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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재연 | 제너럴 셔먼호 기억나는 사람 클릭 | 신미양요, 박규수, 어재연 | 핵심 In 한국사 79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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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 나무위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위치한 어재연의 묘소. 오른쪽은 남동생 어재순의 묘. 3. 여담[편집]. 조선 후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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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6/2021

View: 7155

어재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재연(魚在淵, 1823년 ~ 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자는 성우(性于),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공충도(충청도) 병마절도사,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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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2/13/2022

View: 4149

어재연(魚在淵 : 조선 고종 연간) – 인천광역시

어재연은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끝에, 고종 3년(1866)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때 군사를 이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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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cheon.go.kr

Date Published: 7/20/2022

View: 6963

어재연(魚在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쟁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하여 국가 간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간에 수행되는 조직적인 투쟁. 최효일조선후기 형조좌랑, 훈련판관 등을 역임한 무신. 남연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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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6/7/2022

View: 6189

어재연 1823 ~ 1871 – 우리역사넷

어재연(魚在淵)은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를 맞아 강화도 광성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을 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무관이다. … 어재연은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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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0/25/2022

View: 503

136년 만에 우리 품에 온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문화재청은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어재연 장군기’를 대외에 공개하고 설명회를 가졌다. 2008년 3월 특별 전시를 열었고, 5월 이후 인천광역시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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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a.go.kr

Date Published: 11/13/2022

View: 8088

이천의 인물

어재연은 1823년(순조 23) 어용인(魚用仁)의 장남으로 이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가 율면 산성리에 보존되어 있어 그의 일대기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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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cheon.go.kr

Date Published: 1/30/2022

View: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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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어 재연

  • Author: EBSi 고교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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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zIf2FkgJqQ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재연

魚在淵 조선국 진무영 중군 임기 1871년 음력 4월 14일 ~ 동월 24일 군주 고종 신상정보 출생일 1823년(순조 23년) 출생지 조선 사망일 1871년(고종 8년) 음력 4월 24일 사망지 조선 강화부에서 전사 학력 1841년(헌종 7년) 무과 급제 본관 함종 종교 유교(성리학)

신미양요 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가 미해군 콜로라도함에 실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에 대한민국에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왔다.

어재연(魚在淵, 1823년 ~ 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자는 성우(性于),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공충도(충청도) 병마절도사,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해 4월에 어재연을 진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케 하였다. 4월 16일에 광성진에 도착한 그는 이후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군에게 패했고 동생 어재순과 함께 미 해병 제임스 도허티의 총검에 찔려 전사하였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즉시 정2품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신미양요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신미양요 입니다.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미해병대 병력을 싣고 1871년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한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6월 1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면전쟁이 최종목적은 아니고, 무력시위를 하여 개항을 하게 하려는 포함외교가 목적이었다.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이 총에 맞아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240명이 전투 중 사망, 100명 익사, 20명이 포로로 3명이 전사,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함의 무력시위로 개항을 하게 하여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전통적인 포함외교의 목적달성은 실패하여, 시장개방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철군했다.

4년 뒤인 1875년 9월 20일에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며, 이를 구실로 일본이 군함을 보내 포함외교에 성공한다. 즉,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여 조선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현대의 국제법으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다.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136년이 지난 2007년 10월 22일, 신미양요때 미 해병대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가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일반에 공개되었다.[1]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Home>인천소개>인천역사>인천인물 > 어재연(魚在淵 : 조선 고종 연간)

어재연(魚在淵 : 조선 고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어재연은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끝에, 고종 3년(1866)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때 군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 이번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공으로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6월 1일 손돌목 포격사건의 개시로 한미간 최초의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위급이 고해지자 어재연은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포로 급히 달려나가 6백여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에 이르러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드디어 미군이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하면서 격전 끝에 초지진을 점령하였고, 11일에는 덕진진까지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이 때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 양면작전을 개시하여 해상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지상에서는 야포 사격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끝내는 광성보로 돌입해 온 미군과 어재연 군이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손에 칼을 잡고 적을 무찔렀으며, 포탄 10여 개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적군에 던지며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불타는 충성심과 애국열의를 높이 추앙하여 병조판서 지삼군부사(兵曹判書 知三軍府事)를 추증받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1864년(고종 1) 장단부사(長湍府使),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어재연 [魚在淵] 목숨을 바쳐 미국 함대를 격퇴하다

어재연(魚在淵)은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를 맞아 강화도 광성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을 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무관이다.

어재연은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성우(性于)이다. 1823년(순조 23) 아버지 어용인(魚用仁)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俞氏) 사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이 없었으나, 할아버지 어석명(魚錫命)은 인동부사(仁同府使)까지 지냈다. 어재연의 형인 어재호(魚在濠)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동생인 어재순(魚在淳)은 형 재연을 따라 신미양요에 백의종군으로 참가하였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이후 어재순은 그 공로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로서 부사(府使) 한택리(韓澤履)의 딸이다. 어재연은 어렸을 적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힘이 센 장사로 알려졌다. 1841년(헌종 7)에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음력 10월에 총융초관(摠戎哨官)이 되면서 무관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47년(헌종 13)에는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었으며, 1850년(철종 원년) 음력 5월에는 평양중군(平壤中軍)이 되었다. 그런데 어재연이 광양현감에 아직 재임하고 있었을 때 전라도 일대 각종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적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1850년 8월 이 조운선이 과적과 악천후로 인하여 난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에 대한 문책으로 1851년 음력 4월 충청북도 제천에 유배되었다가 1852년(철종 3) 음력 4월에 풀려났다. 1853년 4월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이후 내금위장(內禁衛將), 훈국별장(訓局別將), 풍천부사(豐川府使), 도감천총(都監千摠), 대구영장(大丘營將), 장단부사(長湍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 음력 3월에 공충도(公忠道: 현재의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제수(除授)되었다. 이 해에 조선정부가 조선에 입국해 있던 프랑스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신자를 처형하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였고, 이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강화도로 올라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충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어재연은 이곳의 방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쓰고, 또 천주교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후 1866년 음력 11월에는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발령받아 4년여 동안 재임하였다. 1871년 음력 2월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어 금위영중군(禁衛營中軍)에 임명되었지만, 곧 병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해 음력 4월에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같은 달 14일 특별히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곧바로 출진하였다가 4월 24일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순절(殉節)하였다.

어재연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을 때마다 지방행정을 잘 처리하여 귀감이 되었다. 비록 1847년 첫 지방관이었던 광양현감으로 있을 때 조운선 선적의 실수로 인하여 유배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지방관에 부임할 때마다 지방의 폐해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풍천부사에 재직하였을 때는 바닷가 주변 마을에 염분으로 인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자 새로 양전(量田)을 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다시 부과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1859년(고종 10) 방어사(防禦使)의 이력(履歷)을 허락받았다. 대구영장 재직 시에는 좀도둑 단속을 잘 하여 백성들이 편안케 하였다. 이때 고종이 즉위하면서 1864년(고종 1) 각도 관찰사에게 어진 관리[良吏]를 선발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어재연이 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곧이어 장단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은 개성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로 가는 요로였기 때문에 중국 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의 행차가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각종 연회 등 경비지출이 많았는데, 이를 틈타 아전들이 세금 포납과 과중한 조세 징수, 불공평한 과세를 행하였고, 따라서 백성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어재연은 이곳에 부임하자 세금 비리를 근원적으로 밝혀내고 또 수세상의 감면 혜택을 공정히 베푸는 등 조세행정을 바로잡았다. 그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 내리는 옷감)를 하사받았다. 1866년 음력 11월에는 회령부사로 발령받았다. 이곳은 국경지대로 조선상인들과 중국상인들 간의 거래를 둘러싼 갈등이나 국경주변의 도적떼 출몰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쟁단(爭端: 다툼의 실마리)이 끊이지 않았다. 어재연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국경시장을 일시 폐쇄함으로써 중국상인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도적패거리를 엄히 단속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1869년에 이르러 어재연은 회령부사로서의 임기가 다 되어 교체되어야 했는데, 백성들이 어재연이 계속 지방관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여 이례적으로 1년 유임되었다.

1866년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평양의 군민들과 충돌하여 선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한 응징과 손해배상 청구, 그리고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신미양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가 군함 5척에 병력 총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음력 4월 1일(양력 5월 19일)에 충청도 해미(海美) 앞바다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북상하면서 조선 해안을 측량하였는데, 미국 함대의 접근 소식은 곧 조선정부에도 알려졌다. 결국 조선정부는 4월 13일 대표 3인을 함대에 파견하여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측은 강화해협 탐측을 실시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고, 다음날 실제로 탐측을 강행하였다. 미국 측 탐사대가 강화도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수병이 포격을 시작하였고, 탐사대도 응사하여 쌍방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군의 대포는 미국 측의 대포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진지에서 철수하였다. 상황이 이와 같이 위급하게 돌아가게 되자, 조선정부는 빈자리로 남아 있던 진무중군 자리에 급히 어재연을 임명하고, 제반 임명 절차를 생략한 채 서둘러 강화도로 파견하였다. 4월 15일에 어재연은 훈련도감 2초(哨: 1초는 125명)와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의 각군 1초씩을 선발하여 총 5초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출발하였다. 이튿날 광성보에 도착하자마자 총 1,000여 명에 이르는 군사를 수습하여 광성보 소속의 3개 돈대에 조정 배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대포 143문을 총동원하여 재배치함으로써 항전 태세를 강화하였다. 미 함대 수뇌부는 손돌목에서의 포격전에 대해 조선군이 미국 함대에 불법적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것으로 규정하고, 조선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리고 10일 이내에 조선정부가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을 경우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다는 서신을 장대 끝에 매달아 율도 해안에 꽂아 두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 측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4월 17일 미 함대 측에 친서를 보내어, 손돌목에서의 충돌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조선군 수비대의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미 함대 측은 조선에서 적절한 사과를 취할 것을 재차 요구하며 만약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결국 조선정부와 미 함대 측과의 교섭은 결렬되고, 마침내 음력 4월 23일(양력 6월 10일) 미 함대는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날 미 함대와 조선군과의 최초의 전투는 강화해협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던 초지진에서 시작되었다. 초지진 수비대는 미 함대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상륙을 저지하고자 하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오히려 진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다수의 사상자만 남기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미 함대가 새벽 초지진의 북쪽에 위치한 덕진진을 공략하여 조선수비대는 다시 패퇴하였다. 어재연이 방어태세를 갖춘 광성보에는 4월 24일 정오가 지난 무렵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성보는 전방에서는 미 함대의 강력한 포격을 받았고, 후방에서는 덕진진에서부터 쳐들어온 미 상륙부대의 곡사포 공격을 받아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다. 미 함대 측은 해상 지원부대의 함포사격이 끝나자 미군 상륙부대가 돌격을 개시하였고, 급기야는 광성돈대 부근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광성진의 조선수비대는 함포 및 곡사포 공격으로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하지만 끝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재연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미 함대 측은 광성보 전투에서 단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밖에 내지 않을 정도로 손실이 가벼웠다. 하지만 미 함대는 강화도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화력을 소비하여 더 이상 상륙작전을 감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에 따라 4월 25일 일단 모함(母艦: 이동 기지 역할을 하는 군함)이 있던 작약도로 철수하였다. 4월 27일에는 조선군 포로를 조건 없이 석방하며 교섭을 진척시키고자 하였지만, 조선정부 측에서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결국 미 함대 측은 더 이상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5월 26일 작약도에서도 완전히 철수하였고, 이로써 신미양요는 종결되었다. 어재연은 4월 28일 광성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병조판서와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또 그의 아우인 어재순도 형 재연과 함께 광성보에서 항전한 공로를 기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후 어재연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척화(斥和)의 본보기로서, 또 국권 침탈의 위기 상황에서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킨 영웅으로서 예찬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136년 만에 우리 품에 온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한국 땅을 밟기까지의 여정

‘수자기’의 귀환은 2007년 3월 7일 문화재청에서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보낸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되었다. 4월 초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한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나 돌려주는 것은 미국법으로 불가능하고 다만, 연구의 목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도와 줄 수 있다”는 답변을 주었다. 이에 방문단은 4월 25일 애나폴리스로 향했고, 현지에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반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장기대여가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그리고 6월 초 장기대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미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에게 보냈고, 6월 말에 ‘수자기’를 10년에 걸쳐 한국에 장기대여해주기로 결정했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신미양요 당시 빼앗겼던 ‘수자기’는 136년 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자칫하면 ‘수자기’가 북한으로 갈 수도 있었다. 미국의 웨인 엘러드 상원의원이 1968년 납북된 미 해군함 ‘푸에블로호’의 반환에 관심이 있었고, ‘수자기’와 ‘푸에블로호’를 북한과 맞교환 할 것을 미 국무부에 요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에서 불법적으로 납북된 해군함정 문제로 평양과 협상할 의사가 없음을 밝힘으로써 ‘수자기’의 귀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재연 장군기’는 2007년 10월 15일과 16일, 양측 입회 하에 상태를 점검한 뒤 대여협정서에 서명하고, 18일 워싱턴에서 항공편으로 운송되어 19일 오후 5시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문화재청은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어재연 장군기’를 대외에 공개하고 설명회를 가졌다. 2008년 3월 특별 전시를 열었고, 5월 이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다가 2009년부터는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전시·보관하고 있다.

수자기 반환이 갖는 역사적 가치

당시 학계에서는 수자기 귀환의 의미를 ‘국기가 없었던 조선에서는 장수기가 곧 조선의 국기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비록 대여 형식이지만 장수기가 돌아온 것은 주권을 되찾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미국 애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수자기는 가로 4.13m, 세로 4.30m의 대형 크기에 삼베 재질로 된 현존유일의 조선시대 장군의 깃발이다.

귀향한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魚在淵:1823~1871) 장군이 광성보(廣城堡)를 본진으로 하여 이 수자기를 걸고 싸웠던 역사적증거이자 희귀한 군사자료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신미양요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당시 통상체결 요구에 대해 조선 정부의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손돌목(孫乭項)을 지나 광성보로 진입했고, 허가 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아 잠시 퇴각했다가 초지진,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강력한 화력을 갖춘 미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백병전으로 맞섰지만 어재연과 아우 어재순(魚在淳) 등 350여 명의 조선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살아남은 일부 군사들도 자결하거나 강화해협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으며 중상자 20여 명만이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ckee) 중위 이하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만을 내었다. 미군은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수자기는 미군에 의해 내려질 때 일부가 찢어졌는데 오른쪽 아래 천을 덧 댄 부분이 그 흔적이다. 미국의 전쟁사에는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돼 있지만, 미군 역시 조선군의 투쟁정신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전투였다.

1871년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 어재연 장군이 수자기를 걸고 광성보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바탕에는 투철한 국가관과 자존적 신념이 내재되어 있었다.

글‧강옥엽(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이천의 인물

제목 어재연 – 살신보국의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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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은 대구영장을 거쳐 광양현감・평양중군(平壤中軍)・풍천부사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1866년(고종 3)에는 공충도(公忠道),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외환에 참여하였는데, 하나는 1866년 병인양요이고 또 하나는 1871년 신미양요이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으로 대표되는 두 사건은 모두 강화도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 우선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내침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한데, 프랑스 로즈함대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해온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는 통상요구뿐 아니라 1866년 병인박해 사건 때 프랑스 신부가 살해된 사실에 대한 보복을 조선침략의 또 다른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집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서양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라는 논리로 결사항전을 주문했고, 이는 병인양요 당시 병사들의 사생결단 저항으로 나타났다. 어재연도 우선봉(右先鋒)으로 병사를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를 수비하였다.

이 후 장군은 함경도 회령부사로 전직하여 북쪽지방에 자주 출몰하는 비적들을 소탕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는데, 비적 소탕으로 국경지역에 있는 회령지방의 개시(開市)와 경원지방의 개시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 발생 5년 후인 1871년 이번에는 미국의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바로 신미양요 사건이다. 사실 그 전인 1866년에 미국함대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평양 군민들의 화공을 받아 함대가 불타고 침몰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트집삼아 1871년 강화도에 침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록 많은 병사가 전사하는 등 피해는 컸지만 강화도 수비병은 사력을 다하여 미 해병대를 막아내었다. 당시 미 해병대는 로저스의 지휘 하에 강화도 광성보에 접근하였고, 그곳을 지키던 수비대장은 강화도 진무중군 어재연이었다. 어재연 장군은 동생 어재순과 600여 명의 군사로 항전하였는데, 실로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수자기(帥字旗), 장군기를 게양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항전 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전원이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던 그 모습이 미 해병대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어재연은 물론 그의 동생 어재순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충성심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전투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특히 이 중에서도 신미양요에서의 그의 모습은 애국의 표상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군사를 총지휘하는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애국함으로써 병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다음과 같은 미국 측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조선군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퇴각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 신미양요를 자신의 대외정책을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로 간주하며 백성들에게 서양세력을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다.

어재연 장군은 이천이 낳은 무장으로서 조선 말 서구의 침략 등 어려운 시기에조국을 지켜낸 살신보국(殺身輔國)의 표상이다. 조정에서도 장군의 충성심과 기개를 높이 사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삼군부 훈련원사를 수여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 하였으며 정문을 내려 치하하였다. 동생 어재순에게 역시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증수하고 정문의 은전을 내렸는데, 이에 따라 충장사 입구에 세워진 정문을 쌍충문이라 불렀다.

어재연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1984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3월 현재 후손 어용선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생가는 19세기 초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뒤쪽으로 규모가 큰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광채 모두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건물의 질도 우수한편이다. 광채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도 이때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집 앞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이 있고, ‘ㅡ’ 자형 사랑채가 바깥마당과 접해 있으며, 지붕의 형태는 우진각형이다.

한편, 강화도 불온면 덕성리에는 당시에 전사한 장군과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표충비가 세워져 있으며, 1973년에 생가 아래 우측에 충장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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