. 집안에 들어서니 도깨비는 누워

있고 담담형사는 어젯밤도 한 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밝혔다면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를 보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어찌 보면 형사에게 마음 고생을 많이 시키는 그 녀석

이 밉기도 하였다. 승학이는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내가 손에 들고 들어간

봉다리를 보더니 “어, 형님 오셨어요?”하고 인사를 하며 반가워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

이 말을 듣지 않는지 기우뚱한다. 상처를 보니 얼굴과 머리에 한 열 곳은 꿰맨 것 같

고, 다리나 몸은 실컷 얻어맞은 놈처럼 퉁퉁 부어올라 있다. 그 못브이 보기에 참으로

안쓰러웠다. 이런 모습을 만약에 부모님이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랴? 그러나

그 녀석은 대뜸 “형님 맥주 사왔어요?”하고 묻는다. 너무 한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

도 하여 눈물이 나올 듯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맥주를 달라고 보챈다. 농담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아파 죽어가는데 무슨 맥주야?

그러자 담담형사가 하는 말이 아침부터 병원을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뿌리치면서

방구석에 누워 맥주를 벌써 한 박스나 까먹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남한 사람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나 나지 않았을까 오히려 근심이 되어서 안절부절하고 병원부터

찾아갔을 터이다. 그런데도 이 무지막지한 녀석은 “척추도 조금 아프구요. 다리도 좀

아프구요. 머리도 좀 띵한대요!”하면서도 마치 사돈 남말 하듯 얘기했다.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고 빨리 병원에르 가야 한다고 당부했진만 결국은 담당형사의 고생에

위로를 해주고 환자에게는 오히려 북한 식으로 욕지거리를 잔뜩 해주고 돌아왔다. 며

칠 후 이 도깨비 승학이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병원을 다녀왔느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하는 말, “병원엘 왜 가요? 내가 뭐 병원에 돈 갖다 바치려고 남한에 넘어왔나요?”한

다. 터무니 없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 그래 몸은 좀 괜찮나?”

하고 묻는 말에 “아 거야 뭐 좀 아픈거야 다쳤으니까 아프지요. 세월이 약이니끼니 좀

지나면 낫겠지요”한다. 얼굴에 아직도 푸릇푸릇 멍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녀석은 아주

멀쩡한 놈처럼 태연자약하고 씩씩하기만 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유쾌하게 한바탕 웃

고 나서 앞으로는 절대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했다. 원래 경철이로부터 들은 말은

한국의 폭주족이 울고 갈 정도로 신발에서부터 가죽 점퍼, 오토바이까지 그럴 듯한 것

으로 일색을 다 갖춰놓고, 그 차림으로 ‘경철이형 갑시다’하면서 경철이를 오토바이 뒤

꽁무니에 태우고 대학(연세대)까지 가던 녀석이란다. 그러니 거이 내가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안탈 녀석이 아니지 않은가. 최승학은 지난 94년 12월에

북한 국경경비대 중사로 함경북도 두만강에서 군사복무를 하다가 중국과 홍콩을 거쳐

자유대한의 춤에 안겼다. 귀순 당시 나이는 22살. 처음에는 평안남도 체육구락부에서

수영 선수 활동을 했던 경력을 살려 수영강사를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마땅한

직업을 찾기 위해 일은 힘들지만 수입이 괜찮다고 해서 인천 가좌동 진흥공단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도금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남한 사람들은 힘들다고 다 그만 두는

직장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안 힘들다’는 반응이다. 그후 녀석은 엉뚱하게도 유흥가에

서 여자를 오토바이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아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의

하는 바람에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른 채. 그후 슈퍼에서 맥주 박스를 실

어 나르는 배달 일을 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맥주 4박스씩을 등에 지고 지하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았으니 강단이 센 녀석이다. 어디 그 뿐인가. 새벽에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뭉터기로 사다가 길거리에 놓고 팔면 돈을 번다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이

일을 직접 하기도 했고,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생활비가 필요해서 단란주점, 카바레,

디스코테크 등을 누비며 웨이터 생활을 했다. 이때 녀석의 웨이터 이름은 ‘김건모’와

‘차인표’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기서 그친게 아니다. 녀석의 직업전선은 이후로

도 계속되었다. 젊은 사람들도 겁이 나서 올라가시 못하는 곳에 올라가 현수막을 거는

일로부터 현수막 주문을 받는 영업까지 따지고 보니 무려 17가지였다. 이런 것들이 보

통 귀순자들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고생 속에 승학이는 자본주의를

알게 되었다. 마침내는 나를 만나 요즘에는 대학을 휴학하고 나와 함께 우리의 보금자

리인 모란각의 지하에 자리잡은 커피숍 사장을 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사장이 되었으

니 사장 할 놈도 지지리도 없지. 이런 동생들에게는 더 없느 사랑과 포근한 정이 누구

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남한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귀순자들은 적지

않다. 그들을 위해 나도 우리 모란각 식구들과 함께 적은 힘이나마 지원사업을 준비중

이다.

씨앗

나 역시 낯설고 물선 땅에 아무런 대책과 준비없이 찾아왔다. 단지 한 핏줄 같은 고

국의 땅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내가 여기 와서 씨앗을 심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

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몇십년간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짓고 꽃을 피웠다. 오늘에 와서

는 메마른 땅이라 모두 다 콘크리트를 쳐버렸다. 그 콘크리트 친 땅마저도 내 땅 네

땅이 있으니 어디가 오줌도 함부로 쌀 여유마저 없어져 버렸다. 이 어리석은 촌놈은

이 넓은 땅에 조그마한 씨앗 하나 심을데 없겠나 하는 자신감에 찼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나의 생각 나의 꿈은 바보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 처럼 느껴

졌다. 이러기를 몇 년. 일산 신도시 어느 한곳에 드디어 씨앗을 심을 땅이 안에게 주어

졌다. 그 땅에 나는 씨앗을 심으며 물대신 많은 눈물로 습기를 주었다. 남들이 밤마다

편안히 잘때면 나는 잠도 잊은 채 그 씨앗을 키웠다. 바로 오늘에 그 씨앗은 모란각으

로 꽃을 피워 이 꽃이 아름다워 서울 뿐 아니라 전국, 아니 미국, 일본까지도 꽃을 십

어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온 내 귀중한 후배들이여! 후배들

이 가지고 온 씨앗을 비록 한 알에 지나지 않고 그 씨앗을 어디에 심을까 하고 몸둘

바를 몰라 망설이겠지만 그 씨앗은 꼭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

향기를 피워낼 때까지 잠과 시간을 아껴가며 정성을 다 하기 바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하지 않던가.

소변과 샤워

잠이 모자라는 인생. 어젯밤에도 잠을 잔 것인지 안 잔 것인지 모르는 채 또 하루가

밝아왔다. 몸은 일어났지만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흐리멍덩한 정신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나는 샤워실로 간다. 들어가기 바쁘게 나는 거울도 보지 않고 샤워기의 코

크를 연다. 발잔등에 떨어지는 물은 따뜻하기만하다. 이 정도의 온도면 되겠지 하고 샤

워기를 머리나 몸에 대는 순가 ‘앗 차가워 왜 이렇게 수돗물 온도가 맞지 않을까?’ 그

러나 정심ㄴ을 차리고 보면 수도코크를 연 것 뿐이지 발잔등에 떨어진 물은 수돗물이

안니 내 오줌물이다. 나처럼 이따금 이렇게 본의아니게 잠에 취해 오줌으로 발씻는 사

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잠이 모자라고

흐리멍덩한 기분에 샤워를 하고야 정신을 차리는 나의 인생의 하ㅜ는 시간을 아끼고

쪼개가며 일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귀중한 하루, 추억의 하루이다. 먼 훗날 통일이 되

는 날이면 가치있었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되리라.

겉보기 속보기?

나는 목욕탕을 자주 간다. 옷걸이가 나쁘다는 비방과 야유를 들을 때가 있다. 먹은

것은 다 어디 가고 어쩌면 그렇게 말라비틀어졌냐고. 하기는 북한에서도 남자는 두리

두리하게 살집이 있고 아랫배가 좀 툭 나와야 간부체격이라고 말한다. 또 이런 몸집을

갖춰야 목욕탕에서도 함부로 반말을 못하고 간부겠거니 짐작을 한다. 하물며 북에서나

남한에서나 명태처럼 땅땅 말라빠진 내 몸은 볼 품이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부러워 한다. 목욕탕에 들어가 옷을 벗기까지는 보잘 것 없는 체격

이라 하지만 막상 사우나에서 물을 끼얹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사람(남자)들의 시

선이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쏠린다.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 굳어진 나의 탄력있는

몸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골격과 구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는

“멋있네요”라고 탄성을 올리곤 한다. 이 기회에 나는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어

떻게 항상 옷을 벗어 보여주고 자랑을 하겠는가. ‘겉보기 속보기’라는 속담이 있지만

옛날 속담은 세월과 더불어 한두 가지 씩은 틀린 것이 있거늘 나의 초라한 겉옷 입은

것을 보고 남의 몸까지 함부로 평가히지 말기를 바란다.

굶주리는 나의 아이들, 나의 어머니!

그 옛날 북천강에서 멱을 감던 우리들은 대부분 맨발 차림이었다. 한 겨울철 골목

길에서 팽이놀이를 할 때도 맨발인 아이들이 많았다. 그중 몇몇은 여기저기 구멍난 양

말을 신고 있었고, 또 그중 몇몇은 어디서 얻었는지 제법 커다란 어른 신발을 신고 있

었다. 신발은 앞코와 뒤코가 튿어지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노끈으로 동동 동여매 아

이들의 작은 발에 억지로 붙잡아두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신발을 신고 살았다. 나이

가 들어 내 가 제법 아저씨란 말을 들을 나이가 됐을 때에도, 길에서 뛰어 노는 아이

들의 신발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결혼한 내 친구들이 불쌍했다. 어떤 친구들은 변변

한 옷이 없어서 오랜 만에 고향에 들린 나를 만나기 힘들어했따. 그런 건 아무렇든 괜

찮다고 생각하는 편한 친구들도 정작 아이의 벗은 맨발만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부모가 신발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애새끼가 맨발로 돌아다니며 발바닥

이곳저곳에 피를 흘리며 들어올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북한은 그렇게 가난하

다. 그나마 나는 스케이트 선수로 예술인으로, 또 달러를 만지는 무역인으로 살았기에

이런 가난에서 벗어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스케이트 선수 생활을 할 때도 나에0게

주어진 신발은 남한 어린이들이 신다가 질려서 버린 것보다도 못한 것들이었다. 어린

내가 얼마나 그 찢어진 스케이트 신발을 탓했던가. 신발만 새것이라면 미국 코쟁이도

다 이길 것만 같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1년 동안 신문지상에 가장 빈번

히 오르내렸던 화두중의 하나가 북한 식량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이다. 결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난은 이제서야 그 실체를 드러냈다.

세계식량기구가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의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아메리케어스’도 북

한을 방문했다. 덩달아 미국 방송사인 ABC와 CBS도 그곳에 다녀왔다. 지난 추석 연

휴 때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갔다 왔다고 한다. 하짐나 그들이 하는 말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북한의 식량난을 “엄살”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육을

먹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 지 한국 국민들은 헛갈

릴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월드비전의 앤드류 나치오스 부회장의 말이 가장 설득력있

게 들린다. 그가 둘러본 것은 식량난이 심가한 산간지방이 아닌 고장 평양 부근이었다.

아마도 그가 본 것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좋은 곳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어떤 장면과 마주쳤는가. 그가 평양에서 북쪽으로 2시간 이상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다른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려난이 심가한 듯하다고”고 추측했다. 또

평양 시내 길거리를 걸어다는데 50세 이상의 노인이나 5세 이하는 너무 허약해서 외출

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말을 북한의 고위 관리로부터 들었다. ‘최고’라던 탁아소의

실정도 말이 아니었다. 나치오스 부회장은 그곳에 수용된 어린아이의 40%가 영양실조

에 걸려있었다고 증언했따. 어린아이들은 너무 무기력해서 나치오스가 관심을 끌려했

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 또는 미국 정부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북한군의 전력강화 때문에 식량원조를 해선안된다고 생각하는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 아이들을 굶어 죽일 것인가.” 그의 말은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는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굶주린 아이들은 정치를 모른다”말과 일맥 상통한다. 그렇

다. 굶주린 아이들은 정치를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너희 어르신들이 군비강화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한-미-일-북의 4자회담에 고분고분 참여할 때까지 미안하지만 좀

굶어달라”고 말한다면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까지 정치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무조건 도와야하는 것이 한 동포, 한 인간이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다. 결국 통일 후에 그 영양실조에 걸린 허약한 아이들을 짊어질 사람은 우

리가 아니겠냐고 묻고 싶다. 어찌 그렇게 모른척하고 정치와 안보만을 따지고 있느냐

고 꾸짖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귀

순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북한에서, 특히 그 지도부를 경험해본 나 이기에, 나는

남한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모아 보낸 감자와 옥수수가 어디로 갈 지 잘 알고 있다. 그

아이들은 그 옥수수를 결코 먹지 못한다. 확실하다. 84년 서울에서 홍수가 났을 때 북

한은 남한에 쌀을 보냈었다. 이 답례로 남한은 경공업생필품을 보내왔다. 쌀배에 실려

온 그 답례품들은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중아당사 직속차량과 사회안전부 기동대차로

옮겨 실렸다. 관계자들은 물건들을 재정경리부창고에 쌓아놓고 상표를 뗄 수 있는 것

과 뗄수 없는 것들로 분류했다. 상표를 뗀 상품들은 중아당 각 부원이상에게 팔았다.

살결물(스킨로션)이 3원, 머릿기름이 6원 50전, 치마 저고리감 1백 50원, 담요 3백 60원

쯤이었다. 이중 담요가 특히 좋아 나도 한 장 샀다. 한 선전부원은 담요를 고이 모셔두

었다 몇 년 후 딸이 시집갈 때 혼수로 줬다. 상표를 뗄수 없는 것들은 외딴 곳에서 불

태웠다고 들었다. 남한이 당초에 인민들을 위해 써달라던 그 답례품들은 이렇게 공산

다의 살을 찌우는데 쓰여졌을 뿐이다.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다르다고 말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나마 먹을 것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굶어죽는 어린

이가 그렇게 많은데 설마 정부가 모른 척 하겠냐고, 그러니까 우리도 적극적으로 북한

동포들을 위해 힘으 모으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고마운 말이지만 맞는 말

은 아니다. 남쪽 적십자가사가 옥수수 5만톤을 보냈고, 경실련, 전경련 등의 단체가 1

만톤의 옥수수를 모으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북한 천연덕스럽게 수천톤의 옥수수

를 해외에 수출하는 상식 이하의 행도을 보였다. 지난 7월에는 비무장지대에서 총격전

까지 벌였다. 이 일로 한동안 북한 어린이를 도와야한다던 여론도 등을 돌렸다. 탑골공

원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북한동포돕기 행사는 공원내 노인들의 육탄 저지로 아수라장

이 됐다. 노인들은 “먹을 것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대포로 은혜를 갚는 놈들에게 무슨

지원”이냐며 핏대를 세웠다. 나는 모금운동을 저지하는 노인들이 야속하지 않았다. 한

말 한말 옳은 말씀만 하시기에 오히려 송구스러웠다. 북한 식량난을 돕는 문제는 단순

히 굶고 있는 이웃 아이들과 밥을 나눠먹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여기엔 식량문제뿐

만이 아닌 ‘안보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논리로 설득한다해도 촉을 겨누고 있

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

까. 이렇게 그 아이들이 굶어 죽도록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냉면 집 사장으로 날

마다 남아 돌아가는 음식을 보고 사는 나는 그만큼 더 가슴이 아프다. 손님들이 먹다

남긴 김치 한 접시, 냉면 반 그릇을 다 모은다면 고향 어린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

을 텐데. 이곳 남한 아이들은 유난히 군것질도 많이 하고 오히려 비만아동들이 많아

걱정이라는데. 그들은 왜 이 한세상 잘못 태어나 그리도 말라가는가. 나는 내가 직접

트럭에 모란각 만두와 냉면을 싣고 강계로 달여보는 꿈을 꾸었다. 되도록 많은 음식을

실어야하니 덤프 트럭 5대는 빌려야할 것이다. 먹을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팬티만이라

도 몇천장 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칫솔과 치약도 실어야겠다. 그런데

강계에 도착해서 물건을 나눠주고 돌아올 때쯤이면 휘발유가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휘발유를 구할 수 없는 곳이니 여기서 떠날 때부터 가져가야 한다. 휘발유 싣고, 옷 싣

고, 음식 싣고 그렇게 몇십시간을 달려간 내 덤프트럭이 과연 몇 명의 북한 어린이를

구할 수 있을까. 달려가다가 인민군의 단속에 걸리면 모조리 빼앗길 테지. 빼앗긴 구호

물품은 다시 잘 포장되어 군대로 보내지겠지. 이렇게 고향 땅의 아이들을 구해보려던

내 꿈은 실패로 돌아간다. 어쨌든 그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옥수

수도 감자도 쌀도, 결코 보내서는 안된다. 북한의 본심은 아직도 ‘적화통일’이다. 이것

만이 최대의 목표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굶어죽든 말든, 우선 가장 배부릴 먹어야 할

사람들은 군인들이다. 항생제 등의 기초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주민들도 의약품을 필요

로 하지만 우선 군인들이 먼저다. 남한이 의약품을 보낸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들 역시

군인들이다. 그렇다면 군인들이 손 대지 못할 것들을 생각해보자. 군인들은 흥미가 없

고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없을까. 아이들이 먹는 분유. 연유 등이

어떨까. 아이들의 작은 발에 맞는 운동화는 어떨까. 아이들의 감기에 잘 듣는 기침약은

어떨까. 이런 것들은 인민군들이 가져간다 해도 별로 쓸데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농사

를 지어야 할 농민들을 위해 호미와 괭이 등의 농기구를 보내는 게 어떨까. 농민들이

신을 장화를 보내는 게 어떨까. 농사를 지어 어서 빨리 곡식을 생산해야할 이들이 신

발이 없어 논밭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쌀도

옥수수도 아닌,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신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성금

함에 백원짜리 동전 한닢을 넣어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부탁한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에

서 대포를 쏘고 남북적십자 회담을 거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북한 동포에 대한 애

정만 있다면, 무엇이 무서우랴. 언젠가 부둥켜 안게 될 한 민족, 한 가족인데…….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점 세가지

그래도 아직 북한은 부자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굶주림으로 50만명이 사망한 북한이 어떻게 남한보다 좋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으로 볼 때 남한은 북한보다 월등하다. 언뜻보기에 자본주의라는 것이 워

낙 기초없는 체제라서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공산주의보다 훨씬 튼튼한

질서를 갖고 있다. 사람은 이념이나 체제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 마음대로 살도록 그

냥 내버려졌을 때 훨씬 자신의 한계와 테두리를 잘 깨닫는 듯하다. 남대문이나 동대문

의 새벽시장을 가보면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온 세상이 잠자고 있을 때 땀 흘리

며 일하는 젊은이들. 누가 그렇게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한국의 얼굴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사는 6년 동아 내가 그리워한 북한의 얼굴이 따로 있다. 그 얼굴들은 좀처럼 남한에서

는 찾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어쩌면 좀 더 오래 전. 호랑이가 담배 피던 옛날에는

남한에도 그런 얼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다. 아마도 물

질적인 풍요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이유 중 첫 번째는, 그들이 쓰는 언

어에 빈말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남한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언어에 많이 희롱당했다. “밥 먹었어요?”란 말에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밥을 사주고 싶

어하는 줄 알고 “아직이요”라고 말하며 고마워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어유, 배고프

시겠네요”하며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닌가. 북하에서 “조간 잡샀수?”, 혹은 “밥 먹

었난?”은 만약 안 먹었다면 지금 같이 먹자는 뜻이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안녕하슈”,”잘 지냈어요?”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명함을 건네주며 “꼭 전화

하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를 헛갈리게 했다. 꼭 전화하라는 말에 나는 안하면 안

되는 줄알고 정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누구인줄도 기억하

지 못했다. “김용 씨,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도 이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진짜로 놀러오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남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열심히 사세요”란 말도 나를 헛갈리게 한다.

내게 “열심히 일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들 앞에서 열심히 일하겠다. “열심히 공부하세

요”라고 말한다면 되도록 공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겠다. 하지만 날더러 “열심히 사

세요”라고 말함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 열심히 사는 모습인지 나

는 정말 모르겠다.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이유 두 번째는 인간관계의 성숙과 느림에

있다. 한국은 지나치게 빠른 것을 좋아한다. 음식은 빨리 만들어 지는 패스트푸드가 최

고고 옷도 금방 백화점에 출시된 신상품이 최고다. 옛날 노래는 다 구식이고 옛날에

샀던 신발은 다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도 옛 사람보다는 새 사람을 원한다.

사랑도 하루면 뜨거워지고 또 하루가 지나면 차가워진다. 하지만 북한에는 아직도 옛

것에 대한 향수가 있다. 새 신발보다 헌 신발의 가치를 아는 나라다. 인간관계도 이렇

게 ‘지금’보다는 ‘옛날’을 중요시 여긴다. 오늘 만난 사람이 아무리 좋았어도 어제 만난

친구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난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 어깨를 툭

툭 치며 친한 척을 하는 사람들을 볼 대 무척 당황한다. 처음 만난 날 할 얘기 안할

얘기를 죄다 털어놓은 사람도 곤혹스럽다. 이런 사람들은대부분 얼마 후 전화를 해보

면 이미 나 같은 존재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일 뿐. ‘누

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때 길게 뜸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그 친구를 전부 알려고 덤비지 않는다. 너무 가까이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

천히 사귄다.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 오래 묵힌 된장처럼 진하다. 자주 만나지 않더라

도 서로를 믿으며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 좋은 말로 귀를 간질일 이

유도 없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세 번째 이유는 안면몰수하는 사람이 없

다는 것이다. 툭하면 삐지는 남한 사람들. 여자들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더욱 웃긴 것은 이렇게 삐지면 우연히 만나도 나를 모른척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내

얼굴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금새 못 본척 얼굴을 돌린다. 마치 못볼 것 봤다는 듯이. 북

한 사람들도 물론 싸우고 토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면몰수하는 법은 없다.

싸운 것은 싸운 것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라도 길에서 만난 아

는 사람을 모른 척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는 것이다. 가진 것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남한이지만 솔직함과 담백함. 인간밀에서는 북한이 한 수 위다.

비록 투박한 말투를 쓸 망정 가식적인 예의는 없으며, 먹지 못해 굶주릴지언정 친구를

생각하는 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아직도 부자다.

촌놈 귀순자를 감동시킨 남한의 명작들

내겐 좀처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기회가 없다. 남한에 와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영화표를 예매해서 영화를 본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모란각 지하카페에서 고스

톱을 치다가 누군가 틀어놓은 비디오르 얼떨결에 보기는 했어도 말이다 .아직 어떤 책

이 좋은 책이고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북한처럼 모

든 것이 당의 지시아래 일률적으로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살다 온 나는 모든 책이 놀랍

고 모든 영화가 충격적이다. 그리고 영화이름과 배우 이름은 아무리 외워두려고 해도

도통 외워지지 않는다. 곱고 잘빠진 것이 다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촌놈

귀순자를 감동시킨 몇몇 작품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그 작품들이 나를 감동시켰

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명작’이라고 감히 칭해본다. 내 기준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의외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북한 촌놈을 감동시킨

것이라면 북한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을 것이다.

씨받이(영화) 모스크바로 출장을 갔을 때 누군가 몰래 구해온 이 비디오를 보았다. 남

조선 영화라고 해서 뭔가 건전치 못한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 영화는 북한 주민

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만한 한국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를 잇는 것

이 여성의 가장 큰 임무였던 조선시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한 여자를 위해 대신

씨를 받으러 또 다른 여인. 두 여자의 미묘한 심리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 그러

나 씨받이는 아이를 낳은 후 쫓겨나고 결국 아이를 그리워하다 목매달아 자살한다. 영

화보다 더 나를 감동시킨 것은 씨받이 역을 맡은 배우 강수연이었다. 그녀는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강계에서 최고 미인에 속할 여자였다. 남남북녀라고 남한에는 미인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강수연 같은 미인이 있다니. 남한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불러일으

킨 영화였다.

여명의 눈동자(드라마)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역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꿰맞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제 식민지시대 정신대로 착출된 한 소녀의 이

야기에서 시작하여 그 소녀가 한국전쟁을 겪고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변해

가는 모습, 동시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불타는 한 남자와 자본주의에 길들여지는

또 다른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를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남한에 내려와 벌였던 갖가지 행태. 제주 4.3사

건, 그리고 북한에서 말한 제2전선이 빨치산의 사투였다는 것 등등. 이 방대한 역사를

한편의 드라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도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

되는 수요일과 목요일이면,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드라마 보는 재미

와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에 듬뿍 빠졌던 것이다.

모래시계(드라마) 한국 현대사는 내게 여전히 백지로 남아있을 때였다. 여명의 눈동자

팀이 이번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길래 조금 흥분했었다. 그 내

용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여명의 눈동자 팀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

다. 과연, 모래시계는 대단했다. 첫 방송부터 학생 데모대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웠

다. 북한에서는 이들이 공산주의를 원하며 남조선을 비난하는 시위대라고만 알고 있었

다. 하지만 학생들이 시위하는 이유는 그것과 또 달랐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원하는 것

도,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민

주주의’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광주항

쟁과 같은 집단학살로 끝나다니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 책을 다 읽은 후 이 책이 단지 소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역시 읽는 동안의 즐거움은 대단했다. 한국인 천재 물

리학자 이휘소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고 정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가 결국 암살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북한의 역할도 비중있

게 다루었다. 과연 그날이 올지 모르지만, 꼭 핵무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처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뭔가를 개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버지(소설) 지난 한여름 밤, 육수를 끓이면서 이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육수를 끓

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육수통에 뚝뚝 떨어졌을 정도다. 한 가정의 기둥, 그

아버지들이 이렇게 힘없이 흔드리다니, 아내는 남편을 무능하다 생각하고, 딸은 냉랭하

기만 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덜컥 암을 선고

받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한 것은 가족을 위한 보험료와 자신

의 신장과 두 눈뿐. 언젠가는 나도 이런 모습의 아버지가 될까. 이왕이면 아내와 자식

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이렇게 외롭게 혼자 죽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는 않다.

에피로그- 인생에는 마침표가 없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 세 번째 자서전이 완성됐다. 사실 앞서 냈었던 두 권의 책은

남과 북의 실상을 알리고 두 나라간의 차이점을 좁히려는데 중점을 두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자서전이 아니다. 정말 나를 주인공으로 쓴 책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

책은 객관성을 잃었다. 이 책게 담긴 내용은 순전히 김용이라는 사람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담았을 뿐이다. 덕분에 이 책을 쓴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

다도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 감정 그대로를 안고서 이 글을 썼다. 내가 주인공이

니 남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 생각나는 그대로 써서 나 자

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그것은 대단히 색다른 체험이었다. 생각해 보라. 공

산주의하에서 자란 내가 어찌 나 자신만을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겠는가. 자유에 나라

에 온 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나를 하찮게 여기는 버릇은 여전했다. 하다

못해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내가 뭘 먹을 것인가 보다 남들이 뭘 먹는지가 더 신경이

쓰였다. 남들이 모두 김치찌개를 먹겠다하면, 나는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도 어쩔 수 없

이 김치찌개를 시켰던 것이다. 나에게 ‘나’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은 ‘냉면’이었다. 육수

를 끓이며 지샜던 그 수많은 밤을 통해 내 인생 처음으로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육수 맛도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의 미완성 상태의

김용을 청산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김용으로 성숙해가면서, 드디어 사람들에게

나의 육수를 자랑할 수 있었다. 맛있습니다. 진국입니다. 드셔보세요. 그렇게. 그리고

이제 이 한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여기엔 모란각 육수만큼의 맛과 향이 배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다 맞출 수는 없겠지만, 읽고 난 뒤 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면 족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해주신 큰 바위 출판사의

이영수 사장님과 김주혁 주간님께 감사드린다. 두 분은 더운 여름을 핑계 대며 차일

피일 마감을 미루는 나를 잘 참아주셨다. 멀리서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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