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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의 방 | [서프라이즈: 비밀의 방]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거짓말 | 메리 수랏, Mbc 220406 방송 166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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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암살 사건! 남군을 지지하던 연극배우 ‘존 부스’에게 암살당한 링컨대통령
암살에 가담한 공범들이 머물던 하숙집의 주인 ‘메리 수랏’
그녀도 공범으로 몰리게 되는데 과연 그 날 있었던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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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의 방 지식 논쟁 | HiSoUR – 안녕하세요.

지식 논증 (메리의 방 또는 슈퍼 과학자 인 Mary라고도 함)은 프랭크 잭슨이 “Epiphenomenal Qualia”(1982)의 논문에서 제안하고 “Mary가 알지 못하는 것”(198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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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isour.com

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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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와 같은 색일까 | 러비

언뜻 보면 왜 메리라는 불쌍한 소녀를 괴롭히는 건지 잘 모르겠는 이 실험은 80년대 프랑크 잭슨이 제시한 이른바 ‘메리의 방’이라는 사고실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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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ubyweb.kr

Date Published: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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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감각질(感覺質) 또는 퀄리아(qualia)는 어떤 것을 지각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분, 떠오르는 심상 … 이에 따르면 메리의 방에서 메리가 나왔을 때 메리가 새로이 얻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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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19/2021

View: 5127

찐따의 인문학 특강 (1) – 메리의 방 실험 | 일베-일간베스트

주의: 철학글임 (나름 흥미로움) 다음의 가정을 생각해보자. 여기, 메리라는 뇌 과학자가 있다. 메리는 흑백의 방에서 살며, 흑백의 책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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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lbe.com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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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메리와 감각질 – 네이버 블로그

흑백 방 안에서 자란 소녀, 평생 색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 자란 소녀 메리는 ‘색’이라는 것을 이해할까? 나는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않을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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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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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비밀의 방]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거짓말 | 메리 수랏, MBC 22040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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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메리의 방

  • Author: 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 Views: 조회수 51,5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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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kqTAzEXwaY

매리의 방

Qualia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Qualia는 한국말로 번역하기 아주 어렵고, 영어권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철학 용어입니다. 직접적으로 번역을 하기보다는 그 예시들을 들을 때 이해하기가 쉬운 용어인데요. 커피의 향을 맡을때 우리가 느끼는 경험은 Qualia의 일종입니다. 이렇게 어떠한 순간에 느껴지는 주관적인 의식과 감정들을 통틀어서 Qualia라고 부를 수 있는데요. 이러한 Qualia 가 뇌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는가 없는가, ’ 그로 인하여 특정 뉴런의 연결 상태가 초콜릿을 먹을 때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문제들은 철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주 좋아하는 대화 주제이죠. 오늘은 이 Qualia 그리고 Consciousness와 관련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1974년에 미국의 철학자 Thomas Nagel 은 What it is like to be a bat이라는 리뷰 논문을 개제합니다. 이 논문은 이후로 철학과 뇌과학 분야들을 통틀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논문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박쥐가 된다면 거기에 ‘박쥐 다움’이라는 Qualia가 존재하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쥐스러움’ 혹은 ‘박쥐’라는 Qualia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Consciousness 즉, 의식이라는 겁니다.

의식에 대한 연구는 뇌과학과 철학 그리고 여러 가지 범주를 넘나드는데, 19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뇌과학에서 의식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고, 주로 철학에서 연구가 되었습니다. 주로 철학에 관련되어서 연구되었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연구와 질문들은 아주 깊은 사고를 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포인트를 놓치기가 쉽습니다.

다시 Nagel의 논문으로 돌아가 보죠. 시작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느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의 도구들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시각’이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능력을 몇 가지 예시를 들어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표현방법과 그 표현을 알아듣는 능력 또한 이 능력을 경험해본 인간에게만 가능하죠. 재미있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석양이 지는 것을 보는 ‘시각적 경험’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신가요?

우리의 대화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아~ 저번에 석양이 지는걸 어디에서 봤는데 그때 진짜 이쁘고 아름답더라’라고 한 사람이 말하면 그 대화의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를 뇌 속에서 그릴 수 있고 그에 따라서 부연적인 설명 없이 그 짧은 문장 하나 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 뇌의 능력이지, 실제로 우리가 언어나 특정 정보교환 매개체를 통해서 그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치들과 능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당연시 여겨지는 탑재된 능력들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느낌’을 구성하죠.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경험 혹은 느낌’을 주관적인 경험의 특성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주관적인 경험의 특성은 의식을 구성하는 한 부분 요소입니다. AI(Artificila Intelligence)가 활발히 연구되며,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대중의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는 요즘에 의식 만큼 재미있는 철학적 주제가 없지요. 여기서 매리의 방(Mary’s room)이라는 철학 사고 실험이 등장합니다. 이는 Frank Jackson이라는 미국의 철학자가 제고한 사고 실험인데, Nagel의 논문과 많은 중요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Mary’s room

매리의 방 사고 실험은 어디까지나 사고 실험이기 때문에 철학자가 어떠한 논점을 만들고자 함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변형된 사고 실험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미국 Caltech의 이론물리학자 Brian Greene이 그의 최신 저서 Until the end of time이라는 책에서 사용한 버전을 사용해보겠습니다.

“먼 미래에 매리라는 아주 똑똑하지만 태생적으로 색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녀에게는 세상의 모든 게 흑백으로 보였죠. 그녀의 이러한 특징은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리는 스스로 원인을 찾아 공부하기로 하죠. 그녀 스스로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매리는 몇 년간의 지속적이면서도 아주 열성적인 공부와 연구를 해나갑니다. 그 결과 매리는 뇌의 모든 구조적, 기능적, 생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물리학적 디테일을 밝혀내며 세상이 본적 없는 최고의 뇌과학자가 됩니다. 그녀는 뇌의 범연결적 기능부터 가장 작은 단위의 기능까지 ‘밝혀질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을 밝혀내고, 우리가 석양을 볼 때 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뉴런의 활성과 단백질의 신호체계를 알아냅니다.”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메리는 본인 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를 알아낸 다음, 이를 고치기 위해서 수술에 들어갑니다. 몇 달이 지나, 수술을 진행했던 의사들이 그녀의 안대를 제거할 준비를 하고, 그녀는 완벽히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장미꽃 한 다발 앞에 서있는 그녀는, 서서히 그녀의 눈을 엽니다.”

여기에서 매리의 방의 핵심 포인트가 나옵니다.

“빨간색이라는 색을 처음으로 접한 매리, 그녀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까요?”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합니다.

우선 이 사고 실험을 논문으로 낸 Jackson은 논문을 기고했던 당시 이러한 포인트를 만들었습니다. “빨간색을 처음으로 본 매리가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이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완벽한 물리적 이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포인트를 삼아서 Jackson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새로운 무엇인가가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것이고, 우리의 의식은,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연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 실험은 많은 동시대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도 많이 인용되는 중요한 논문입니다. Jackson의 논리적 연역을 반박했던 사람 중 두 명만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철학자 Daniel Dennet은 이 사고 실험의 기본적인 설정에 질문을 던집니다. “완벽한 이해도란 무엇인가. 매리는 물리학적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해하였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Dennet의 포인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을 설명한 ‘완벽한 이해’, ‘완벽한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Jackson은 ‘완벽한 이해와 지식’이 가지고 있는 가능적인 힘을 저평가했다”라는 것입니다. Dennet은 “완벽한 물리적 이해를 기반으로 매리는 눈을 뜨고, 빨간색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던 빨간색에 대한 예측을 확인시켜주는 것 그 이상은 아닐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David Lewis는 이 사고 실험의 해석에 질문을 던집니다. “매리가 빨간색을 접하고 배우는 건 새로운 ‘능력’이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안대가 제거됨에 따라서, 매리는 빨간색을 보고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정도의 반응 정도를 보이겠지만, 그녀가 빨간색을 보고 감탄을 한다면 그것은 그저 그녀가 그녀의 오래된 지식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색하는 방식일 뿐이다”라고 매리의 방 사고 실험에 답하죠.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철학자들이 이 사고 실험에 답변을 현재까지 던져왔고, 디테일한 사고 실험의 기술이 틀리거나 맞을지언정, 이 사고 실험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Qualia란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의 Consciousness에 대해서 무엇을 조명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Qualia에 대한 고찰로부터 Conscioiusness의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음에는 여기서 짧게 다뤄진 Thomas Nagel의 논문 What it is like to be a bat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유튜브에 이 글과 관련된 동영상도 만들었습니다. 조금 더 쉬운 이해를 도와주니 참고하세요.

메리의 방 지식 논쟁 – HiSoUR – 안녕하세요.

지식 논증 (메리의 방 또는 슈퍼 과학자 인 Mary라고도 함)은 프랭크 잭슨이 “Epiphenomenal Qualia”(1982)의 논문에서 제안하고 “Mary가 알지 못하는 것”(1986)에서 확장 한 철학적 사고 실험입니다. 이 실험은 물리적 인 것, 즉 모든 것이 정신적 인 것을 포함하여 우주가 전적으로 물리적이라는 견해를 논하기위한 것입니다. 출판 후 발표 된 논쟁은 Daniel Dennett, David Lewis 및 Paul Churchland와 같은 철학자의 대답을 포함하는 편집 된 권 – Mary ‘s Something About Something About (2004)의 주제가되었습니다.

배경

Mary ‘s Room은 의식이없는 경험을 통해서만 발견 할 수있는 비 물리적 속성과 달성 가능한 지식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생각의 실험입니다. 그것은 모든 지식이 육체적 지식이라는 이론을 논박하려고 시도한다. D. Broad, Herbert Feigl, Thomas Nagel은 50 년 동안이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하여 Jackson의 제안 된 사고 실험을 이끌었다. Broad는 다음과 같은 말을하고, 천사장이 무한한 수학 능력을 가지고있는 생각 실험을 묘사합니다.

그는 정확히 암모니아의 미세 구조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코에 들어갈 때 암모니아가 냄새를 맡을 때이 구조의 물질이 냄새를 맡아야한다는 것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이 주제에 관해 예측할 수있는 최대 점은 특정 변화가 점막, 후각 신경 등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그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나 자신을 위해 냄새를 맡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냄새가 나거나 특히 암모니아의 냄새가 나타나는 것을 이러한 변화가 수반한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대략 30 년 후, Feigl은 유사한 개념을 표현합니다. 그는 화성인과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우려한다. Feigl는 말합니다 :

… 화성인은 이미지화되거나 감정 이입되는 종류의 퀄러티에 친숙 (직접적인 친분)에 의존하는 일종의 이미지와 공감에 완전히 빠질 것이다.

Nagel은 약간 다른 접근법을 취합니다. 자신의 주장을보다 융통성 있고 논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박쥐의 음파 탐지 능력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입장을 취합니다. 손가락으로 전체 물리적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더라도 인간은 박쥐의 음파 탐지기 시스템을 완전히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박쥐의 음파 탐지기로 무엇인가를인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생각한 실험

생각한 실험은 원래 Frank Jackson이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메리는 어떤 이유로 든 흑백 TV 모니터를 통해 흑백 공간에서 세계를 조사해야하는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그녀는 비전의 신경 생리학을 전문으로하고 익숙한 토마토 나 하늘을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빨강”, “파랑”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가정합시다. 에. 그녀는 예를 들어 하늘과의 어떤 파장 조합이 망막을 자극 하는지를 정확히 발견하고 정확히 어떻게 이것이 중추 신경계를 통해 성대의 수축과 폐에서 공기를 배출 하는지를 발견합니다. 하늘은 파란색 “입니다. […] Mary가 흑백 방에서 풀려나거나 컬러 텔레비전 모니터를 받으면 어떻게됩니까? 그녀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습니까?

즉, 잭슨의 마리아는 색의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색을 경험 한 적이없는 과학자입니다. 잭슨이 제기하는 질문은 : 일단 그녀가 색깔을 경험하면,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인가? 잭슨은 자기가 주장한다.

이 사고 실험에서 잭슨이 내린 주장의 전제와 결론을 요약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Paul Churchland는 다음과 같이 그렇게했습니다 :

Mary는 뇌 상태와 그 속성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리가 감각과 속성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그 속성은 뇌 상태와 그 속성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Jackson은 Churchland의 공식화가 그의 의도 된 주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Churchland의 공식화의 첫 번째 전제에 반대합니다. “지식 주장의 전체적인 추진은 Mary가 (그녀의 석방 이전에) 그녀가 어떤 qualia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뇌 상태와 그 속성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논쟁에 따르면 완성 된 것은 육체에 대한 지식이 육체적 인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을 제안한다.

메리 (그녀의 석방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알기 위해 물리적 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리 (그녀의 석방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알 수있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석방 될 때 그들에 관해 뭔가를 배우기 때문에).

그러므로 물리 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피하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지식 논쟁에 대해 토론하는 대부분의 저자는 Mary의 경우를 인용했지만 프랭크 잭슨 (Frank Jackson)은 정액 기사에서 일반적인 예를 들어 알지 못하는 색을 보는 프레드 (Fred)의 사례를 사용했습니다.

시사점

마리아가 색을 경험할 때 새로운 것을 배울 지 여부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 퀴아의 존재와 물리주의에 대한 지식 논증.

퀄리아

첫째, 마리아가 새로운 것을 배울 경우, 그것은 퀴어 (경험의 주관적, 질적 특성, 행동과 처분에 전혀 무관 함)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방을 떠난 후에 마리아가 뭔가를 얻는다면, 그녀가 전에 소유하지 않은 특정한 것에 대한 지식을 얻게된다면 그 지식은 잭슨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특정 퀘일에 접근 할 수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퀄러 아가 진짜 물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물리주의의 논박

잭슨은 마리아가 색을 경험할 때 새로운 것을 배울 경우 물리주의는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지식 주장은 정신 상태에 대한 물리적 설명의 완전성에 대한 물리주의 주장에 대한 공격이다. 메리는 색 지각의 과학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색을 본 적이 없다면 적색의 경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잭슨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웠기 때문에 물리주의가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가 세상과 그것의 시각적 경험에 관해 뭔가를 배울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전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피할 수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신체적 인 정보를 가지고있었습니다. 자아는 그 이상이 있어야하며, 육체주의는 거짓입니다.

변증론

잭슨은 생리학의 설명이 완벽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모든 행동은 어떤 종류의 육체적 인 힘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고 실험은 정신의 비 물리적 부분 인 퀴 아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잭슨 박사는이 두 논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신 현상은 신체 상태에 의해 야기되지만 물리적 세계에는 인과 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진화론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설명 완전성

생리학 + 감각의

(마리아의 방) = epiphenomenalism

따라서 사고 실험의 개념에서 잭슨은 변증가였다.

응답

논쟁을 거듭해야한다는 논란이 제기되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비판적 시험을 통해 발생한 사고 실험에서 다양한 구멍을 언급합니다.

Nemirow와 Lewis는 “능력 가설”을 제시하고 Conee는 “아는 가설”을 주장한다. 두 접근법 모두 마리아가 새로운 지식을 얻지 못하고 대신에 다른 것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실제로 새로운 명제 지식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면 그녀가 얻는 것은 물리 주의적 틀 안에서 설명 될 수있다. 이것들은 잭슨의 사고 실험에 대한 두 가지 주목할만한 이의 제기와 그것이 내놓으려고하는 주장입니다.

사고 실험의 설계

어떤 사람들은 사고 실험 그 자체로 묘사 된 시나리오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잭슨의 주장에 반대했다. 예를 들어, Evan Thompson은 단순한 환경에 국한 됨으로써 Mary는 꿈을 꿀 때, 눈을 문지른 후 또는 가벼운 지각으로 인한 잔상에서 색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색 경험이 없다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엄과 호건은 사고 실험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련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리아를 흑백 방에 위치시키는 것보다는 출생시 색을 경험할 수 없다고 규정 할 수도 있지만 의료 절차를 통해이 능력을 부여 받았다. 나중에 인생. Nida-Rümelin은 색면의 과학 (Graham과 Horgan이 제안했지만)이 시나리오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 겠지만 생각이 실험의 효능에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일어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심지어 생각의 실험에서 묘사 된 것처럼 Mary의 환경이 조성되었다고하더라도, 그녀가 흑백의 방에서 나와서 붉은 색을 보았을 때 실제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라는 반대가 제기되었습니다. Daniel Dennett은 “색에 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인간의 신경학이 왜 우리에게 색의 “품질”을 느끼게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드시 포함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 지식은 빨간색과 다른 색상을 기능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방을 떠날 때까지 붉은 색을 보면서 무엇을 기대해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있었습니다. Dennett는 기능적 지식은 결코 경험할 수없는 ‘Qualia’를 남기지 않고 경험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J. Christopher Maloney도 비슷하게 주장한다.

논증이 허락한다면, 마리아는 색체의 본질에 관해서 알 수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된다. 그녀는 색체 비전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있는 위치에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 인 상태 Sk에있는 것과 같을 것이고, Mary는 그런 신체 상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Sk에 가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녀가 sk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입니다. 우리와 달리 그녀는 Sk와 색맹 시력의 다른 상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할 수 있습니다 … 그녀에게 색맹 상태의 신경 생리학의 표기법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주면 그녀는 그러한 시각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있을 것입니다. 상태는 같을 것이다.

그러나 잭슨의 논쟁에 관한 문헌을 조사한 Nida-Rümelin은 많은 사람들이 Mary가 Jackson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물리학자를 포함하여 방을 떠날 때 새로운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의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 나 지식이 감금 된 후에 그녀의 방식대로 온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이 견해는 지식 논증에 대한 물리 주의적 견해로 받아 들여질 만하다. 일부 철학자들은 Mary가 방을 떠나기 전에 색안경에 대한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Jackson의 첫 번째 전제에 반대했다. 오웬 플래너 건 (Mr. Owen Flanagan)은 잭슨의 사고 실험이 “패배하기 쉽다”고 주장하며, “마리아는 완벽한 물리학, 화학 및 신경 과학의 어휘로 표현 될 수있는 색각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있다”고 인정하고 “형이상학 적 물리학” 및 “언어 물리학”

형이상학 적 물리주의는 단순히 존재하고있는 모든 것이 물리적 인 것들과 그 관계라는 것을 단언한다. 언어 물리학은 모든 물리적 인 것이 기초 과학의 언어로 표현되거나 포착 될 수 있다는 논제입니다 … 언어 물리학은 형이상학 적 물리주의보다 강하고 그럴싸합니다.

플라나간은 마리아가 “명백하게 물리적 인 언어”로 표현할 수있는 모든 사실을 가지고 있지만, 언어 물리학을 받아들이면 모든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형이상학 적 물리 주의자는 언어 적 물리주의를 단순히 부인할 수 있으며, 언어로 표현 될 수는 없지만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물리적 세계에 관한 사실이라는 것을 마리아가 배우는 것을 배우게한다는 것을 주장 할 수 있습니다. Flanagan과 마찬가지로, Torin Alter는 Jackson이 물리적 인 사실을 ‘논리적으로 배울 수있는’사실과 정당화하지 않고 섞는다 고 주장한다.

… 다양한 종류의 의식 경험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은 순전히 담론 적 수단을 통해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모호하지 않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러한 경험이 물리적 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추론 할 수는 없습니다.

Nida-Rümelin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물리적 속성과 물리적 사실이 단지 표현할 수있는 속성과 사실이라는 가정을 버리면 재산이나 사실이 물리적 인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물리적 용어. ”

능력 가설

잭슨에 대한 몇 가지 이의 제기는 Mary가 방을 떠날 때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얻지는 않지만 오히려 새로운 능력을 얻는다는 이유로 제기되었습니다. 네미 로우 (Nemirow)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경험을 상상하는 방법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루이스는 마리아가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 할 수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기했다. 잭슨의 지식 논증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은 처음으로 적색을 보았을 때 누군가가 진짜 발견을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녀의 발견은 그녀가 석방하기 전에 이미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얻은 것은 새로운 사실보다는 새로운 능력의 발견이다. 색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녀의 발견은 단지 그녀가 어떤 일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에서 비롯되지만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고려 사항에 비추어 Churchland는 “어떻게 알았는지”와 “그것을 안다”라는 두 가지 감각을 구별합니다. 어디에서 능력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과 사실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는 각 유형의 지식이 뇌에서 표현되는 서로 다른 위치에 호소하여 이러한 이의 제기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논리적으로 물리적 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레빈은 새로운 색 경험은 사실 “색의 유사점 및 다른 색과의 호환성 및 다른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와 같은 새로운 사실 ​​지식을 산출한다고 주장합니다.” Mary가 가질 수있는 (그리고 생각 실험의 규정에 따라) 가질 수있는 Tye 카운터는 색을 직접 경험할 필요없이 실내를 떠나기 전에 그러한 모든 사실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Mary는 문제의 색상을 경험하지 않고 “빨간색이 녹색보다 오렌지색과 비슷합니다”라는 사실을 알 수있었습니다.

색을 보는 것을 상상할 능력이있는 백작 (Earle Conee) 개체는 그 색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필요하거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즉, 능력 가설은 Mary가 방을 떠날 때 얻는 새로운 지식의 성격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Conee는 색을 볼 수있는 사람의 예를 인용하지만, 색을 볼 때 색을 볼 수는 있지만, 색을 상상할 수있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을 쳐다 보면서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빨간색으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상상력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나타 내기 위해 Conee는 다음과 같은 예를 소개합니다. “경험 한 중간 색조를 경험하는 데 매우 능숙한 Martha. .. 벚꽃 빨강으로 알려진 그늘에 익숙하지 않아야한다. ” 마사는 체리 레드가 포도주 색 레드와 파이어 레드의 중간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녀는이 두 가지 색감을 경험했지만 체리는 아닙니다). 이것으로 마사는 체리 레드를 상상할 수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체리 레드를 상상할 수없는이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체리 레드를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상상력은 색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필요하거나 충분하지 않지만 상상력 이외의 능력을 사용하는 능력 가설의 버전을 보존한다는 Conee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Gertler는 Mary가 얻은 것이 색상을 상상할 수있는 능력이 아니라 경이로운 품질로 색상을 인식하는 능력에 대해 논의합니다.

가설 가설

능력 가설에 대한 그의 불만으로 인해, Earl Conee는 또 다른 변종을 제시합니다. 코니 (Conee)의 지인 가설은 사실 지식이나 노하우로 축소 할 수없는 지식의 세 번째 범주 인 “경험을 아는 지식”을 나타냅니다. 그는 Mary가 실제로 발표 이후에 얻은 지식은 지인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지인에 의한 경험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수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알려진 주체에 익숙해야합니다”. “품질을 경험하는 것이 품질을 파악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기 때문에”Mary는 출시 후 색상 품질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Conee는 다음과 같이 지식 주장에 대해 자신을 방어합니다.

Qualia는 경험의 물리적 속성이며 경험은 물리적 프로세스입니다. Q를 그런 속성으로합시다.

Mary는 Q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릴리스 이전에 Q에 Q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릴리스 전에는 Q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릴리스 이후 메리는 Q에 익숙해졌지만 Q에 익숙해 져서 명제 지식의 새로운 항목을 얻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이미 정상적인 지각이 어떤 상태에서 속성 Q에 경험이 있는지 알고있었습니다).

Tye는 또한 그가 Conee ‘s와 비교하는 친숙 가설의 버전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는 색깔에 대한 지인이 자신의 색깔 경험에 개념을 적용하는 것과 동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한다.

코니 (Conee)의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 함으로서 놀라운 경이를 알게된다. 이것은 지식의 다른 물리적 인 사물 들과는 다르다 : 예를 들어, 단순히 그것에 대해 사실을 알면 도시를 알게된다. Gertler는 이러한 불일치를 이용하여 Conee의 설명에 반대한다. 퀴어의 존재를 가정하는 이원론자는 퀄러아를 물리적 인 대상과 다른 실체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을 가지고있다. Conee는 불균형을 묘사하지만 Gertler는 그의 물리 주의자 계정이 그것을 설명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qualia의 신경 기초

V.S. UCSD의 뇌 및인지 센터 (Center for Banc and Cognition)의 Ramachandran과 Edward Hubbard는 처음으로 빨간 사과를보고 마리아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리는 회색 만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와우!” 처음부터 주관적으로 색상을 경험 한 응답.

그녀는 빨간 사과와 사과 그린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보고하는 색상에 대한 시각 장애 형태를 경험하지만, 빨간 사과를 지적하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올바르게 반응합니다.

“이 세 가지 가능한 결과 중 실제로 발생할 것인가? 우리는 색맹 신디사이저 주제에 대한 답을 배웠다고 믿습니다. 이론적 인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색맹은 불충분 한 색 수용체 때문에 색채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숫자를 볼 때, 그의 공감은 그가 현실 세계에서 본 적이없는 색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경험할 수있게한다. 그는 “화성 색”이라고 부른다. 색 세포 (및 상응하는 색)가 그의 두뇌는 우리가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데 도움이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제안합니다. ”

라마 찬드란과 허바드 (Hubbard)의 공헌은 “공감을 경험 한 사람들의 의식 경험에서 선재적이고 안정한 차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하여”기존의 “qualia의 신경 기초”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왜이 특별한 사건들이 퀴어 리아 인이고 다른 것들이 (샬머의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만) 문제의 범위를 좁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25 쪽)

이원론 응답

잭슨의 주장은 이원론을지지하기위한 것이고, 적어도 정신의 일부 측면은 비 물리적이라는 견해입니다. Nida-Rümelin은 이원론이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기 때문에 지식 논증에 대한 이원론 적 반응의 예는 많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목할 가치가있는 지식 주장에 응답하는 이원론 자의 몇 가지 중요한 예가 있음을 지적한다.

잭슨 자신은 변증론과 이원론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처음으로 적색을 보았을 때 “와우”라고 말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와우”라고 말하게하는 요인이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발화 행동을 일으키는 의식 상태를 포함하기 때문에 변증론과 모순된다. 마리아의 방은 실험이이 모순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틀린 것이있을 것입니다. 잭슨은 이제 물리 주의적 접근법 (간접 리얼리즘의 관점에서)이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epiphenominalism과 달리, Jackson은 적색의 경험이 뇌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으며, 경험은 뇌에 더 많은 변화를 즉각적으로 일으킨다 (예 : 추억 만들기). 이것은 신경 과학이 색각에 대해 이해하는 데보다 능숙합니다. 잭슨은 마리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자질을 나타내는 두뇌의 새로운 길을 단순히 발견하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비슷한 주장에서 철학자 필립 페티트 (Philip Pettit)는 대상의 움직임을 감지 할 능력이없는 반 누점 증 (akinetopsia)을 앓고있는 환자에게 마리아의 경우를 비유합니다. 누군가가 스트로보 스코픽 실에서 키우고 그 이후에 누공 누공을 치료하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 그들의 놀람은 지금 그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있게하는 그들의 두뇌에서 올 것입니다.

이원론 적 대응의 부족과 잭슨 자신의 관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식 주장을 방어하는 저명한 이원론자가 최근에 많이 등장합니다. 데이비드 찰머 스 (David Chalmers)는 가장 현저한 동시대 이원론 자 중 하나로서, 유물론이 틀렸다는 것을 잭슨의 사고 실험이 성공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Chalmers는 “능력 가설”이의 제기 (위에 설명 된)에 대한 응답을 가장 유망한 이의 제기로 간주 하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색을 상상하거나 인식하는 새로운 능력을 습득하더라도 그녀는 필연적으로 빨강을 보는 경험이 그 밑에있는 육체적 인 두뇌 상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와 같은 그녀가 지금 본 색상. 또한 그는 적색을 보는 것과 기본적인 물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이 실제로는 다른 “표현 방식”아래에서 동일한 사실에 대한 지식이라는 사실을 고려합니다. 즉, 마리아가 진정으로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Chalmers는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면서 Mary는 경험과 물리적 인 과정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즉 그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경험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실에 대한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반드시 획득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이를 거부합니다. Nida-Rümelin은 “경이로운 성질”이라고 불리는 경험의 속성을 포함하는 복잡하지만 유사한 견해를 옹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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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질(感覺質) 또는 퀄리아(qualia)는 어떤 것을 지각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분, 떠오르는 심상 따위로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질을 가리킨다. 일인칭 시점이기에 주관적인 특징이 있으며 객관적인 관찰이 어렵다.

정의 [ 편집 ]

감각질은 영어로 Qualia이며 이는 “질(quality)”을 의미하는 라틴어, “quale”의 복수형이다.[1] 이 단어는 4세기부터 사용되어왔지만 이 단어를 현대적 의미와 유사하게 사용한 것은 1929년에 철학자 크라렌스 어빙 루이스(Clarence Irving Lewis)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의 책,『정신과 세계의 질서』에서 감각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어떤 대상에 의해 의식에 야기된 감각[2] (소여(所與),the given)에는 식별 가능한 질적 특징들이 있다. 이 특징들은 여러 경험들에서 반복될 수 있으므로 보편적이다. 나는 이 특징들을 “감각질(qualia)”이라 부른다. 감각질은 보편적이지만 서로 다른 경험에서 인식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대상의 특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많은 전통적 개념들, 그리고 현대의 이론들에서도 이 둘(감각질과 대상의 특성)을 혼동해서 쓴다. 감각질은 바로 직감되고, 주어지며, 순수하게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오류의 가능성도 가질 수 없다.[3]

감각질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페인트가게에서 밝은 청록색의 천 조각을 응시하는 시각경험을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아라. 당신에겐 주관적으로 그 경험을 겪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느낌이 있다. 그 경험을 겪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흐린 갈색의 천 조각을 보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것인지 와는 매우 다르다. 이 차이는 “현상적 특징(phenomenal character)”이라고 종종 불리는 것의 차이이다. 경험의 현상적 특징은 주관적 경험이 어떠한지에 관한 특징을 일컫는다. 당신이 당신의 경험의 현상적 특징들에 집중해 본다면 그렇게 하는 동안에 어떤 특정한 질(質)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질들 – 당신이 내적으로 접근가능하고 합쳐졌을 때 어떤 경험의 현상적 특징을 구성하게 되는 것들-을 일반적으로 “감각질(qualia)”이라고 부른다.[4]

감각질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으며 그것을 정확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그 특성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감각질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바는 없다. 감각질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감각질이 의식과 관련해서 난해하고 도전적인 문제를 던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rmas)에 의하면 의식에 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와 쉬운 문제(easy problem)로 나눌 수 있다.[5]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 예를 들면 “뇌는 정보를 어떻게 통합하는가?”나 “인간은 어떻게 외부의 자극을 분별하여 이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인지체계의 객관적 메커니즘과 관련된 문제가 쉬운 문제이다.[6] (여기서 ‘쉽다’는 의미는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면,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예를 들면 “뇌의 물리적 작용이 어떻게 주관적인 감각경험을 일으키는가?” “왜 뇌의 물리적 작용에 감각이 동반되는가?” 와 같은 생각과 인식의 내적 측면에 관한 문제가 어려운 문제이다.[6] 감각질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감각질에 관한 사고실험 [ 편집 ]

역전 감각질(전도된 스펙트럼 혹은 역전 스펙트럼) [ 편집 ]

역전 감각질(Inverted Qualia)

동일한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이질적인 감각질을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상정해 본 사고실험이다. 색상에 대한 논의가 가장 알기 쉽기 때문에 색상에 대해 논해지는 것이 가장 많다. A와 B라는 사람이 자신의 앞에 있는 동일한 빨간 대상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런데 내가 이 대상을 보면서 ‘빨강’이라는 경험을 가질 때, 나와 동일한 대상을 보고 있는 B는 내가 파랑색을 볼 때와 동일한 경험을 갖는다고 하자. 역으로 A와 B가 파랑색의 물체를 보고 있을 때 B는 A가 빨강색을 볼 때와 동일한 경험을 한다. 즉 A와 B는 모든 색의 경험에 있어서 완전히 반대되는, 전도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7]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으로 색의 경험을 해왔으며 색 표현도 나의 내적 경험에 의하여 배워왔기 때문에 이 둘은 자신들이 그렇게 전도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는 서로가 확연히 다른 내적 경험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경험과 관련된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논의는 전통적으로는 로크에 의해서 얘기된 바 있다. 우리가 어떤 날 아침에 일어나서 이 세상에 있는 색상들이 모두 역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하자. 또한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설명할 뇌나 신체의 어떠한 변화도 찾을 수 없다.[7]

감각질의 존재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러한 상상에서 어떠한 모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위의 방식대로 감각질이 역전되어 있음에도 우리에게 아무런 신체적 변화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논증은 형이상학적 동일성 원칙을 따른다. 어떤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질이 물리적인 뇌의 특정한 상태와는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질이 물리적인 상태와 같은 상태인 것은 필수적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뇌의 상태와 다른 관계를 가진 감각질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그것이 뇌의 상태와 동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질은 비 물질적인 것이다. 이 논증은 감각질이 물질적인 상태와는 다른 비 물질적이라는 것을 사고실험으로써 증명하려한다. 그러나 이 논증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상위전제가 필요하며 그 때문에 여러 비판에 열려있다.[7]

철학적 좀비 [ 편집 ]

위의 논의를 조금 더 확장시켜보자.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신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나와 똑같이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의식적인 내용도 경험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철학적 좀비’라고 불린다. 우리가 철학적인 좀비라고 부르는 존재는 우리와 전혀 겉모습에서 차이가 나지 않으며, 단지 다른 것은 의식적 내용만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존재가 겉모습이나 행동하는 부분에서 나와 똑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의식적 경험을 결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동일한 기능적, 계산적 상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7]

만일 이러한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면 기능이나 계산적 본성을 통하여 정신을 규정하고자 하는 계산적 기능주의 입장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기능적으로 규정된 정신적 상태라는 것이 정신적 상태가 지녀야 할 중요한 특성을 포착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심리철학에서 감각질의 개념을 상세하게 논의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7]

네이글의 논변 –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 [ 편집 ]

이 사고실험은 토마스 네이글의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에서 유래한다. 박쥐는 눈이 퇴화되어 우리와 같은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없는 대신에 음파탐지를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고 길을 찾는다. 우리의 시각에 해당하는 기관이 박쥐의 경우, 청각인 것이다. 박쥐는 높은 음조의 소리를 발산한 다음 그 반향을 이용하여 대상의 위치를 파악한다.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박쥐가 음파 탐지를 이용하여 대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분명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둠 속에서 높은 음조의 소리가 사방으로 빗발치는 모습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범위 내에서 상상해 본 것일 뿐, 박쥐의 입장에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러한 경험이 어떨지 알 수 없다.[7]

위의 여러 사고실험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감각질의 ‘특권화된 접근(privileged access)이다. 감각질은 1인칭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접근이라는 것이 특권화된 접근이 말하고자 하는 함의이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 혹은 동물의 인식과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의 인식과정 하에서 추측하는 것일 뿐이며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는 자칫 불가지론으로 빠져들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여 보면 정신의 작용, 즉 마음의 방식이 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7]

설명적 간극 논변(explanatory gap argument) [ 편집 ]

조셉 레빈(Joseph Levine)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경험의 질적 차원을 뇌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의 설명적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직관을 가졌다. 또한 이러한 논의가 속성 이원론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물리학자 간의 논쟁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첫 번째 단계 만약 유물론이 참이라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정신적인 것이 나오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유물론자들이나 자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이 하나의 크고 법칙적이며 질서 있는 체계라면 하나의 큰 전체로서의 자연을 관리하는 그 기초적인 원리에 의하여 그러한 체계 안의 어떤 부분의 발생이라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8]

두 번째 단계에서는 뇌의 과정(어떠한 물리적 발생에 의해서도)에 의해서는 감각질의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점을 지적한다.

두 번째 단계 그러나, 문제는 감각질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다른 거대한 영역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생각할 좋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 설명적인 간극이 존재한다. 레빈은 이처럼 자신의 시각을 확장한다.[9]

세 번째 단계 내가 나의 빨간 디스켓 케이스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문자적으로 붉음이라는 시각적 경험을 갖는다. 디스켓으로부터 나오는 특정한 구성의 빛은,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나의 망막을 자극한다. 그것은 결국 나의 시각피질에서 다양한 신경적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이 사건들을 모두 본다하여도 내가 처음에 느꼈던 붉음이라는 시각 경험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마치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에는 우리가 보고 알 수 있는 관계가 없으며 전자에 의한 후자의 설명은 불가한 것으로 보인다.[9]

이처럼 신경상태와 의식 간에 맺는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설명적 간극이다. 그러나 레빈은 이러한 간격이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인식론적인 차이일 수 있다는 의견으로서 본질적으로는 의식과 물질적인 것이 완전히 같을 수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9]

매리의 방 [ 편집 ]

매리의 방(Mary’s room)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에 의해 1980년대에 쓰여 진 것으로서 물리주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많이 쓰이곤 한다. 흑백의 방에 있으면서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를 탐구한 색 과학자 매리는 이 세계와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매리는 이 흑백의 방에서 나오게 되고 세계에 대한 어떤 것과 그것에 관한 시각적 경험을 배우게 된다. 이는 매리의 이전 지식이 불완전했음을 보여주며, 그녀는 모든 물리적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물리적 정보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10] 논증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메리가 흑백의 방을 떠나기 전, 그녀는 색과 색 지각에 대한 모든 물리적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물리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색에 대한 다른 사실(붉은 대상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보이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모든 사실들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결론) 따라서 물리적이지 않은 사실. 즉, 비 물리적인 것이 존재한다.

매리의 방에 대한 Jackson의 지식 논변은 특정한 색의 감각질에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쉽게 청각이나 후각, 미각에도 확장할 수 있다. 즉, 모든 감각질에 적용할 수 있다.

차머스의 분류 [ 편집 ]

데이비드 제이 차머스(David J. Chalmers)

의식(consciousness)의 형이상학에 관련해 이제까지 철학자들이 내 놓은 입장들은 매우 다양한데 이 입장들에 따라 감각질에 대한 입장도 달라진다. 데이비드 제이 차머스(David J. Chalmers)는 그의 논문 “Consciousness and its place in nature(2002)”에서 심신문제에 대한 지난 75년간의 논의들을 크게 6가지의 타입(타입A~타입F)으로 분류하였다.[11] 이중 세 개의 타입(타입A~타입C)은 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고 나머지 세 개의 타입(타입D~타입F)은 비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11] 이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타입 A 유물론: 인식론적 간극(epistemic gap)이 존재함을 부정하거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쉽게 매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11]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또한 부정한다.[11] 이 관점에 따르면 의식의 쉬운 문제들(easy problem)이 다 해결되면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도 없어진다.[11] Type A는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거주의(eliminativism)적 관점을 취하기도 하고 의식이란 존재하지만 오직 기능적/행동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functionalism)/행동주의적(behavioralism) 관점을 취하기도 한다.[11]

대표적 철학자- 데넷(Dennett), 드레츠키(Dretske), 하만(Harman), 루이스(Lewis), 레이(Rey), 라일(Ryle) 등.[11]

타입 B 유물론: 인식론적 간극은 긍정하지만 존재론적 간극은 부정한다.[11] 마치 H 2 O의 개념과 물(water)의 개념은 다르지만 그 두 개념이 가리키는 것이 결국 같은 것인 것처럼, 현상적인 특징과 물리적/기능적인 특징은 그 개념이 서로 달라 이로부터 인식론적 간극이 발생할 수 밖에 없지만 그 둘이 가리키는 대상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11] 따라서 현상적인 특징과 물리적/기능적인 특징 사이에 존재론적 간극은 없다. 이에 따르면 메리의 방에서 메리가 나왔을 때 메리가 새로이 얻는 것은 없다.[11] 원래 알고 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알게 된 것 뿐이다.[11]

대표적 철학자- 블락(Block), 힐(Hill), 레빈(Levine), 로어(Loar), 리칸(Lycan), 파피뉴(Papineau), 페리(Perry), 타이(Tye) 등[11]

타입 C 유물론: 인식론적 간극을 긍정하지만 이는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11] 인식론적 간극은 궁극적으로 끝에 가서는 해결된다는 입장이다.[11] 예로 네이글(Nagel) 같은 경우는 우리가 의식이 어떻게 물리적일 수 있는지 지금은 설명해낼 수 없지만 개념적 혁명(conceptual revolution)이 발생하면 가능해질 것이라고 얘기하고, 맥긴(McGinn)같은 경우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이 간극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해결할 수 없을 뿐 원칙상으로는 해결책이 있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11] (차머스는 타입 C가 결국 밀고 나갔을 때 다른 타입들에 융합되어 버릴 거라고 이야기한다.[11] 예를 들어 차머스는 멕긴의 주장같은 경우 타입F로 빠져나갈 수 있고, 네이글은 타입 B나 타입 F가 될 수 있다고 한다.[11]

대표적 철학자- 네이글(Nagel), 처칠랜드(Churchland), 맥긴(McGinn) 등[11]

이상의 유물론 타입 A,B,C가 현상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해서 생각해 내려고 하였던 것과 달리 이하의 타입 D,E,F는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상적인 것 또는 현상적인 것을 이루는 더 근원적 “X(물리적인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의 존재를 긍정한다.[11]

타입 D 이원론: 타입 D의 D는 데카르트(Descartes)의 D이다.[11] 즉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substance dualism)이 이에 속한다.[11] 여기서 현상적 특징들은 물리적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서로 상호작용(interaction)한다.[11]

대표적 철학자- 포스터(Foster), 파퍼(Popper), 셀라스(Sellars) 등.[11]

타입 E 이원론: 타입 E의 E는 현상부수설(epiphenomenalism)의 E이다.[11] 현상적인 것들은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주며 인과적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11] 따라서 현상적인 특징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11]

대표적 철학자- 캠프벨(Campbell), 헉슬리(Huxley), 잭슨(Jackson), 로빈손(Robinson)[11]

타입 F 일원론: 타입 F엔 차머스 본인이 속해있다.[11] 현상적인 특징을 물리적 현실세계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구성요소(property)로 생각한다.[11]

대표적 철학자- 러셀(Russell), 맥스웰(Maxwell), 락우드(Lockwood), 차머스(Chalmers) 등.[11]

감각질에 대한 철학적 입장들 [ 편집 ]

물리주의 [ 편집 ]

감각질 물리주의(간단하게 ‘물리주의적 입장’이라 하자)는 감각질이 물질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물리적인’이라는 표현은 물리학의 영역에 있는 종류의 속성으로 꽤 넓게 쓰인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생물학의 영역의 속성에서도 적용된다. 즉 물질적인 속성은 신경과학에 의해 연구되는 속성까지도 포함한다.[12] 이러한 물리주의적 입장에는 소거주의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능력 가설’을 통해 매리의 방(잭슨의 지식 논변)에 대응하는 David Lewis, 인공지능 연구자로 알려져 있는 Marvin Minsky, 저명한 신경철학자인 폴 처칠랜드 P. churchland(부부가 함께 활동) 등이 있다. 물리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통해 여러 물리주의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감각질에 대해 생각하는 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 편집 ]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데닛에 의하면 감각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질에 관련한 데닛의 공격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한 가지를 정리해야 한다. 감각질은 단순히 대상의 느낌이라는 속성을 지시하는 일반적인 이름이 아니며 이 용어는 문제가 되는 현상의 본성에 관한 특수한 시각을 갖는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각이란 ‘감각질’은 한 표상에 대해 하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표상이란 그 자체는 마음/두뇌의 실재하는 상태, 분명한 독립적 상태이다.[13] 이처럼 내가 달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지각은 나의 실재하는, 분명하고 독립적인 상태이며 이와 밀접하게 관련한 상태가 있는데 이것이 달리는 사람으로 ‘보여짐’이다. 데닛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감각질에 대한 ‘보여짐’의 부분이다. 그는 그의 논문“Quining Qualia”에서 ‘전도된 스펙트럼 사고실험’에서의 ‘보여짐’에 의문을 가진다.

나는 처음 맥주를 맛보았을 때, 그것이 하수구 물 맛(보통 사람들의 경험)이 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맥주는 매우 맛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맛이 여전히 같은 것인가 아니면 바뀌었는가? (Dennett. 1988)

데닛은 이처럼 우리가 상식적 직관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여짐’의 변화나 불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종류의 ‘보여짐’과 다른 종류의 ‘보여짐’을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것에도 적용할 수 없는 ‘보여짐’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14] 데닛은 전통적인 철학에서의 ‘보여짐’의 개념으로서의 환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에게 감각질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본래적이고, 개인적이고, 자체가 개별적인 표상 상태나 사전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잡한 관계적 속성이다. 다시 말해 타인현상적 또는 자기현상적 판단, 즉 주어진 상황, 역사, 두뇌 그리고 행위에 의해 대상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하는 판단의 순수한 산물인 어떤 속성일 뿐이다. 데닛에 의하면 지각 입력은 순수하게 질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데닛은 ‘감각질’을 지각과정의 산물이나 출력으로도 믿지 않는다. 의식의 무대에서는 감각에 의해 제공되는 감각질, 즉 선호되거나 혐오되거나 판정되거나 검토되거나 기억에 저장되거나 자아에 의해 다른 인지 목적에 사용되거나 하는 감각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인칭 시각에서 본다면 당신에게는 ‘냄비수프를 내가 처음 먹었을 때의 맛’이라는 질적인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이 즉각적으로 싫어할, 당신의 미각 경험에서부터 자기 발생적으로 판정을 내릴, 그 맛의 여러 질적인 부분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검토할(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지?’), 그리고 미래의 냄비 수프의 경험을 기대하면서 기억에 저장할 그런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5] 보다 정확하게 한다면, 데닛의 시각에서는 우리의 지향적 지각 경험은 ‘질적인 측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경험론자들에 따른다면). 지각과정의 입력들은 현상적 상태들이 아니므로 (애초에는 아무것도 없을) 지각과정의 현상적 ‘잔여물’만이 존재할 수 있을 – 또는 존재하지 않을 – 뿐이다. 따라서 적절한 주의 집중과 추상화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나의 지향적 지각 경험에는 질적인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16] 그렇다면 시각경험이나 후각경험과 같은 것이 ‘질적인’ 경험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데닛의 표준 답변은, 감각의 질적 속성들이 두뇌 상태의 성향적 속성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이 질적인 속성은 일정한 관련 효과를, 그런 두뇌 상태를 지닌 속성의 경험자에게 일으킨다(1998,p. 146)는 것이다.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 편집 ]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는 지식의 유형과 감각질의 경우에서 지식이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소개하였다. 루이스는 “매리의 방 사고실험”에서 매리가 그녀의 흑백의 방에서 붉은색이 어떻게 보이는 지에 대해 학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사실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학습은 정보를 전달하지만 감각질을 경험하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에 감각질 경험은 능력을 전달한다. 매리가 붉은 색을 볼 때, 그녀는 어떠한 새로운 정보도 얻을 수 없다. 대신에 그녀는 새로운 능력을 얻는다. – 지금 그녀는 붉음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기억할 수 있고, 다른 붉은 것들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상상할 수 있으며 붉음의 더 나아간 사례까지 알아볼 수 있다. 루이스는 잭슨의 사고실험(매리의 방)이 “현상적인 정보 가설”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 즉, 매리가 붉음을 보고 얻는 새로운 지식은 현상적 지식이다. 루이스는 지식의 두 유형 사이를 구별 짓는 “능력 가설”을 새로이 제안 한다 : 지식은 know-that(정보)과 know-how(능력)으로 나뉜다. 평소에 두 지식은 엉켜있다; 평범한 학습은 또한 그 대상의 경험과 동반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보를 학습하는 동시에(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심리학자였다’는 사실) 능력도 얻는다(‘프로이트의 이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그러나 사고실험에서, 매리는 평범한 학습을 통해 오직 know-that 지식만을 얻는다. 그녀는 기억하거나, 상상하거나 붉은 색을 알아보는 등의 know-how 지식을 갖는 것으로부터는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매리가 붉음에 대한 경험을 동반하여 도출된 몇몇의 필수적인 데이터들을 새로이 학습하였다는 직관을 갖고 있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것들은 방 안에서 학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방 안에서 스키를 타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루이스는 정보와 능력이 잠재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것을 정교화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물리주의는 아직도 메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결론과 양립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또한 감각질의 다른 예들을 고려하는 데에 유용하다; “박쥐로 사는 것”은 능력, 즉 know-how 지식이다.[17]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 편집 ]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베테랑 인공지능 연구자인 마빈 민스키는 감각질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복잡성,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성을 위한 복잡성의 실수인 것으로 보았다. 지금, 철학적인 이원론자들은 불평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다치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설명했어요 –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다쳤다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는군요.” 이것은 아주 큰 문제를 유지시킨다. – 독립된 것으로서 ‘느낌’을 구체화하는 시도는 즉, ‘설명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다. 내가 그것을 볼 때, 느낌은 이상한 괴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다치는 것’을 구성하는 그들의 인지적인 변화이다. –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이러한 변화를 표현하고 요약하기 위해서 하는 서투른 시도들을 포함한다. 그 큰 실수는 자원(심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에 대한 우리 성향의 복잡한 재배열을 위해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인지하기보다는, ‘다치는 것’의 ‘본질’, 그리고 단순하고 단일한 것으로서 그것(감각질)을 보는 데에서 온다.[18] 민스키는 의식에 대하여, 그것이 많은 숫자의 자동적이고 상당히 단순한 작동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등장한다고 생각하였다.[19]

폴 처치랜드(Paul Churchland) [ 편집 ]

폴 처치랜드에 따르면, 의식은 두뇌의 생물적 속성이다. 처치랜드에게 ‘매리의 방’에서의 매리는 야생의 아이처럼 여겨질 것이다. 야생의 아이는 어린 시절 동안에 극단적인 고립을 겪는다. 기술적으로 메리가 방을 떠날 때, 붉은 색깔이 어떤 것인지를 알거나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뇌는 색을 보는 방법을 발달시키고 배워야 한다. 뇌가 그러한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시각피질의 v4 섹션에서의 패턴 형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패턴들은 빛의 파장의 노출을 통해 형성되는데, 이러한 노출은 이른 시기에 뇌의 발달을 필요로 된다. 매리의 경우에, 색에서의 식별과 범주화는 오직 흑백의 표상에 관하여만 있을 것이다.[20]

매리의 방 논변(잭슨의 지식논변)을 다시 정리하면,

(A1) 매리는 (석방 이전에) 물리적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A2) 매리는 (석방 이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매리는 석방 시에 무언가를 배운다.)

(A3) 그러므로, 물리적이지 않은 사실이 있다.

(A4) 그러므로, 물리주의는 틀렸다.

가 될 것인데, 물리주의자인 처칠랜드는 (A1)과 (A2)의 안다가 같은 것이 아니라, 전자는 명제적 지식을 안다는 것이며 후자는 비명제적 지식을 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1]

기능주의 [ 편집 ]

기능주의는 “심적 상태(mental state)의 본질이 감각자극의 입력과 행동결과의 출력을 연결하는 인과적 역할(role, function)에 있다”고 주장한다.[22] 기능주의에 따르면 모든 정신적 특징들은 기능적 특징들로 설명될 수 있다.[23] 기능주의는 감각질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24] 기능주의자에 대항하는 근거로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역전 퀄리아(inverted qualia)와 철학적 좀비(philosophycal zombie)이다.[25] 즉, 기능주의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감각질은 기능(function)이나 원인적 역할(causal role)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반박이다.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 [ 편집 ]

김재권은 물리주의를 옹호하며, 정신적인 속성에 대하여 적어도 당위적인 차원으로라도 ‘환원주의’를 받아 들여야한다는 강한 주장을 한다. 그는 “실재한다는 것은 인과적 힘을 갖는 것”이라는 알렉산더의 논제[26] 를 주장하며 인과적 힘을 갖지 않는 존재는 진정한 실재가 아닌 부수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때 감각질은 지향성/인과적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부수현상이 된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강력한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비교적 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물리현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식의 주관성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듯 보이며 감각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근 철학자들의 동향은 이와 유사하다.

김재권은 심신환원주의가 갖는 설명의 부담에 대해 최근 저서인 『물리주의, 또는 거의 충분한 물리주의』[27] 에 담고 있으며, 이와 함께 「극단에 선 물리주의」[28]에 나타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물리주의는 극복해야 할 두 가지 주요한 어려움들이 있는데, 이는 정신 인과의 문제와 의식의 문제이다. 첫째 문제는 정신성이 어떻게 인과적으로 폐쇄된 물리적 세계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의식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이다.

2) 한 정신적인 항목이 물리적 세계 내에서의 그 실현자로 기능적으로 환원될 때 오직 그때에만 그 항목과 관련된 정신 인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3) 지향적/인지적 속성은 기능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기능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반면에 의식은 기능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환원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신 인과의 문제는 지향적/인지적 속성에 관하여는 해결 가능할지라도, 의식 속성들 또는 감각질에 관하여는 해결 불가능하다.

4) 의식이 기능화될 경우에 오직 그때에만 의식의 문제는 해결가능하다 또는 설명적 간극이 메워질 수 있다.

5) 그렇다면 감각질은 물리적 도식 내에 편입될 수 없는 잔여가 된다. 감각질은 물리적인 것에 환원될 수 없으며, 그런 이유 때문에 (ⅰ)감각질은 부수현상이며, (ⅱ) 그들의 존재 그리고 특정한 신경적 또는 물리적 과정과의 관찰된 연관성은 설명될 수 없다.[29]

표상주의 [ 편집 ]

마이클 타이(Michael Tye)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는 지향주의(intentionalism)라고도 할 수 있다. 표상주의자들은 경험의 현상적 특징들(감각질)이 경험의 표상적 특징들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타이(Michael Tye)와 같은 환원주의적 표상주의자들은 심지어 감각질은 표상적 특징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30] 마이클 타이(Michael Tye)와 유사한 주상을 하는 사람들로는 프레드 드레츠키(Fred Dretske),하만(Harman), 리칸(Lycan), 멕도웰(McDowell), 레이(Rey), 화이트(White) 등이 있다.[30] 다음은 마이클 타이가 감각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주목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어떻게 비춰지는 지에 집중해 보아라. 당신이 당신의 눈앞의 여러 대상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대상들의 외관(surfaces)을 봄으로써이다.(중략) 당신이 직관적으로 보는 그 외관들은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그 대상들의 외관이다. (중략) 당신은 그 외관들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들의 질적 특징들(qualities, 여기서 감각질과 같은 의미) 통째를 인식하게 된다. (중략) 당신은 그것들을 대상들의 질적 특징들로서 경험하는 것이지 자신의 경험의 질적 특징들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30]

마이클 타이는 통증의 감각질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손가락에 통증을 느낄 때, 당신은 그 통증이 손가락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이 다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고통의 감각에 집중하지 못할 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고통을 알아차리고 이에 집중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고통이 느껴지는 그 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이 경우에는, 손가락으로) (중략) 당신이 고통에 집중할 때, 당신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당신의 손가락에 있는 그 질적 특징들(고통의 감각질)을 인식한다. (중략) 여기서 당신의 통증은 상상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중략) 손가락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질적 특징이 손가락에 있는 것으로 지각한다. 이는 우리가 직접적이고 내적으로 인식하는 고통의 경험들(고통의 감각질)이 (오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가정되는)주관적 경험의 질적 특징들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특정 부위의 신체적 손상”의 질적 특징들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30]

하지만 과연 감각질이 어떤 특정 지향성(intentionality;“마음이 어떤 물체나 세계의 상태를 지시하거나 지향하는 특징[31]”)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표상주의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상적 특징이 표상적 특징들과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24] 한 예로 우리가 어떤 것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는 경험과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소리를 들은 경험에서, 이 두 경험은 현상적으로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표상하는 바를 “방금 머리 위를 무엇이 지나갔어.” 라고 동일하게 이야기한다.[24]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그것들이 표상되는 방식을 설명해야 가능할 텐데 이는 표상과는 다른 무언가(여기서는 방식(way))을 불러들이는 게 된다.[24] 이러한 반박 사례들은 어떤 현상적 특징들이 반드시 표상적 특징과 동일하거나 그로부터 수반(supervene)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표상주의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감각질(현상적 특징들)이 표상적 특징들과 관계가 깊다는 표상주의에는 동의하지만 마이클 타이(Michael Tye)처럼 환원주의적 표상주의를 택하지는 않는다.[32]

존 설(John Searle)의 경우 현상적 의식과 지향성(intentionality)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는 동의하지만 그는 표상주의자들처럼 의식을 지향성으로 설명하지 않고 지향성을 의식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지 그라헴(George Graham), 테리 호겐(Terry Horgen), 존 티엔슨(John Tienson)도 이에 비슷한 입장이다.[24]

신비주의 [ 편집 ]

신비주의는 의식에 문제에 관한 심리철학의 입장 중 하나로서, 감각질이 현재의 물리학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물질인 뇌로부터 어떻게 주관적인 의식 체험이 생겨나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며, 그런 이유로 심신의 문제는 역시나 해결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대표적인 학자에는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과 ‘콜린 맥긴(Colin McGinn-1950. 3. 10. 영국의 철학자. 현재 마이아미대학 교수)’ 그리고 ‘스티븐 핑커(Steven Arthur Pinker-1954. 9. 18-.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 미국의 실험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2009년 기준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등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네이글은, 감각질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관한 견해가 근본적인 수준으로부터 바뀌지 않으면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토마스 네이글은 ‘박쥐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사고실험을 통하여, 어떤 존재가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something it is like to be that being’(그것임, 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의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를 보는 현재의 수준은 자신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 형태이며 이러한 현재의 방식으로는 타인의 감각질이 어떠한 것인지, 다른 동물의 의식경험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보았다.

맥긴은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고유의 인지적 메커니즘은 뇌의 구조로 인해, 일정한 정도의 능력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능력을 넘은 문제가 인간에게서는 절대 파악될 수 없다고 하는 ‘인지적 폐쇄’ 개념을 주장하였다. 철학자 콜린 맥긴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두뇌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당신 두뇌의 해부학적 구조, 두뇌의 화학적 구성성분, 다양한 두뇌영역의 전기자극 패턴을 안다. 심지어 모든 원자의 위치와 그보다 하위단위인 전자구조까지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정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인가?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정신에 관해 모른다. 당신의 두뇌에 관한 지식을 안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정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33]

이원론 [ 편집 ]

심신(心身)문제와 관련해서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데카르트의 경우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몸과 마음이 두 독립적인 개별적 실체로 존재한다.[22] 하지만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을 따르자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호작용을 해서 서로 연관을 갖는지를 설명해내야 한다.[22] 여기서 어떤 이원론자들은 그 연관관계를 설명해내기 보다는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을 선택해 그 연관관계를 설명할 이유를 말소해버린다.[22] 부수현상론에 따르면 마치 우리가 움직일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현상적인 것(심적인 것들)은 물리적인 것의 그림자 같은 것일 뿐 물리세계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다.[22]

일원론 [ 편집 ]

감각질과 물리적 현상의 사이를 잇기 위하여 정보에 주목하는 일련의 연구적 흐름이 있다. 그것은 ‘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1911.7.9-2008.4.13. 미국의 물리학자)’가 주장했던 “it from bit(모든 것은 비트로부터 형성된다)”라는 형이상학에 영향을 받아서 주장을 핀, ‘데이비드 존 차머스(David John Chalmers)’의 ‘Dual-aspect Theory of Information(정보의 이중 양상 이론)’과 ‘쥬리오 토노니(Giulio Tononi)’의 ‘의식의 정보통합이론’ 같은 수학적인 구성을 가진 이론이다.

데이비드 차머스의 ‘정보의 이중 양상 이론’은 중립적 일원론으로서, 이 이론에 따르면 심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은 하나의 단일한 실체(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닌 정보일 뿐)의 두 가지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시각은 정신과 물질이 단일하게 존재하는 신(자연)의 수많은 ‘양태들modes’이라고 한 ‘베네딕트 두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유사하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감각질도 현상적 속성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정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감각질에 대한 과학적 입장들 [ 편집 ]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과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 편집 ]

그림은 NCC 탐색의 기반이 되는 틀이다. 산책을 하고 있는 개(제일 왼쪽)를 보고 있는 사람(왼쪽에서 두 번째)의 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신경세포의 발화의 모임들 가운데, 그 일부가 NCC로서(그림 중의 동그라미로 둘러싸여 있는 부분), 생각나는 개의 상(제일 우측) 즉, 주관적인 의식체험을 낳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크리스토프 · 코흐’로 대표되는 일부의 신경 과학자들은 그러한 생각을 기초로 NCC를 발견 · 분류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샌디 에이고 소재]과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캘리포니아 공과대학)는 시지각(visual perception)에서부터 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합해졌을 때 특정한 의식적 지각체나 경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신경적 기제나 사건들의 최소 집합,” 즉, 의식의 ‘분자적이고 신경적인 상관물’(NCC, 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을 찾는다면 우리가 의식에 관한 아주 유용한 설명 틀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크릭과 코흐는 정신적 사건과 그것의 신경상관물 사이에는 분명한 대응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다시 말해 이는 물질이 없으면 마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의식을 인과적 힘을 갖지 않는 부수현상이나 환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34]

그들은 유기체가 주관적인 느낌(날 느낌(raw feel): 감각질)을 갖게 됨으로써 일종의 진화적인 관점에서 더욱 향상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관적인 경험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뇌의 활동은 생물학적 존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에게 ‘감각질’은 기억에 필수적이며, 자아를 형성하며, 주체가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감각질은 의미와 연관된다. (부수현상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또한 지각체와 관련된 많은 개념과 경험들을 재빠르게 부호화하는 ‘기호(symbol)’의 역할을 한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감각질은 전전두와 전대상피질에 위치한 계획 단계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9]

감각질과 양자역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여겨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 인물로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가 있다. 그가 양자역학에 주목한 까닭은 의식의 계산불가능성에 기반을 둔다. 그는 그의 책 “황제의 새 마음 (The Emperor’s New Mind)(1989)”에서 수학의 형식화에 대한 한계를 증명한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을 바탕으로 뇌에도 알고리즘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의식을 이루는 근본 물질도 계산 불가능적(non-computable)인 특성을 지닐 것이라 여겨, 계산불가능성을 지닌 양자의 세계에 주목하였다.[35] 로저 펜로즈는 스튜어트 하메로프(Stuart Hameroff)와 함께 각자의 이론을 합쳐서 “조화로운 객관적 파동수축”(Orchestrated Objective Reduction, 줄여서 Orch-OR 또는 ORR)이론을 만들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뇌의 미세소관(microtubule)을 구성하는 단백질인 튜블린(tubulin)의 파동함수가 수축할 때에 의식체험(감각질)이 생성된다. “주관적 수축(Subjective reduction)”과 달리 “객관적 수축(Objective reduction)”이라고 한 것은 관측(observation)이나 환경적 영향에 의해 수축이 일어난다고 하는 양자역학의 일반이론과 달리 튜블린의 파동함수는 스스로 수축(self-collapse)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6] 하지만 이 이론은 아직 매우 개념적인 것이며 아직 가설단계에 있는 양자중력 등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라마찬드란은 감각질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감각은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에 반대한다.[37] 그는 “어떻게 뇌 속 뉴런에서 발생한 이온과 전류의 흐름이 차가움, 따뜻함, 빨강과 같은 주관적 감각을 만들어내는가?”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감각질은 분명 존재하며 감각질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37] 그는 감각질을 지닌 감각의 특징을 3가지 정도로 이야기 한다. 먼저 그 인식(입력)은 비가역적(irrevocable)이고 반응(출력;response)은 유연적(flexibile)이며 그 감각질은 어느 정도 순간기억에 보관된다고 한다(endurance).[37] 그는 감각질이 측두엽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37] 이 주장은 의식작용의 초기단계(early stage)도 의식작용의 마지막 단계(final stage)도 아닌 의식작용의 중간단계(intermediate stage)에 관련되는 측두엽이 인식(perception)과 행동(action)의 중간영역인 감각질에 관여할 거란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37]

그는 또한 감각질의 문제는 자기(self)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고 한다.[37] 감각질이 없는 자기(self)란 없고 자기(self)없이 둥둥 떠다니는 감각질도 없기 때문이다.[37]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찐따의 인문학 특강 (1) – 메리의 방 실험

주의: 철학글임 (나름 흥미로움)

다음의 가정을 생각해보자.

여기, 메리라는 뇌 과학자가 있다.

메리는 흑백의 방에서 살며,

흑백의 책을 보고

흑백의 티비를 보는 등, 그녀는 단 한번도 색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메리는 색각에 대한 전문가이고,

빛의 파장이 다른 색깔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알고 있으며,

어떻게 우리 망막이 전기자극을 시신경으로 흘려보내 뇌의 다양한 신경세포들을 자극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색을 인지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고장난 메리의 컴퓨터가

사과를 화면에 띄우는데, 이 사과는 흑백이 아니였다.

당연히도 메리는 수년간 알고 있던 “채색된” 사과를 처음 경험했던 것.

이런 경우, 메리는 새로운 것을 “배웠다”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가정은 1982년 프랭크 잭슨 (Frank Jackson)이 고안한 메리의 방이라는 사고실험으로,

만약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가 “색깔을 인지하고 있다”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단서”만으로는 충족을 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

현대 철학자들은 이를 “지식논증”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물질적인” 현상이 아닌 “경험적으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는 모든 현상은 (심리적, 정신적 현상 포함) 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물리주의”에 반하는 개념으로,

한 사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관점이다.

다시한번 색깔의 개념으로 돌아와보자.

직관적으로, 메리의 예시를 들은 일게이들이라면

색을 “경험하는”것과 “물리적인 현상을 인지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 할 것이다.

시발 이런 예외적인 캐이스 들고와서 정보글이라고 지껄이는 일게이는

ㅁㅈㅎ야라고 하기 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단순히 “색”에만 한정이 되있을까?

한 연구가가 AI를 개발하기 위해 인간의 베춘이의 뇌를 탐구한다고 해보자.

오랜 연구 끝에 그 연구가는 베춘이의 뇌의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런 뇌를 이식한 AI는 “베춘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그 뇌를 완벽히 파악한 과학자는

베춘이로써 살아가는 게 어떤지 알 수 있을까?

이렇듯, 연구가들은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성격의 주관적인 성질들을

“특질”이라고 명명한 다.

이런 특질들에는 사랑에 빠진다던지,

지루해 한다던지, 하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 등에서는 물리적인

요소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AI같은 경우도, 물리적인 지식 측면에서의 뇌, 혹은 심리는 탄생 시킬 지언정

이에 상응하는 “정신”의 측면은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여러 논쟁이 있다.

몇몇의 학자들은 메리의 방에서 메리가 이미 색깔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그 지식의 “집합”이 색칠된 사과를 봤을 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애초에 색이라는 것 자체를 경험한적이 없기 때문에 메리의 지식은 완벽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이 처음 발표되고 몇년 뒤, 잭슨 역시 메리의 “새로운 경험”이 그간 그녀의 지식에 의해서 설명 될 수 있으며, 아예 이해하지 못할 성격의 새로운 지식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논쟁은,

메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웠나? 라는 관점에서 이어지고 있고,

이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물리적” 지식에 대한 한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우주에는 인간의 이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을까?

아니면 나중에 과학과 철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인가?

이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는 철학적 문제이다.

흑백의 메리와 감각질

흑백 방 안에서 자란 소녀, 평생 색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 자란 소녀 메리는 ‘색’이라는 것을 이해할까? 나는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색을 보지 못하고 자란 메리라는 소녀는 색을 보고 온 이방인으로부터 색이라는 것의 다양한 쓰임을 듣고 본인 자신도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영영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이러한 것은 꽤나 사소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색이라는 것의 이해 여부는 그가 흑백의 방에서 살았는지 여부와 사소한 관련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누군가는 질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령, 사랑을 해보지 못했거나 사이코패스와 같은 그런 사람의 경우. 질투라는 것을 영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과 질투라는 것을 간접 체험하면서, 실제로 사랑하고 질투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명명하면서 그에 대해서 세세한 묘사를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게 있어 메리의 문제는 행동 심리학적으로는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지만, 심리철학적으로 감각질의 존재 여부에 대한 주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심리철학적 문제가 수수께끼임을 논증해야 하는 것이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다. 혹여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면, 흑백의 메리 문제는 바로잡아지는 작업을 통해서만 철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어떤” 메리가 흑백의 방 안에서 자라서 색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 메리가 마침내 색깔의 세계로 나가게 되어 마침내 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말은, 그녀에게 없었던 어떤 감각질이 설명되었다는 말이라기보다도, 그저 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말일뿐이다. 즉 감각질의 여부보다도, 우리는 행동 심리학적으로 어떤 특정 색 체험이 색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결론만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색 체험이 색 이해에 도움이 되느냐는 물음은, 사랑의 이해가 연애를 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냐는 물음과 정확히 같은 물음이다. 누군가는 사랑해보지 않고도 누군가의 사랑 체험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감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같이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는 사랑 체험을 해 놓고도, 타인의 사랑 이해에 무감하다. 어떤 멜로 영화에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멜로 영화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해’라는 말이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사용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가 뭘 알겠어”라는 말을 우리는 또한 분명히 연애해보지 않는 사람에게 면박 주듯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때 체험해보지 않는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또한 이해와 체험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의 체험이 당연히 그 체험과 연관된 개념에 일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감각질이라는 존재자는 별로 요청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물론 감각에 대한 묘사에 대한 그 ‘감각 개념’은 분명히 사용될 것이며, 그것이 소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그 말은, 분명히 일상에서 사용되는 그런 방식 이상의 철학적 의미로 사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용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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