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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 하우스 건축 | Less Is More,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 |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의 건축과 바우하우스 Bauhaus 104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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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한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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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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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 나무위키

Das Endziel aller bildnerischen Tätigkeit ist der Bau. (모든 조형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1919년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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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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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바우 하우스 건축

  • Author: 그룬트GRUND
  • Views: 조회수 3,1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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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lD8H9ooKrA

현대 건축디자인의 시작 ‘바우하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의 유리외벽, /bauhaus-dessau

독일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마을 데사우(Dessau). 이곳에는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세운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모든 외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이야 전면 유리 파사드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1926년 바우하우스 건물이 처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혁신적인 건축언어였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26년 12월 4일 바우하우스 건물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데사우를 방문했고 이들은 현대 건축디자인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우하우스 건물에 불이 켜지면서 장관이 펼쳐졌다. 격자 모양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고 유리 파사드가 빛을 뿜어내면서 지금까지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짓다’는 단어 ‘Bauen’(바우엔)과 ‘집’을 뜻하는 ‘Haus’(하우스)의 합성어이다.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이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이마르의 평범한 공공건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금속가공, 목공 등 공예와 관련된 전 분야는 물론 공연과 무용에 이르는 모든 예술 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색채 교육을 책임지면서 순수 미술에서 추구했던 미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가전이나 가구에 접목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고 수많은 실험들이 어떠한 제도적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순탄하게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바이마르 시의 정권을 잡은 극우정당은 학교를 폐교할 목적으로 재정 지원에 대한 전면 중단을 결정하였고 바우하우스는 불가피하게 이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일상의 물건이나 심지어 기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산업 미학을 만들어낸 바우하우스. 1919년 독일의 역사적인 도시 바이마르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바우하우스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재정 지원이 끊겨버렸고 존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시 데사우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데사우는 독일 산업의 전진기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학교 건축을 위한 넉넉한 부지도 기꺼이 마련해 주면서 그로피우스의 종합예술학교 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데사우 시당국이 그로피우스에게 학교 부지로 제안한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넓은 벌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건축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실 공간. /bauhaus-dessau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터에 자리하게 될 예술학교를 설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따라 각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건축을 소개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나 형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쓰임에 적합하지만 자유롭고 통합적인 구조로 공간들을 배치하였다. 학교는 미술학교를 위한 건물은 물론 기술학교, 사무공간, 식당과 기숙사 등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은 보여주되 지루하지 않도록 대칭적 구조를 피하고 크기와 높이에 변주를 가했다. 그렇다보니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전체 구조는 여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좀처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물들은 구조적으로 대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부를, 하나의 공간에서 다음 공간을, 부분에서 전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구성하는 개별 건물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나 구조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에 외관의 피상적인 관찰을 통해 내부를 읽을 수 없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구조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바우하우스를 건축하면서 그로피우스의 고집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은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적인 건축철학은 ‘집과 가구는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문고리를 비롯해 전등이나 심지어 전기 스위치와 같은 소소한 대상들까지도 건물 전체 디자인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바우하우스에 사용될 조명들은 재학생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다. 각 층과 공간은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이렇게 기능성과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미적 감각까지 더해 진 바우하우스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1933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나치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듬해인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이전해 버리고 데사우의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나치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역겨운 건축’이라고 폄하한다. 1945년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데사우는 동독에 편입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독일 건축의 전통을 파괴하는 흉물로 취급했지만 완전히 철거를 하지는 않았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독 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1976년 바우하우스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고 바우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학교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예술은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탐구는 발견을, 발견은 창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창조가 탐구에서 비롯된다면 그 토양이 되는 것은 ‘자유’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남기고 간 위대한 예술정신도 역시 자유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바우하우스 bauhaus from A to Z

G is for Gropius.​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는 1919년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0년 전후해서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당시 미스와 코르뷔지에도 같이 있었다. 그후 아돌프 마이어와 사무실을 차린다. 유명한 유리커튼월의 파구스 공장 fagus factory 을 설계한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설정한 선언문도 썼다.

” 바우하우스는 예술 arts 과 공예 crafts 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건축의 근간으로 한다. 조각, 회화, 응용미술, 그리고 수공예는 새건축의 영원한 구성요소이다.”

그는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난다. 나치의 폭정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하였다가 1937년 미국으로 영구 이민한다. 하버드 GSD의 건축학과장이 되어 신건축( 소위 모더니즘)을 가르치며 유명 후학들을 길러낸다. 아이엠페이, 폴 루돌프, 필립 존슨 등 수많은 유명 건축가들이 그의 제자이다. 협업을 강조한 그는 제자들과 TAC이라는 사무실도 병행한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우하우스의 로고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독일어: Staatliches Bauhaus), 혹은 줄여서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에서 설립·운영된 학교로,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한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전까지 14년간 운영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양식은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한 이어지는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인, 실내 디자인, 공업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역사 [ 편집 ]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1918년, 도이치 제국이 붕괴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19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합병하여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가 설립되었고, 초대 교장으로 그로피우스가 취임하였다.

이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가 폐쇄되어, 1925년에 데사우로 이전, ‘데사우 시립 바우하우스’가 되었다. 데사우의 교사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것으로, 모더니즘 건축으로서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정식 건축과정이 설립되어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조형분야를 종합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교장직에서 물러나, 하네스 마이어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마이어는 과격한 기능주의자로 예술을 집단사회의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해 서로 규정된 객관적 질서로 이해하여 생활이나 기능을 떠난 기하학적 형상을 부정하였다. 그는 1930년에 해임되어,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에 취임하였고,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1932년에는 학교가 폐쇄되었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전하여 사립학교가 되었지만 결국 1933년,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미스 등은 미국에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전하였다.[1]

1996년에는 바우하우스의 바이마르와 데사우의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이념 [ 편집 ]

교육 [ 편집 ]

바우하우스 교육의 최종 목표는 건축을 중심으로 각기 분산된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는데 있었다. 이와 동시에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주장대로 공예와 순수미술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 창립 당시의 목표였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학교 내외의 복잡한 상황과 갈등 속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데, 교육이념의 문제점과 변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2]

첫째, 초기의 바우하우스에는 건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전쟁 후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공간과 재료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처했고, 따라서 특별한 시설이 요구되지 않는 이론과목에 집중했다. 따라서 그로피우스가 가장 중요시하던 건축 교육은 1927년에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건축 [ 편집 ]

바우하우스의 건축이념과 구성 원리는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협동작업의 개념으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 사이의 예술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협력과 설계자인 건축가, 시공자, 기술자와의 수평적인 협력체제로서 서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로 형태의 문제를 거부하고 시각적 순수성의 정확한 재료 및 구조 기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내면적인 생명력의 근원은 그 시대의 구조 기술이며 기술의 참된 실현이 건축의 초월된 의미로 확장될 때 건축은 그 시대의 역사로서 내적구조의 결정체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시대정신이 요구되는 프로그램의 정확한 이해와 경제성을 통하여 건축문제의 해결이 가능하였고 이러한 경제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재료 및 모든 부재의 규격화, 표준화로 연결되며 공업생산 된 부재는 협동 작업에 의한 현장조립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간 개념에 관한 것으로 개별적인 특성과 목적에 의한 ‘합목적성’개념과 시각적인 다양성에 의한 ‘시·공간’개념을 들 수 있다. 전자의 개념은 기능주의적 공간 구성과 공간의 정의, 그리고 목적에 맞는 공간의 부피와 크기에 의해 나타나고 후자의 개념은 형태들의 상호관입과 시점의 다양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형태의 상호관입은 고전적인 건축법칙을 부정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3]

디자인 [ 편집 ]

바우하우스는 실용성에 대한 목표는 있었지만 일관된 디자인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담당하던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디자인관에 따라 다양한 예술적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이유로 세 번에 걸쳐 지역을 옮기면서 외부적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1기(1919-1924)는 수공예를 강조하였으며, 자연과 재료에 대한 연구에 힘썼다. 2기(1925-1931)는 실생활 제품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을 확대하였고, 디자인의 기능성과 공공적 구조주의를 지향했다. 이는 사회주의적 디자인으로 발달하게 된다. 3기(1932-1933)는 표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였으며,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가르쳤다.[4]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표준을 만드는 것에 전념했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표준형의 의미는 만들기 쉬운 공장생산품의 의미가 아니라 문명사회에 있어서 최고수준의 원형을 의미하며, 우수한 품질을 가지며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예술을 산업제품이라는 현실과 잇고자 하는 점에서 예술과 수공업, 산업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이상적인 용도에 알맞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제품형태를 위한 탐구과정에서 오늘날 기능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는 불멸의 디자인들을 탄생시켰다.[5]

新바우하우스 [ 편집 ]

폐쇄 이후 학교의 체제를 지닌 바우하우스의 후신을 자처하는 기관으로는 미국의 뉴 바우하우스와 독일의 울름조형대학을 들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자들은 미국으로 대거 이주, 미국디자인 교육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모홀리 나기는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면서 바우하우스식 교육을 신대륙에 이식시켰다. 뉴 바우하우스는 재능 있는 학생들을 요구했으며, 수공업 또는 기계공업 제품의 디자이너, 박람회, 무대, 전시, 상업미술, 타이포그래피, 사진 등의 디자이너, 그리고 조각가, 화가, 건축가의 양성을 목표로 했다. 모홀리 나기는 과거 독일에서의 교육 경험을 토대로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육 프로그램을 기초로 하여 커리큘럼과 조직을 구성했으나 개교 후 일년도 되기 전에 재정상의 이유로 학교를 폐쇄하게 된다. 그러나 뉴 바우하우스는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6]

또 다른 바우하우스 출신의 막스 빌은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여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전후의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수용하고자 하였으며, 디자인의 학문화를 추구하였고 건축을 포함한 모든 디자인의 과학적인 개발을 위한 분화구가 되었다.[1]울름 조형 대학은 독립적인 산업 디자인 기업처럼 기능했다. 이 학교는 가전업체 ‘브라운’,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과 연계해 디자인을 발표했다. 브라운사 오디오 기기와 루프트한자 CI 등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디자인이었고 성공적인 산·학 연계 사례였다.[7]

영향 [ 편집 ]

바우하우스가 끼친 영향을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다녔던 학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상자 같은 건물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콘크리트 기둥들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사각형 창문들로 메웠다. 회색 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면 학교 앞 문방구에는 원색적인 공중전화가 있다. ⋯ 씻고 다듬고 데우기 좋게 최적의 동선으로 계획된 싱크대가 있고, 옷을 종류별로 나눠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붙박이장이 있으며, 금속 프레임에 가죽 옷을 입힌 안락한 소파가 있다. 눈앞에는 둥근 벽시계와 무지Muji의 네모난 CD 플레이어가 걸려 있다. 이 모든 디자인의 출발점은 ‘바우하우스’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8]

이처럼 바우하우스에서 생산한 전등, 벽지, 가구와 같은 산업제품들, 그리고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현대 디자인의 고전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이 바로 90년 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생활 속의 디자인’이라는 문구를 직접 실천함으로써, 학교를 넘어 하나의 건축·디자인 양식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9]

교육 [ 편집 ]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는데,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은 다른 나라들이 참고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즉, 오늘날 세계 각지의 미술대학의 교과과정 중에는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을 따른 것이 많다. 보통 1, 2학년까지는 구성, 소묘 판화, 해부학, 색채학 등을 이수하고, 3학년부터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도안(현재의 시각디자인), 염색공예, 도자기공예, 금속공예를 이수한다. 특히 금속, 요업, 섬유재료학 등은 화공계 교수에 의해 지도되며, 이렇게 재료학에 대한 비중이나 전공과목에 전문 기능인을 두어 교수의 수업을 보조하도록 꾀한 점은 공방 작업에 기초를 둔 조형분야의 유기적 연계와 창조적 전개를 유도한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10]

건축 [ 편집 ]

바우하우스의 절제된 기하학적 형태와 건축에 대한 경제적, 기술적 이익에 대한 관심 등은 국제건축양식의 모태가 되었고, 교육적 차원에서 이식된 바우하우스의 건축디자인 원리 및 이념은 현대건축의 급변하는 추세 속에서 그 전개발전을 계속해왔다. 1960년 이후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바우하우스 건축디자인 원리의 현대적 전개방식은 과학기술의 형상적 상징화, 기술공학적 해결방식의 추구, 건축구성요소 공업생산의 보편화, 기능복합체로써의 건축구성 기하학적 추상성의 계승 등으로 요약된다.[11]

다이슨사의 진공청소기

또한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루드비히 힐버자이머는 현대도시계획의 주요 이론가 중 한사람으로, 그가 최초로 도시를 연구한 것 중에는 “고층도시”라는 개념이 있다. 두 가지 레벨로 층을 이룬 것으로 저층부는 공방, 경공업, 시장, 차고 등으로 사용되며 상층부는 도시근로자의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실내공간, 가구, 설비의 표준화 덕택에 도시생활자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방 하나만 들고서도 이사를 갈 수 있다는 개념이 등장하였다.[12]

이러한 개념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들어서 많은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초기 주장을 발표한 후 40년 후인 1960년대에 “고층 아파트 블럭의 반복은 과다한 단조로움을 가져왔다. 모든 자연은 축출되었다. 나무와 풀밭들이 배제되었다. 결과는 메트로폴리스라기보다는 네크로폴리스로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의 불모지 풍경. 모든 면에서 비인간적이다”라고 밝혔다.[13]

디자인 [ 편집 ]

바우하우스는 이전의 장인의 시대에서 산업 디자인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면서 현대 디자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된 학교이지만, 이후 현대 디자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특징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처럼 단순화되고 기능적인 형태미로 드러난다. 기능을 따른 형태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예는 요즘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이슨의 청소기다. 이 제품은 최대의 기능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만을 남김으로써 독특한 외형을 자랑한다. 청소기가 동작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외형을 디자인함으로써 남성적이고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형태의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14]

철학 [ 편집 ]

화려한 언어와 수사로 장식하는 기존의 철학을 반대하는 관념인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15]

공감각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태와 색채의 정확한 상응 개념 인지시켰다. 또한, 색채가 언어보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각언어임을 강조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하여,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으며, 독일 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예술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하였다.[17]

애니 알버스

재료의 특성과 그것이 지닌 형태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모홀리 나기와 그로피우스를 완벽하게 보조하였다.

요하네스 이텐

대비원리를 기초로 한 조형교육을 실시했다. 기능적인 요소 위에 개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였고, 다양한 질감, 형태, 색채, 명암을 이용하여 평면과 입체를 다루게 하였다. 또한, 갖가지 대비의 성질을 인식시키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 되었는데 특히 재료와 질감의 연구에 역점이 주어졌다.

자연만물이 유래한 기본적인 형태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색채, 형식, 형상, 기법 등을 훈련시켰다. 학생들에게 형상 제작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발전시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의 3대 학장직을 맡았으나, 나치의 집권으로 더 이상의 자유로운 근대 디자인 교육이 불가능하게 되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듬해에 일리노이 기술대학(IIT)의 건축과 교수로 초빙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바우하우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미국의 현대건축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18]

피에트 몬드리안

게르하르트 막스

군타 슈퇼츠

갤러리 [ 편집 ]

각주 [ 편집 ]

바우하우스(Bauhaus) 100년… 예술·디자인·건축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제안한 정신혁명이었다

↑ 데사우 시절의 바우하우스 교사(校舍). 1925~1926년 지어졌다.

by 김지지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은 지금 ‘바우하우스 축제 중’이다. 600여 개의 기념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과 성취를 알아본다.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미술과 공예와 건축을 종합한 독일의 바우하우스(1919~1933) 학교는 현대 산업디자인과 모더니즘 건축의 산실이다. 이 바우하우스 설립의 직접적인 연원을 좇다 보면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 헤르만 무테지우스(1861~1927)와 맞딱뜨린다.

그가 활약한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강대한 산업국가였다. 그러나 예술적 독창성과 상업적 활용면에서는 영국에 뒤졌다. 독일은 질시 어린 눈으로 영국을 주시하다가 1896년 건축가이자 공무원인 무테지우스를 주영 독일대사관의 문화 담당관으로 런던에 파견했다. 무테지우스는 대사관 직원(1896~1903)으로 근무하면서 영국의 합리적인 주택 건축과 참신한 공예품 생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영국의 주택’(1904년)이라는 3권짜리 책이었다.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공예와 건축물에서 받은 감명을 독일에서 미술공예학교를 진흥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그의 주도로 건축가·디자이너·기술자·공예가·기업인들이 규합된 ‘독일공작연맹’이 1907년 가을 뮌헨에서 발족했다. 미술과 공예와 공업을 결합해 더욱 향상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다른 국가들과의 산업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는 게 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는 수공예를 전통 장식의 모방에만 의존하는 구습으로 치부하며 산업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예의 기준으로 규격화(표준화)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산업화 시대의 규격화는 생산 증대뿐만 아니라 예술적 질도 담보해야함을 강조했다. 이후 디자인은 전통 공예에서 산업 예술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초대 교장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독일공작연맹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 페터 베렌스(1868~1940)였다. 그는 1903년 뒤셀도르프 지역의 미술공예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전통 공예와 기계 생산을 조합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을 재구성했다.

1907년부터는 독일 최대 가전 회사인 ‘아에게(AEG)’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했다. 베렌스는 상품 디자인, 인쇄물, 건물 등에서 독창적인 디자인을 제시하고 기업 로고, 광고, 전구, 건물 등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심미적 결정을 감독했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브랜드 컨설턴트였다. 베렌스가 설계한 AEG 터빈 공장은 현대적인 건축의 전형으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포진했다.

이중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에게 주어진 운명은 10여 년 후 건축·디자인 전문학교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독일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 공과대(1903~1907)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 독일공작연맹에 가입·활동하고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근무(1907~1910)했다. 그때의 경험은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고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미술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술과 기술 통합하고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 연결하는 바우하우스 구상

기능과 실용을 중시한 그로피우스의 미의식은 1911년 그가 처음 의뢰받아 설계한 라인강변 알펠트에 있는 파구스 제화공장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전체 10개 동으로 지어진 이 공장 단지는 근대건축과 산업디자인의 발전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 실력을 인정받아 1915년 작센대공국이 문화도시 바이마르에 설립한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 교장에 발탁되었다. 그는 산학을 연계한 혁신적인 학교 체제를 시도했으나 기존의 아카데미 교육 방식에 젖어 있는 교수들과, 수공업을 고집하는 장인연맹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했다.

그로피우스는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뀌고 사회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급진적 예술가 단체인 ‘그룹 11월’과 ‘예술을 위한 노동회의’ 등에 가입·활동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새출발을 돕기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런 그에게 바이마르시가 젊은 세대에게 실용적이고 지적인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로피우스는 1919년 4월 1일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통합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문을 열고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로 ‘건물(haus)을 짓는다(bau)’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한 이름이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에서 “이제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가로놓인 높다란 장벽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통일 속에 포용하고… 새로운 미래의 건축을 창조하자”고 역설했다.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고 그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을 연결하는 바우하우스를 구상한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미술과 공예가 건축으로 귀결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바우하우스 건축학과는 1927년 설치되었다.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 제시

바우하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건축을 지배한 것은 화가·판화가·조각가·건축가의 고등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였다. 보자르식 건물에서, 강철 지주(支柱)는 무거운 석재 뒤에 숨겨져 마치 석재가 건물의 중량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였고 콘크리트 외장은 화려한 장식 속에 감춰졌다. 건물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이러한 건축을 ‘현대의 후퇴’로 생각하고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을 제시했다.

바우하우스에는 학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교수(선생)와 학생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간의 일방적인 위계와 차별도 없앴다. 가르치는 사람은 중세의 길드 전통에 따라 장인으로 불리고 배우는 사람은 수준에 따라 직인이나 도제로 불렸다. 바우하우스는 천재의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적 감각과,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기술을 통합하는 데 진력했다. 통합의 이유는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는 데 있었다.

학생들은 6개월간 형태와 색채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는 예비 과정을 마친 뒤 합격 판정을 받으면 도제로 등록되어 자신이 선택한 공예나 기술 분야에서 3년간 엄격한 훈련을 쌓았다. 그로피우스는 예술적·장인적·공업적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라이오넬 파이닝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하네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건축가들을 바우하우스로 초빙했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 틀어

바우하우스에 새로운 변화가 시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해 교수로 합류한 헝가리 태생의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제안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중세주의와 낭만주의적 공예 중심에서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1923년 8월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이러한 전환을 입증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바이마르 시민들은 바우하우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고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욱이 바이마르 지역 의회는 바우하우스의 혁신적 실험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지역 공예가들은 산업체들과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는 바우하우스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가 공산당이나 유대인과 관련이 있다는 비방까지 난무했다.

결국 1924년 그로피우스에게 사임 압력이 가해지고 바우하우스의 재정 지원까지 삭감되면서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데사우,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여러 도시가 괜찮은 유치 조건을 제시해 그 가운데 1925년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를 틀었다.

데사우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의 산업화를 데사우에 실현하는 것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1926년 10월 완공된 바우하우스 교사(校舍)는 이러한 활동의 출발점이었다. 교사는 강의실, 공방, 극장, 식당, 체육관, 스튜디오, 사무실, 기숙사를 서로 연결하고 옥상에는 정원이 있는 복합 건물로 꾸며졌다. 특히 그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지어진 뾰족한 지붕의 전통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비대칭적인 평면 구성, 평평한 지붕, 흰색으로 칠한 벽, 길 쪽으로 나 있는 수평적인 창문 등으로 설계해 당시의 건축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수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4채의 ‘마이스터 하우스’ 역시 현대 기능주의 건축의 획기적인 건물로 평가받았다. 바우하우스 교사와 마스터스 하우스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 디자인 꽤 많아

바우하우스의 유산은 건물로 한정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등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생산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24년 첫 선을 보인 ‘바겐펠트 램프’ 디자인으로, 산업사회의 유리와 금속을 거실로 들여와 호평을 받았다. 장식없는 단순함과 튼튼함과 재료의 실용성을 인정받아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대량 제조되어 유행했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실험적 디자인이 성숙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장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 제품은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 의자’와 ‘캔틸레버 의자’다. 특히 ‘바실리 체어’는 안락의자의 혁신을 가져왔다. 자전거의 철제 프레임에서 영감을 얻어 의자에 최초로 강철 파이프를 썼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2월 “할 일은 다했으니 앞으로 건축에 전념하겠다”며 교장에서 물러났다. 하네스 마이어가 후임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공산주의 이념을 가르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시 당국에 의해 1930년 여름 해임되었다. 뒤를 이어 부임한 3대 교장은 기능주의 옹호자인 미스 반 데어 로에였다. 그는 마이어의 정치 성향이 남긴 흔적을 지워나갔으나 1932년 데사우의 시정을 장악한 나치가 “볼셰비즘과 퇴폐주의를 만연시킨다”며 바우하우스를 폐쇄하는 바람에 바우하우스는 다시 베를린으로 세 번째 이사했다. 하지만 베를린 바우하우스 역시 나치 정권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감시로 인해 1933년 4월 자진 폐교했다. 14년 동안 33명의 교수와 1,250명의 학생이 배출되었다.

학교 폐쇄는 교수와 학생들을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도처로 분산시켜 오히려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하버드대 건축학과로 자리를 옮겨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미국에 이식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에서 건축과 교수로 활동하며 많은 건축가를 배출했고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 운동을 전개했다.

바우하우스 출신 교수와 학생들이 전파한 바우하우스 철학은 전 세계 건축 동향에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도 1933년부터 바우하우스 형식의 건물이 4,000여 채나 건립되었다. 이 건물들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사회의 시각 환경을 바꿔놓고 현대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라기보다는 지도자로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바우하우스 – 건축편집자 editing x architecture

Bauhaus

바우하우스 로고, 1921, Design by Oskar Schlemmer

일반적으로 바우하우스(독일어: “건축,주택”)로 알려진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는 공예와 순수 미술을 결합한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된 독일 예술 학교였다. 학교는 디자인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유명해졌으며, 대량 생산의 원칙과 개별 예술적 비전을 통합하고 미학과 일상적인 기능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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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바우하우스 운동과 남북한 건축

2019년은 바우하우스 건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이를 기념해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한국의 현대건축 역시 이 학교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바우하우스에 관한 열기는 그다지 뜨겁지 않다. 바우하우스와의 관계가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2일,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와 예술학교가 통합되어 새로운 학교로 조직될 무렵,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1916년 설립된 경성공업학교에서 이제 막 한국인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활약상은 주로 일본 잡지를 통해 흘러들고 있었다. 1930년대 박길룡과 김해경(이상) 등이 바우하우스를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이후 바우하우스가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면서 한국 건축과의 직접적 교류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살아남아 1950년대 이후 남한과 북한의 건축과 조우하게 된다. 이 글은 바우하우스의 정치 이념, 동아시아로의 확산, 그리고 한반도의 유입 등에 대해 살펴보고, 한국에서의 바우하우스 유산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슈들

바우하우스의 성립과 전개에서 정치적 이슈들은 민감한 주제로 항상 따라 다녔다. 1919년 개교해서 1933년 폐교할 때까지 바우하우스의 활동 기간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존속 기간(1918~1933)과 거의 일치한다. 그만큼 이 학교가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바우하우스는 공립학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학교운영을 위해 지방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필수였다. 그렇지만 지방의회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지원을 달리했다.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그리고 베를린으로 옮기게 된 것도 주민 여론과 지방정부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지 몇 달 되지 않아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비판자들은 주로 바우하우스 교육의 국제주의적 태도에 반기를 들었다. 교육이 전통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독일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반대자들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1 이러한 비판과 반발에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훈련받은 예술가들도 가세했다. 이렇게 바우하우스의 활동은 정치적 이슈를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여기에는 바우하우스 교수진과 학생들의 개인적 성향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바우하우스가 설립될 무렵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을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당시 독일의 주요 아방가르드 운동인 예술노동평의회, 글래스 체인, 데어 링 등을 관통한 아이디어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건축을 통한 여러 예술 분야의 통합이다. 브루노 타우트와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적으로 창립한 예술노동평의회는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예술은 더 이상 소수의 사치품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 향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운동의 선언문에는 “모든 인민의 일이 될 사회주의 예술을 찬양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구하여 바우하우스를 가장 진보적인 학교로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도 1926년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념탑을 설계하면서 사회주의자로 오인받았다. 기념탑의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급진적 지도자인 데다가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킨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진들은 개인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만큼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당국의 폐교 조치 이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를 찾아가서 “바우하우스는 어떤 이념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념이 정치와는 상관없다”▼2고 설득했는데 외부에서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하네스 마이어가 교장으로 재직한 1928년부터 1930년 동안 바우하우스는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 미술평론가인 프랭크 휘트포드에 따르면, 마이어는 “근대 세계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독트린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았다. 이런 신념 아래 바우하우스에 정치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정치적 토론이 장려되었다. 공산당 세포조직이 형성되어 전교생의 10%에 해당하는 열다섯 명의 학생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바우하우스의 적대자들은 계속해서 이 학교가 볼셰비키의 온상이라는 소문을 언론에 퍼트렸다.”▼3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박해로 결국 1933년 폐교됐다. 교수진과 학생들은 해외로 뿔뿔이 망명을 떠났다.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정착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 1기 졸업생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합류했다. 3대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IT) 교수로 임명되었고,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루트비히 힐베르자이머와 발터 페터한스도 이 대학의 교수진으로 합류했다. 미스는 1938년 교육 프로그램을 개편하면서 IIT에 바우하우스 이념을 반영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역시 1937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뉴바우하우스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 이렇게 주요 교수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교육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게 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나면서 바우하우스 이념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바우하우스의 역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교수진들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교사 ⓒT.Franzen

사회주의 건축가들

그렇지만 이 같은 역사에서 가려진 인물들이 존재한다. 나치 독일에서 탈출해 소련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대표적으로 바우하우스 2대 교장인 하네스 마이어를 들 수 있다. 브루노 타우트와 에른스트 마이 등 독일 건축가들도 소련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의 생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점은 1930년 바우하우스 교장직에서 쫓겨난 직후 마이어가 한 인터뷰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나는 소련에 일하러 갈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거기에서 사회주의가 생겨났고, 여기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가 싸워서 만들려는 사회가 존재한다.”▼4

그렇지만 이들의 선택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소련에서의 활동 역시 역사에서 가려져 있다. 특히 스탈린 집권 이후 대부분은 소련을 떠나 제3국으로 행선지를 정하게 된다. 브루노 타우트는 1933년의 혹독한 정치적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소련을 빠져 나온 뒤 일본에 머물다가 최종적으로 터키에 정착했다. 에른스트 마이는 1933년에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갔다. 하네스 마이어는 다른 건축가들에 비해 보다 오래 소련에 머물렀다. 그는 소련 정착 초기에 VOPRA라는 단체에 가입해 건축을 마르크스주의로 해석하는 방법에 매달렸고, 마르크스주의 건축 원칙들을 13개로 정립했다. 하지만 1932년 소련 정부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된 원칙으로 채택하면서, 더 이상 건축 작업을 하지 않고 도시계획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 분야에도 전통적인 바로크 방식이 재도입되면서 더 이상 본인의 생각을 펼쳐나가기가 힘들어졌다. 여기에 주변 동료들이 체포되고 추방되면서, 마이어는 1936년 스위스로 귀국했다가 멕시코로 건너가 오래 머물렀다.

바우하우스가 해체된 후 소련으로 향한 독일 건축가들의 전후 영향력은 그로피우스나 미스와 비교해서 미미한 수준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해 자유주의 국가들은 냉전체제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정보 교환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들이 펼친 활동들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데사우와 바이마르가 동독 지역에 속하면서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서방에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로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고, 이전까지 접근이 어려웠던 소위 ‘바우하우스 좌파’들에 대한 자료들이 풀려나면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재평가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의 확산

바우하우스는 비록 1933년 8월 10일 공식적으로 폐교되었지만, 그 이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바우하우스와의 채널이 가장 먼저 열린 곳은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 분리파운동의 주요 건축가들은 대학 졸업 후 독일로 건너가서 바우하우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 분리파운동은 1920년 도쿄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6명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일본 최초의 근대건축 운동이었다. 주요 멤버인 이시모토 기쿠지는 1922년에 그로피우스로부터 배운 최초의 일본인 건축가였다. 또 다른 멤버인 호리구치 수테미는 1924년부터 2년 동안 유럽에 머물며 독일 건축가들과 교류했고 1923년에 직접 바우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야마다 마모루는 1920년대 후반에 그로피우스를 만나기 위해 독일로 갔으며, 192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제2차 CIAM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렇게 일본의 젊은 건축가들이 근대건축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면서 바우하우스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건축 잡지들도 바우하우스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신건축」은 1927년 8월과 1928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발터 그로피우스와 하네스 마이어의 건축을 소개했고,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학생들을 독일로 향하도록 이끌었다.▼5 일본 건축가들과 바우하우스 사이의 접촉은 193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야마와키 이와오는 도쿄미술대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한동안 실무에 종사하다가, 독일로 건너가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하면서 발터 페터한스로부터 사진을 배웠다. 그가 1932년에 제작한 ‘바우하우스에 대한 치명적 일격(Der Schlag gegen das Bauhaus)’이라는 포토몽타주는 당시 바우하우스가 처한 정치적 곤경을 잘 전달해주는 작품으로 여러 책에서 인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건축가들을 통해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흘러 들어왔다는 점이다. 일본 분리파운동의 멤버였던 쿠라타 치가타다는 1928년에 도쿄고등공예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케이지코보(型而工房)를 결성하여 새로운 공예운동을 펼쳤다. 이 그룹은 “초창기에는 종합건축(Gesamtkunstwerk)에 대한 지향을 갖고 실내 전반을 대상으로 디자인 활동을 실시했으나, 쿠라타가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유럽에 건너가서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그로피우스로부터 근대건축을 배우고 귀국한 후에는, 생산성과 경제성 등의 합리화를 강하게 의식하고 실내공예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의 구현을 목표로 삼게 된다.”▼6

박길룡이 설계한 보화각 ⓒJung Inha

1930년대 한국 건축계를 대변하는 건축가 박길룡은 193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현대와 건축-전문화하는 건축과학’에서 쿠라타를 인용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건축론은 건축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고, 가치의 표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현대의 건축론이 선험적인 법칙을 견지하는 연역적 접근이 아니라, 개개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거기에 담겨 있는 본질과 미를 추구하는 귀납적이고 경험적 접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현대건축이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즉 “과거 건축은 조형미술의 영역에서 취급되었으나, 현대의 건축은 공학적 산물로서 의의가 깊다”고 보았다. 이어 박길룡은 이런 생각이 쿠라타 치가타다▼7의 건축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며 그것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박길룡이 보기에 “쿠라타의 건축론은 그가 생각하는 바와 다소 거리는 있으나 현대건축 사조의 주류”라고 인식했다. 여기서 박길룡이 가리킨 현대건축 사조의 주류는 바로 바우하우스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보화각을 설계하는데, 그것은 바우하우스의 건축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김해경(이상)의 시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쓴 <慼寬, 娤飾, 藝術>에는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모호이-너지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모호이-너지가 「M」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구성주의와 프롤레타리아(Konstruktivismus und Proletariat)’를 이상이 일어로 읽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모호리-, 나기이……/감각적 훈련, 감각연습/재료의 경험, 구조, 조직, 조성, 집합체/창작활동의 방법으로서의 생물공학, 원칙……책임……형식자의 자유

장식/고대에 있어서는 오나멘트란 이따금 기능/과 융합해 있었다./평면편성, 콤포지션, 콘스트락션, 전설./고전미의 공리/아카데미 교육/예술은 상부구축을 한다.

한국과 일본 외에도 바우하우스는 중국의 근대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채널은, 1879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상하이 세인트존스 대학교를 통해서였다. 중국 건축가 황주오센은 영국 AA스쿨을 졸업하고서 그로피우스가 교장으로 있었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한 다음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1942년 그는 세인트존스 대학교에 건축과를 개설하는 임무를 떠안는데, 그때 리하르트 파울릭을 교수로 초빙하며 바우하우스식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 파울릭은 데사우 바우하우스에서 6개월 수학한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한스 포엘지히로부터 건축을 배운 독일 건축가였다. 그는 1927년 졸업 후 그로피우스 사무실에 들어가서 데사우 주택의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울릭은 자신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치의 집권 이후 돌격대로부터 공격을 받고서 독일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의 행선지는 소련이 아닌, 그의 대학 친구가 있던 중국 상하이였다. 1933년 상하이에 도착했던 그는, 그의 동생과 함께 모던 홈즈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건축과 실내장식, 그리고 무대 디자인을 다루었다. 바우하우스 이념은 이들 작품들을 관통하며 등장하고 있다.▼8 그리고 세인트존스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서도, 주로 바우하우스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훗날 이 대학은 동지대학교로 흡수되어 중국 현대건축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한반도에 남긴 흔적들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돌입한 후, 바우하우스는 한반도에 다시 찾아왔다. 바우하우스와의 접촉은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 접점은 김종성이 1956년 IIT에 입학하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이 대학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힐베르자이머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들이 이 대학에서 세운 교과 과정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데, 김종성은 그것에 따라 건축가로 성장했다. 그는 1972년까지 미스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그 후로 IIT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 한국에 귀국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남겼다.

두 번째는 북한의 전후 재건을 위해 동독의 건축가들이 함흥을 방문하면서였다. 1954년 동독 정부는 188명의 동독 기술전문가를 북한에 파견하여 전쟁 중에 파괴된 함흥을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이들 전문가 사이에는 여러 명의 건축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네스 마이어의 제자였던 콘라트 퓌셸도 그중 한 사람으로, 그는 함흥 도시계획과 단지계획의 책임자였다. 현재 함흥에는 동독 출신 건축가들이 설계한 바우하우스식 주거단지와 건축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퓌셸이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에 남긴 함흥 도시계획 관련 도면들은, 바우하우스 이념이 사회주의 도시계획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의 등장 이후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북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남한의 경우 1970년대 이후에도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지속되어, 그때는 주로 미국 대학에서 교육받은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귀국 후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에 발맞추며 건설 정책을 주도했고, 바우하우스 이념은 대규모 건설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으로 채택되었다.

1. Justus H. Ulbricht, ‘Un-German activities, attacks from the right, 1919 – 1933’ in Bauhaus conflicts, 1919 – 2009, ed. Philipp Oswalt (Hatje Cantz, 2009), p. 18.

2. Tom Dyckhoff, ‘Mies and the Nazis’, in the Guardian, 30 Nov. 2002.

3. Frank Whitford, Bauhaus, trans. Dae-il Lee (Seoul: Sigongsa, 2000), pp. 190-191.

4. In Sovremennaia architektura, no. 5 (1930), Moscow, (Russian). As cited in Claude Schnaidt, ‘Hannes Meyer, Marxist and modernist (1889-1954)’, in The Charnel-House, https://thecharnelhouse.org/2013/08/10/hannes-meyer

5. Enrique Rojo, Transnational Connections for Architectural Design between Germany and Japan on the Eve of World War II, The ACDHT Journal , No. 2 (2017), p. 23.

6. アンヌ·ゴッソ、敷田弘子, 型而工房の方法論, フランス外務省·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在外共同研究所 2009, p. 4

7. 박길룡의 글에는 ‘蔵田忠周’로 쓰여 있으나 ‘蔵田周忠’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8. 侯丽 · 王宜兵, 『鲍立克在上海: 近代中国大都市的战后规划与重建』 (上海:同济大学出版社, 2016)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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